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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결 충직한 재상 이원조 선생

가계(家系)와 출생(出生)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 본관은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開國功臣) 성산백(星山伯) 능일(能一)의 27대손이요, 형진(亨鎭)의 차자로 1792년(정조 16년) 2월 6일, 월항면 대산리(月恒面大山里) 한개(大浦)에서 출생하여 그 백부인 증 의정부 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규진(奎鎭)의 양자(養子)가 되었으며, 사도제자에 절의를 다하여 북비공(北扉公)으로 이름난 돈재(遯齋) 석문(碩文)의 증손으로 초명(初名)은 영조(永祚)였다.

면학(勉學)과 급제(及第)

총명, 영민하여 어려서 입재 정종로(立齋 鄭宗魯)에게 수학, 1809년(순조 9년), 약관 18세로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였으나 고향에 돌아와 다시 학문에 열중하였다. 1818년(순조 18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있을 때, 평소 그를 지극히 아껴주던 경상도관찰사 이존수(李存秀)로부터 "그대는 나라의 큰 그릇이니 오직 책을 읽어 지혜를 담으라. 이것은 사사로운 정리를 넘어서 내가 나라에 필요한 인재를 위해 보내는 것이니 달리 생각말라. 대기(大器)를 위해 재물을 조금 쓰기로서니 아까울 게 뭐 있으랴."고 한 내용의 편지와 함께 귀중한 책을 수백권이나 보내왔다. 이로부터 더욱 학문에 정진하여 마침내 도학문장(道學文章)이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응와집(凝窩集) 12권, 성경(性經) 2권, 그밖에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행적

선생은 노론(老論) 및 안동 김씨의 세도정권 속에서 남인(南人)으로 당파가 다르기 때문에 초년에 등과해도 그 출세 길이 매우 더디었으며, 벼슬살이 수십년이 모함과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826년(순조 26년), 35세에 처음으로 목민관이 되니 결성현감(結城縣監) 자리였다. 도임하자 가뭄에 시달리던 때인데 허물어진 향청(鄕廳)을 보고 급히 감실(龕室: 신주를 모셔 두는곳)을 만들어 위패(位牌)를 모시고 연무청으로 옮기던 날 밤에 향청이 무너져서 이를 새로 짓고 이듬해 생가의 모친상을 입어 고향에 돌아왔는데 결성현민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웠다.

1841년(헌종 7년), 50세로 제주목사(濟州牧使)가 되었을 때, 헌종 임금으로부터 유서통(諭書筒)을 하사받아 제주도 정사의 전권(全權)을 위임받고, 선참후계(先斬後啓)의 권한까지 부여되었다. 전라감사에게 구호양곡을 요구하여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고, 제주도에 귀양와 있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를 찾아 주민들의 교학(敎學)을 당부, 동계 정 온(桐溪 鄭蘊)의 사당(祠堂)을 세워 그 곁에 서당(書堂)을 세우고 청년들로 하여금 글공부를 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이해진 군졸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유사시에 대비하는 한편 못 쓰게 된 목장을 논밭으로 만들어 식량을 증진하고 경로(敬老)잔치를 열어 주민들의 민심을 수습하며 제주도에 처음 생긴 도둑을 기지(機智)로써 잡았다.

1847년(헌종 13년), 56세에 평안도의 자산부사(慈山府使)가 되니 자산은 지리상 국방의 요지로 청국과 국경을 배경으로 한 도적떼들이 창궐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청군과 합동하여 압록강에서 도적떼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군사훈련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며, 자모산성(慈母山城)을 수축, 군기의 수리, 배를 모아 유사시에 대비하게 하였다. 틈이 나면 향교에 나가 선비들을 모아 강론하여 학자부사(學者府使)란 평이 났을 정도였으며, 경로잔치를 베풀어 충효사상을 고취하는 한편, 선비들의 한문연구를 위해 향교에 재사2동을 세웠다.

1849년(헌종 15년), 58세로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어 모든 정사를 원칙대로 공평하게 처리하였다. 과중한 세금을 감하고, 환곡(還穀)을 고르게 나누어 주어 서민(庶民)들에게 혜택이 들어가도록 했다. 그러나 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使) 김세호(金世鎬)가 경주에 도착 즉시 긴히 쓸 데가 있다면서 돈 300량을 요구하매 이는 공공연한 뇌물 요구이기에 거절하였더니, 김세호 어사는 이에 앙심을 품고 경주부윤은 정사를 소홀히 하고 백성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조정에 장계(狀啓)하여 파직(罷職)되었다.

조정(중앙)에서의 벼슬살이

1810년(순조 10년), 19세로 승정원의 가주서(假住書)가 되어 8년 동안 중요한 국사(國史)의 어전기주(御前記注) 100여회, 그러나 노론정권하에서 남인인 선생의 출세길이 트일 리가 없었다.

1817년, 26세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그 이후 1840년(헌종 5년)까지 20여년간 정랑(正郞), 지평(持平), 사서(司書), 정언(正言), 장령(掌令),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전전, 52세로 참의(參義), 53세로 우부승지(右副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이어 좌부승지(左副承旨), 61세에 대사간(大司諫), 62세에 좌승지(左承旨) 겸 상의제조(尙衣提調), 경연참찬관, 64세에 경연특진관(經筵特進官), 73세에 다시 대사간, 병조참판, 1865년(고종 2년) 74세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고 정훈(政勳)의 원로(元老)로 기로소(耆老所)에 들고 선생의 화상(畵像)을 그려 영수각 에 모시게 되었으며, 영수목(靈壽木 : 지팡이)도 짚고 다니게 되었다.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75세의 늙은 몸으로 의병을 모집하는 등 나랏일에 전력하였으며, 76세 때 나라에서 선생의 대과급제 60주년을 기념표창하는 회방(回榜)의 영예와 정헌대부(正憲大夫)의 교지를 받았으며 1871년(고종 8년), 80세가 되던 정월에 숭정대부 용양위 상호군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 벼슬을 받고 그 해 8월 초이튿날 별세하니 60여년의 관직생활에서 오로지 충직과 청렴결백으로 일관한 한말의 국가 주석(國家柱石)의 신하요, 성주가 낳은 거성(巨星)이었다.

만년(晩年)의 자적(自適)

경주부윤으로 있다가 부당한 뇌물을 요구하는 암행어사 김세호의 청을 거절한 앙갚음의 장계로 파직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가야산 북쪽 기슭인 가천면 신계리(伽泉面新界里)의 포천곡류(布川曲流)곁에 만귀정(晩歸亭)을 지어 자연인으로서의 생활을 즐기며 저술(著述)에 전념하는 한편, 학계(學契)를 모아 향리 선비들의 교육에도 진력하니 모인 제자들이 3∼400명에 이르렀다.

1862년(철종 13년), 진주에 민란(民亂)이 일어나자, 이것이 전국으로 번지니 성주에서도 민란이 일어났다. 71세의 노구로 성주 관아(官衙)까지 나와 폭도들을 설득하여 물러가게 하였다. 이듬해인 72세 때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여 대원군이 섭정을 하게 되자 국정을 바로잡도록 상소를 올려, 상소를 읽고 감탄한 대원군의 예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76세에 부인 사망, 78세에 장남 정상(鼎相)의 사망으로 기력이 더욱 쇠잔하여 1871년, 80세를 일기로 향리에서 별세하고, 그의 사후(死後) 10년이 되던 1880년(고종 17년) 5월 나라에선 정헌(定憲)이라 시호를 내리고 그의 충절을 기리어 파란 많던 일생을 위로해 주었다.

상소(上疏)와 진언(進言)

1838년(헌종4년), "나라안의 사치(奢侈)를 금하고 탐관오리들을 극형에 처해 군신간의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들을 구휼(救恤)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려 헌종이 극찬하고 이를 가납하였다.

1853년(철종 4년), 경연참찬관으로 "각 고을마다 문란해진 3정에다가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이 어렵기 짝이 없으니 지방관원들과 토호(土豪)들의 수탈(收奪)을 엄금하고 선정을 베풀도록" 철종에게 진언했으나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진 철종으로선 어떻게 해 볼 능력조차 없었다.

1862년(철종 13년), 진주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전국 도처에 민란이 파급되니 "3정청을 세우고 민심의 소요를 없애려 하는 것은 잘된 일이나 그보다 더 급한 것은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있다. 60여년의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정치로 백성들의 피땀을 수탈해 갔으니 아무리 3정청을 세워 바르게 한다 한들 떠난 민심을 바로 돌리기에는 힘들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당파를 초월한 정사를 펴서 새로움에 목마른 백성들을 살피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정권 연명(政權延命)에 급급한 안동 김씨들의 묵살(默殺)로 그치었다.

1863년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자 "천하 만사가 다 큰 근본이 있으며 매사에 요긴한 것이 있는데 한 근본과 네 가지 요긴한 말로 올바른 왕도(王道)를 말하면, 한 근본이란 임금의 마음이며, 마음의 근본은 성실공평(誠實公平)이다. 네 가지 요긴한 것은 첫째 : 수신(修身)이니 백성들에게 학문을 부지런히 닦도록 해서 덕성(德性)을 기르게 하고, 도박과 오락을 멀리 해서 큰 뜻을 품도록 하고, 둘째 : 휼민(恤民)이니 백성을 아낄 줄 알고 그들의 피땀으로 거둬들인 세금을 아껴써서 궁중의 사치를 없애고 벼슬아치들의 수탈과 뇌물을 엄금하고, 셋째 : 용인(用人)이니 모름지기 신상필벌(信賞必罰)을 엄격히 하는 사람을 중용(重用)하는 기풍(氣風)을 세울 것이며, 넷째 : 여세(勵世)니 지금 항간에 번지고 있는 서학(西學 : 천주교)은 조상 전래의 미풍양속을 해칠 뿐 아니라 민심을 현혹시키고 있으니, 이를 경계하고, 고을마다 향약(鄕約)을 펴 소요를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다. 지금 백성들은 새로 모신 상감의 어진 선정을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두루 살펴 오늘의 난국을 극복해 달라."는 상소를 올리니 대원군도 이 상소를 보고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염결 충직한 선생의 일화 몇 가지

일화 1.

생가의 부친상을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병을 앓다가 해를 넘긴 44세 때의 어느 날 밤 한 집안이지만 당파가 다른 노론집인 四종동생(10촌) 원규(源奎)가 갑자기 죽고 그 유언에 따라 四종제수(원규의 부인)가 선생에게 7살난 3남 귀상(龜相)을 양자로 달라 하니, 이쪽보다도 더 가까운 친척도 있는데 고인의 유언이 그런지라 당도 다른 집이지만 어린 아들 귀상을 양자로 보내어 대를 잇게 하여 70여년간 집안끼리 당파 탓으로 서먹서먹하던 거리감을 하루아침에 없애게 되었다. 양자로 간 귀상은 1882년(고종 19년), 전시문과에 갑과 도장원(都壯元)으로 홍문관 옥당(弘文館玉堂)에서 녹선(錄選)되고 왕명으로 옥당기문(玉堂記文)을 지어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져 있다.

일화 2.

51세 때 제주목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아전들을 이끌고 민정을 살피러 나온 길에 애간장이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곡성을 듣고 행렬을 멈췄다. 울음의 연유를 알아보니 지난 밤 아래채에서 자던 남편이 갑자기 불이 나는 바람에 나오지 못하고 타 죽었다는 것이다.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려고 그 집으로 들어서자 젊은 여인은 더욱 소리 높여 슬피 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흐느껴 우는 여인의 등줄기를 내려다 보던 선생은 느닷없이 관졸들에게 죽은 남편의 시체를 끄집어 내어보라고 명령했다. 앙탈을 하는 여인을 옆으로 밀어내고 시체의 입을 열게 하여 입안을 살피던 선생은 관졸들을 시켜 당장에 그 여인을 묶은뒤 우리속에 있는 돼지 1마리를 끌어내어 말뚝에 매어 불을 질렀다.

살아있는 놈을 묶고 불을 질렀으니 몸부림치고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한참 법석을 떨다가 뜨거운 열기에 드디어 죽고 말았다. 불이 사위어지자 여인 앞에 죽은 돼지를 갖다 놓고 입을 열어 보게 했다. 돼지의 입안을 들여다보던 여인은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돼지는 살려고 발버둥을 친 탓인지 입속엔 그을음과 오물투성이 였다. 그러나 여인의 남편 입속은 너무나 깨끗한 채로 죽어 있었다.

그제야 여인은 죽을죄를 지었으니 목숨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여인의 말인 즉, 2년 전부터 남편이 이름 모를 병으로 시름시름 앓아 누워서 남편 구실을 못 하므로 끓어오르는 욕정을 참을 길 없어 이웃집 남자와 눈이 맞게 되었는데 남편이 그것을 눈치 챈 것 같아 생각 끝에 보약이라 속이고 부자를 달여 먹여서 죽였다는 것이다. 선생의 예리한 통찰력 앞에 간부와 간부(姦夫, 姦婦)가 극형을 받아, 비명에 간 남편의 원혼(怨魂)을 달래 주었다.

일화 3.

1844년(현종 10년), 선생이 53세 때 좌부승지로 입직(入直)했던 어느 날, 밤도 깊은 4경이나 되었을 무렵, 왕이 주무시는 침소 근처에서 난데없이 "불이야!"하고 외마디 고함이 터져 나왔다. 선생은 자다가 말고 문을 열어 화광이 충천하는 곳으로 내달렸다. 지나가는 관원을 붙들고 불이 난 곳을 물으니 "다행히 대내(大內)는 아니고 친위대가 지금 달려가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내가 아니라 일단 안심은 되었으나 곧 불이 난 곳으로 달려가 불을 끄는 군사들에게 "이미 불이 붙은 집은 버려두고 다른 곳으로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고 있는데 대궐문을 지키는 수문장(守門將)이 달려와 불빛을 본 군중들이 불을 끄겠다고 궐문밖에 모여 있으며, 병조판서 조 대감도 군졸을 끌고 와서 궐문을 열라고 하니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급한 불은 잡은 후인지라 궐내의 군사들만 하여도 충분한 터이라 어떤 일이 있어도 문을 열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불을 끄고 난 후 궐문 밖 군중들과 군사를 해산시켰다. 이것은 수 많은 군중들이나 병장기를 든 군사들 가운데 불순한 사람이 끼어 들어와 군중이 소란한 틈을 타서 무슨 사고라도 저지를까 걱정하는 깊은 생각에서 벼슬이 더 높은 병조판서라 할지라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일화 4.

1866년(고종3년), 선생이 75세 때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으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희생되니 프랑스군은 군함 7척을 끌고 인천 앞 바다로 쳐 들어와서 강화도(江華島)를 점령하고 군기와 식량, 서적 등을 약탈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선생은 프랑스 군대의 만행을 듣고 75세의 늙은 몸이지만 도저히 앉아서 묵과(默過)할 수가 없어, 자신도 프랑스 함대의 진압에 나서겠다고 자원(自願)을 하는 한편, 고향인 성주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했는데 프랑스 함대는 곳곳에서 참패만 당하고 물러가 버렸다.

늙은 몸으로 프랑스 함대를 무찌르는데 자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원군은 훗날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의 승리는 오르지 이 대감의 충성어린 마음씨에 하늘이 도운 탓이요."하며 칭찬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나라가 위태로운 데에 노소(老少)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뿐인데 그처럼 과찬해 주시니 오히려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겸손하게 대답하였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9 18: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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