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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견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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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에서도 이름 날린 산화 이견간 선생

'객사(客舍) 깊은 밤 등불만 가물가물
초라한 내 모습 중보다 담박(澹泊)하구나.
두견새 울어대어 밤새도록 울어대어
간밤에 저 산꽃 얼마나 졌을까.'
(旅館挑殘一盞橙 使革風味澹於僧 隔窓杜宇終宵聽 啼在山花第幾 層)

이 시는 이 견간(李堅幹) 선생이 1317년(충숙왕 4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갈 때 중국 땅 상주(常州) 객관(客館)에 머물면서 두견새 소리를 듣고 지은 시로 이 시가 세상에 퍼져 널리 회자(膾炙)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 시의 끝구절에 나오는 말을 따서 '산화(山花)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선생은 벽진(碧珍) 이씨로서 자는 직향(直鄕), 호는 국헌(菊軒)이다. 벽진장군 총언의 둘째 아들 영(永)의 9대손으로 고려 24대 원종때(1259∼1274)에 나서 1330년(충숙왕 17년)에 돌아갔다.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 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제, 주 방이 자리에서 내려가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여기에 이르렀습니다."하고 , 선생을 극구 칭찬하며 종이 상전을 대하듯 하였다. 고려의 충렬(忠烈), 충선(忠宣), 충숙(忠肅) 3조에 벼슬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 민부전서(民部典書),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원나라 황제가 선생의 문장과 풍채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음에 호음실(好音谷)이라 하며 그 그림을 그려 바치니 이것을 황제가 보고 명(椧)자를 새로 만들어 내리니 이로 인하여 호음실이 지금의 성주 초전면 홈실(椧谷)이 되었다.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 고려말 두문동 의사로 학자)이 "고려 중엽에 많은 선비중 유학자(儒學者)의 도를 실천한 이는 유독 제주 우탁(祭酒 禹倬), 문안 이견간(文安 李堅幹), 문충 이제현(文忠 李齊賢) 등 몇 사람 뿐이다. 우 탁의 주역(周易)과 이견간의 춘추(春秋)는 비록 옛날 중국의 한(漢)나라, 진(晋)나라의 전문가라도 따르지 못할 것이며, 이견간, 이제현은 그 인품이 매우 고결하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나라를 다스리는 방책이 가히 육선공(陸宣公 : 8세기 후반 당나라의 한림학사 육 지(陸贄)와 짝이 될것이다"고 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무덤은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청계산(靑溪山)에 있었으나 임진왜란에 실전(失傳)되고 후손이 성주 초전 홈실에 단(壇)을 모으고 문곡서당(汶谷書堂)을 세워 매년 한식(寒食)날 제사를 받든다. 또 홈실에는 선생이 살던 옛 집터가 있어 유허비(遺墟碑)가 있고, 신도비(神道碑)도 세워졌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5 17: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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