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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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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으로 일관한 이조년 선생

충성어린 시조

이화(梨化)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은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시조는 선생이 벼슬에서 물러나 향리(鄕里)인 성주에 살 때 나라와 임금의 일을 걱정하여 잠 못 이루는 심정을 읊은 시조로서 그의 충성심이 잘 나타나 있다.

출생과 관직생활

선생은 성주 이씨(星州李氏) 이 장경(李長庚)의 5남으로 자(字)는 원로(元老), 호는 백화헌(百花軒) 또는 매운당(梅雲堂)이라 불렀다. 1269년(고려 원종 10년)에 태어나 향년 75세로 1343년(충혜왕 복위 4년)에 돌아갔다.
용모가 빼어나고 자랄수록 더욱 총명하고 뜻이 굳으며 학문에 힘써, 학자, 문학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국량(局量)이 넓고 남의 위급함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 구하는 성미였다.

회헌 안유(晦軒安裕)의 제자로 1294년(충렬왕 20년) 진사(進士)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 지합주사(知陜州事), 비서랑(秘書郞) 등 벼슬을 거쳐 1306년(충렬왕 32년) 비서승(秘書丞)으로 왕을 원(元) 나라에 호종(扈從)했을 때, 왕유소(王惟昭), 송방영(宋邦英)의 무리가 충렬왕 부자를 이간(離間)시키고 충선왕(忠宣王)을 모함하여 서홍후 전(瑞興侯 琠)으로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꾀하다가 충선왕의 세력이 커지자 그들은 처벌되었는데 선생은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았으나 이 사건에 연루(連累)되어 귀양살이를 하고 풀려 나와 성주에서 13년간 여러 가지 꽃 재배에 낙을 붙여 시를 지으며 집에다 '백화헌(百花軒)'이라 현판을 써서 달았다.(그의 집터는 지금의 성주 초등학교 자리로 뒷 날 조선시대에 그 자리에 객관이 서고 백화헌이란 현판은 객관(客館)의 동대청에 걸었다)

원(元)나라에서의 임금을 구하는 활동

1322년(충숙왕 9년) 간신들이 왕의 부자를 무고(誣告)하여 옥사(獄事)가 일어나매 분연히 일어나 여관(旅館)과 한림원(翰林院)의 관원 16명의 서명을 받아 단신으로 원나라에 가서 왕의 억울함을 상소하고 이를 바로잡았다.

1327년(충렬왕 17년), 감찰장령(監察掌令)으로 발탁되고 전리총랑(典理摠郞 : 지금의 내무부 문교부 차관)으로 관동지방을 안무(按撫)했다.

1331년(충혜왕 17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여러 사람이 작당하여 왕을 원나라 황제에게 무고(誣告)하니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온갖 설유(說諭)로 무사히 왕을 모시고 1333년(충숙왕 복위 2년) 환국(還國)하고, 1339년(충숙왕 복위 8년) 조 적의 무리가 또 충혜왕을 원나라 황제에게 무고하므로 71살의 늙은 몸으로 왕을 따라 원나라에 가서 조 적들의 역모(逆謀)와 왕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해결을 본 후 1340년(충혜황 복위 1년) 충혜왕과 같이 고국에 돌아오니 충혜왕은 그 충성에 감사하여 군부판서(軍簿判書 : 지금의 국방부장관)로 특배(特拜)하고 조 적의 무리를 엄중히 다스리니 일부 조 적의 무리가 원나라로 달아나서 또 왕을 무고하여 원나라에서는 왕의 인장(印章)과 재상 홍림(洪淋)등을 잡아가므로 김륜(金倫)과 같이 또다시 원나라에 들어가서 조 적의 진당이 왕을 무고(誣告)하였음을 역설하여 왕이 옥에서 풀려 나오고 다시 복위하게 되어 왕을 모시고 환국하였다.

늙어서도 충성어린 간언(諫言)

그 후 충혜왕은 또다시 오락과 음란에 빠지고 국사(國事)를 게을리 하므로 선생은 이를 슬퍼하여 여러 번 왕의 잘못을 충간(忠諫)하니 왕은 노했다가도 그 충성심에 잘못을 사과하곤 하였다. 그러나, 왕은 여전히 잘못을 저지르니 선생은 간(諫)하다 못해, 집에 돌아와 탄식하기를 "왕의 나이는 한창이요, 방자한데 내 나이는 이미 늙어 왕을 바로잡아 줄 수 없으니 벼슬을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치리라." 하였다. 그러나, 나라를 생각하여 또 여러 번 왕에게 충간(忠諫)하여도 듣지 않으므로 1341년(충혜왕 복위 2년) 필마(匹馬)로 고향 성주에 돌아왔다.

1342년, 충혜왕은 그에게 시종공신(侍從功臣) 제1등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호를 내리고 그의 부모 처자에게도 전답을 내리었다.

사후(死後)의 일들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5월에 돌아가니 문열(文烈)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며, 1353년(공민왕 2년), 충혜왕 묘정에 배향(廟庭配享 : 공로 있는 선비를 죽은 뒤에 종묘 제사에 부제하던 일)되고, 1558년(조선 명종 13년), 당시의 성주목사(牧使) 노경린(盧慶麟)이 벽진에 연봉서원(延鳳書院)을 세우고 선생을 그 주향(主享)으로 향사(享祀)하였으며 퇴계 이 황(退溪 李滉)은 선생을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이라고 찬양하였다. 참으로 선생은 벼슬길에 나선 이후 일평생을 오직 충성으로 나라 위해 힘쓰신 분이라 하겠다.

백화헌 시(百花軒詩)

선생이 그의 백화헌을 두고 읊은 시 한편을 소개하면

이 꽃 저 꽃 주섬주섬 심을 것 있나,
백화헌에 백화를 피워야 맛인가.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업데이트 날짜 : 2017-12-19 18: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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