성주 이해하기 성주의 숨겨진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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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경북지역에서는 낙동강 상류의 안동지역과 중류의 칠곡지역, 최근 상주지역에서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고 있습니다. 같은 낙동강에 연해 있는 성주지역 역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될 가능성이 많은 곳 중에 하나입니다.

신석기시대

성주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나 다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들을 살펴볼 때 이 시기에 성주에도 사람이 살았으리라 추측되고 있습니다. 향후 고고학적 자료의 발견과 성과를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성주군 내의 청동기시대의 유적을 보면 낙동강과 그 지류인 백천(白川)과 이천(伊川)을 따라서 형성되고 있습니다. 유적을 통해서 보면 청동기시대 성주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생활로 인하여 낙동강과 그 지류의 평야지대로 진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기시대

청동기시대가 지나고 철기시대로 접어들게 되면서 경상도 지역에서는 삼한소국이 형성되었으며 성주지역에서도 이러한 소국이 형성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성주지역의 국읍은 지석묘집단의 분포만으로는 찾을 수 없는데 그렇다면 후대의 고분군자료를 이용하여 찾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현재 고분군 분포를 통하여 추정해보면 성산고분군이 위치하는 성주읍 일대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일부 이견(異見)은 있으나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에 기록된 반로국(半路國 :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반파국(伴跛國))이 성주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가야시대

철기시대 형성된 소국을 모체로 하여 성주에는 6가야의 하나인 성산가야(星山伽倻)가 형성되게 됩니다. 성산가야에 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오가야(五伽倻)조에 실려 있는데 이를 통해 보면 직접적이지는 않지만 성산가야가 씨족공동체적인 성격을 띠는 각각의 ‘읍락(邑落)'과 정치 · 경제의 중심지적 역할을 수행하던 ‘국읍(國邑)', 그리고 ‘소도(蘇塗)'라는 별읍으로 구성되었으며 관료조직이 존재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산가야의 국읍지는 성산동고분군이 위치하는 성주읍 일대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는 성산동고분군이 성주군 내에서는 타 지역 고분군들보다 규모면에서 가장 월등하고 부장품으로 보았을 때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읍락지는 각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 지역일 것으로 추정되며, 지금의 면단위지역과 거의 유사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삼국 및 신라시대

성산가야가 신라에 병합된 이후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地理志)에 일리군(一利郡)으로 편제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신라는 주변의 소국들을 군사적인 정복 또는 소국의 항복 등으로 복속시키면서 피정복소국들을 지방체제에 편입하였는데, 삼국사기의 기록들을 보면 소국을 군 또는 현, 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신라는 피정복 소국들을 군, 현으로 삼아 지방체제에 편입시키면서 그 단위를 기존의 소국으로 하였고 그 국명을 그대로 고을이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성주의 경우도 삼국사기에 처음 신라에 병합되면서는 일리군(一利郡)으로 불리어졌지만, 삼국을 통일한 후 경덕왕(景德王) 16년(757)에 지방의 군현을 대대적으로 개편하면서 이전의 성산가야라는 지명을 이용하여 성산군(星山郡)으로 편제되었습니다.

고려시대

940년(태조 23) 성주는 경산부(京山府)로 승격되고, 신안현 · 적산현(狄山縣) · 수동현(壽同縣) · 유산현을 통폐합하여 지배하였습니다. 980년(경종 6)에 광평군(廣平郡)으로 강등되었다가 995년(성종 14) 대주(岱州)로 개칭되면서 도단련사(都團練使)가 파견되었으며, 1012년(현종 3)에 다시 단련사가 폐지되고, 1018년 지경산부사(知京山府事)가 파견되어 고령군(高靈郡)·약목현(若木縣)·지례현(知禮縣)·가리현(加利縣)·화원현(花園縣)·황간현(黃澗縣)·팔거현·김산현(金山縣)·관성현(管城縣)·안읍현(安邑縣)·양산현(陽山縣)·이산현(利山縣)·대구현(大丘縣)·하빈현(河濱縣)·인동현(仁同縣) 등 1군 14현을 거느리는 등 그 관할 구역의 대폭적인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경산부의 행정체계는 12세기 중엽부터 변화가 나타나게 됩니다. 즉 관할 속읍이었던 대구현은 인종 21년 현령관으로 승격되면서 경산부의 속읍인 화원현·하빈현을 이속 받았고, 명종 5년 고령군, 동왕 6년 이산현에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습니다. 관성현 역시 충선왕 5년 지사군(知事郡)으로 승격하면서 경산부 예하의 이산현, 안읍현, 양산현 등 3개의 속읍을 이속 받았습니다. 그리고 공양왕 2년 인동현, 지례현, 금산현, 황간현에 감무가 파견되었습니다.

이처럼 경산부는 대구현과 관성현의 주읍으로의 승격, 5개 군현의 감무설치(이산현은 뒤에 다시 관성군에 來屬) 등으로 영역이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태종조의 지방제도의 개혁에 따라 성주목으로 승격되면서 가리현·팔거현·화원현을 속현으로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성주는 경상도에서는 가장 넓은 간전결수(墾田結數)를 보유하였고, 많은 제언(堤堰)이 축조되어 있는 등 경제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곳이었으며, 인재도 많이 배출한 영남의 거읍 중 하나였습니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는 일시 경상도 감영이 성주목 팔거(현재 칠곡)에 두어지기도 하였습니다.

근대의 성주

근대에 들어 성주는 1895년 근대적인 지방행정구역의 개편에 따라 성주군으로 되어 대구부에 속하였으며, 1905년에는 인곡(仁谷)·덕곡(德谷)·노다(老多)·다산(茶山) 등 4개면이 고령군으로, 노곡면(蘆谷面)이 현풍군(玄風郡)으로, 증산면(甑山面)이 지례군에 각각 편입되었기 때문에 관할구역이 자연히 축소되었습니다.

개화의 물결이 이곳에도 미쳐 1906년 사립학교가 세워졌고,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에는 이의 회복을 위한 민족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습니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성주도 선남면·가천면·성주면·성주읍내장 등지에서 맹렬한 만세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다수의 인물이 일본경찰에 체포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경상도 유림이 중심이 되고 전국 유림대표 137명이 연서한 파리장서(Paris 長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진 독립청원서였는데, 이 고장 출신 김창숙(金昌淑)이 중국 망명 시 휴대하여 평화회의에 우송하였으며, 세계 각국 및 전국 향교에 이 문서를 보내는 데에도 핵심적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970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성주읍에 건립되었습니다.

광복이후의 성주

해방 후, 성주에서는 좌우익의 대립이 첨예하였는데, 1945년 12월 좌익의 성주인민위원회(星州人民委員會)가 결성되어 시장세를 징수하는 권리를 사들이는 등 매우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고, 우익의 경우에는 1946년 5월 11일 대한독립촉성성주국민회(大韓獨立促成星州國民會)를 결성하여 대응하였으며, 7월 14일에는 인민당성주지부(人民黨星州支部)가 결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좌익과 우익의 대립은 대구에서 시작된 10·1폭동사건이 파급되어 경찰서가 습격되는 등의 혼란이 있었지만 곧 질서가 회복되었습니다. 또한 성주는 6·25남침 이후 낙동강전선이 형성되었을 때 주전선(主戰線)의 배후지였기 때문에 공산군에 의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업데이트 날짜 : 2018-01-12 14:3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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