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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삼은 이숭인 선생

출생

선생은 성주 이씨로 장경(長庚)의 후손이며, 성산군(星山君) 원구(元具)의 아들로 자(字)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이며, 1349년(고려 충정왕 원년) 용산리(龍山里: 지금의 성주읍 경산리)에서 태어나, 1392년(태조 원년)에 돌아갔다.

모친의 교훈

어렸을 때, 모친 언양 김씨(彦陽金氏)께서 항상 선생의 형제를 훈계하여 말씀하기를
"몽가(선생의 어릴 때 이름), 너는 쉬지 않고 힘써 배워야 할 것이다. 보한(선생의 아우 숭문의 어릴 때 이름), 너는 무(武)를 닦아 활을 쏘고, 말을 다룸에 마땅히 남보다 앞서야 할 것이다. 의복은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니, 사치해서는 안되고 음식은 굶주림을 면하면 될 일이지 색다른 것을 찾아서는 안된다." 고 하였다. 예로부터 현숙한 어머니가 있어서 현철(賢哲)한 아들을 만든다고 하였듯이 선생의 성장에 끼친 어머니의 영향이 매우 컸다고 한다. 목은집(牧隱集)에는 선생의 지기(志氣)가 노성(老成)하여 주위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했고 문장이 탁월하고 조예(造詣)가 측량하기 어려워 나이가 많은 사람들도 그에게 배우고 복종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목은 이 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와 함께 고려말의 삼은(三隱)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학문은 불훤재 신 현(不萱齋 申賢), 목은 이 색(牧殷 李穡)에게 배웠으며, 삼은에 도은 대신 야은 길 재(冶隱吉再)를 말하기도 한다.

벼슬살이와 외교문서 교훈

공민왕 때 16세로 문과에 급제하고 21세에 태학(太學 : 고려 때 국자감의 한분과, 문무관 5품 이상의 자손과 3품관의 자손에 한하여 입학 자격을 주었음. 지금의 국립대학)교수로 임명되어 문학을 진흥했으며, 명(明)나라 태조가 건국하여 국서(國書)를 보내왔을 때, 왕명으로 그 답서를 지었다. 1371년(공민완 20년),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아직 나이 어리다 하여 보내지 않았다.

진덕박사(進德博士), 예의산랑(禮儀散郞), 예문응교(藝文應敎), 문하사인(門下舍人) 등과 함께 성균관학관(成均館學官)을 겸하고 세자사부(世子師傅)로 직접 강론에 참가했다. 공민왕이 암살되고(1374년), 우왕이 왕위에 오르자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서 친원파, 친명파의 대립이 심하였는데 선생은 김구용(金九容), 정도전(鄭道傳)등과 함께 북원(北元)의 사신을 돌려 보낼 것을 주장하다가 친원파의 득세로 한때 성주로 귀양살이를 했다.

1377년(우왕 3년), 다시 불러서 성균사성(成均司成), 사의대부(司議大夫)를 거쳐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으로 정당문학 정몽주(政堂文學鄭夢周)와 함께 실록을 편수하였다.

1383년(우왕 7년), 명나라 태조가 공민왕과 명나라 사신을 죽인 일로 고려 조정을 너무 크게 탈을 잡으므로 왕명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답서를 지어 바쳤는데 그 글이 너무 명문장(名文章)이라 명나라 태조가 감탄하여 공민왕에게 시호를 내리고 우왕의 왕위 계승을 허락하며, 명나라에 바치는 공물(貢物)도 많이 줄이는 등 선생의 문장덕(文章德)으로 어려운 국제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명나라 황제가 선생을 한번 보기를 원하므로1386년(우왕12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가니 명나라 황제가 선생을 심히 사랑하여 관복을 주어 명나라 고관들과 한 자리에 서게 하는 두터운 대우를 받고, 또 명나라의 명사(名士)들을 모아 선생과 함께 시험을 하였으나 선생의 재질이 단연 뛰어나서 황제는 관위에다 백옥을 얹어 문창성(文昌星)임을 표시하고 관복 1벌, 벼루 1개를 특별히 하사하였다.

선생은 정몽주(鄭夢周)와 의논하여 이 영광을 고려의 조정에 고루 나누어 가지려고 황제께 이 관복을 고려에서도 착용하도록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금지팡이는 난리통에 잃어버렸으며 벼루는 지금도 후손인 성주 이씨 종가에 소중히 보관되고 있다.
이 때부터 우리 나라에서 명나라 관복을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선생이 주장하여 종묘 및 사대부의 제의(宗廟士大夫祭儀)를 실시하게 되었으며, 예기(禮記)를 판각으로 인쇄하여 풍속을 바로잡았다.

1388년, 정도전(鄭道傳) 등이 우왕을 강화로 내쫓고 이성계(李成桂)를 왕으로 추대하려고 하매, 선생은 창왕을 세웠다. 1389년(창왕 1년 공양왕 1년) 이 색(李穡), 김사안(金士安)과 재차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와서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어 박천상(朴天祥), 하 륜(河崙) 등과 함께 영흥군환(永興君 環)의 유배 및 일본표류 사건(1371∼1389년간 일본 표류) 의 진실 여부를 조사하다가 무고를 입어 극형을 받게 되자,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 이 림(李琳) 등의 주선으로 풀려나와 서연관이 되었으나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경산부(성주)로 유배되었다.

"공양왕과 이 성계가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치려고 하며, 이를 반대한 이 색등 중신들이 살해되고 우현보(禹玄寶) 등은 유배되었다"고 무고를 했다. 이 사실이 명나라에 가 있던 사신 조 반(趙畔)의 귀국 보고에서 드러나 선생과 이색, 권 근(權近) 등 중신들이 옥에 갇히는 이·초(彛·初)의 옥사가 벌어져 청주옥에 갇혔다가 풀려 나오고,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었다.

선생의 순국(殉國)

1392년(공양왕 4년) 4월, 이 성계가 말에서 떨어져 해주에서 요양하는 것을 정몽주와 같이 의논하여 이성계를 죽이려다 발각되어 정 몽주는 선죽교에서 살해당하고, 선생은 붙잡혔으나 풀려 나와서 고향에 돌아와 남화관(南訛觀) 별장을 지었다. 정몽주가 살해된 후 선생은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지인 전라도 남평(지금의 나주시)에서 조선 개국후 살해 되었다.

선생은 1392년(태조 원년), 향년 44세를 일기로 고려의 국운과 함께 순국 하였던 것이다. 그 후 1401년(태종 1년), 벼슬을 다시 내리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 했다. 1656년(효종 7년), 충현사에 배향하고 개성의 두문동서원에 72현 중 한 사람으로 올려 있다. 태종이 권 근(權近)과 변계량(卞季良)에게 명하여 선생의 문집 2권을 발간하였다. 선생은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원나라와 명나라와의 복잡한 국제관계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으며, 그의 문장은 명 태조를 감복시켰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5 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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