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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을 꾸짖다 목숨이 끊어진 박영서 장군

자는 효원, 본관은 순천, 가권(可權)의 후손, 의민공 이현(毅愍公而絢)의 아들로 수륜면 윤동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하여 동리 사람들에게 많은 칭찬을 받았으며 자라면서 더욱 지혜와 용기가 뛰어나고 성품 또한 의리에 밝고 담력이 대단하였다.

1602년(선조 35년), 무과에 급제하여 승의랑(承議郞)으로 옥구현감(沃溝縣監)을 거쳐 창성부사(昌城府使)가 되었다.

그는 백성들을 잘 다스려 왕께서 관복과 띠(衣非)를 내렸으며 강 건너 여진(女眞)족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침범하는 일이 없었다.

1624년(인조 2년), 이 괄(李适)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평안도 병마절도사(平安道兵馬節度使) 겸 부원수(副元帥)로 영변(寧邊)에 가 있게 된데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서울로 진격했다. 막강한 군대와 탁월한 작전으로 관군을 차례로 격파하자, 임금 인조는 공주(公州)로 피난, 이 괄은 서울을 무혈점령했다.

이 때, 장군은 선봉장(先鋒將)이 되어 황해도 황주 신교(黃州新橋)까지 쫓아와서 싸움을 하였으나 첫 번 싸움에서 관군의 남이흥(南以興), 정충신(鄭忠信)의 양쪽 군사가 무너지는 바람에 장군의 군사도 무너져 사태가 급하고 군사를 재정비 할 겨를도 없이, 장군은 단기(單騎)로 적진에 돌진, 수많은 적을 베었으나 아깝게도 반란군의 포로가 되었다. 주(公州)로 피난, 이 괄은 서울을 무혈점령했다.

이 괄은 평소부터 장군의 용맹을 부러워하던 차라 자기편이 되어 주면 반란이 성공한 후에 많은 은상(恩賞)과 병조판서를 주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러나, 장군은 성난 눈을 횃불같이 부릅뜨고 큰 소리로 꾸짖으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빼내어 자기 말의 목을 쳤다.

적은 장군의 충성된 마음을 굽힐 수 없음을 깨닫고, 장군을 기둥에 묶어 놓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하나하나 뽑고 큰 칼로 살을 베어 내어 몸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이 온 몸을 피투성이가 되게 하였다. 장군은 전신에 피를 흘리고 기진맥진하였으나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목숨이 끊어졌다.

반란이 평정되자 인조임금은 장군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하고 그 고을에서 제사지내게 했다.

그 뒤, 영조 때에 다시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忠壯)이라 시호를 내렸으며 수륜의 덕봉사(德峰祠)와 순천 세덕사(世德祠)에 제향되었다. 무덤은 성주 수륜면 수륜리에 있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5 16:58:30

자료담당자
문화관광과     054-930-83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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