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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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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대한민국 빛낸 의지의 마라토너 이창훈

한국과 일본이 수교하기 전 1958년 5월에 있었던 제3회 도쿄 아시안게임에 출전, 침략자의 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일본 땅에 식민지 조선인의 후예가 당당히 1위를 차지하는 자랑스러운 업적을 쌓은 성주 출신의 마라토너가 있었으니,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한을 가지고 있던 손기정의 문하생이자 나중에 사위가 된 이창훈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손기정-서윤복-함기용의 뒤를 이어 한국 마라톤의 초창기를 밝게 빛낸 한 사람이었다.

마라토너 이창훈

이창훈은 본관이 경산(京山)으로 일제의 압제가 그 도를 더해가던 1935년 아버지 이학금, 어머니 송화순의 3남 1녀중 차남으로 성주군 선남면 용신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선남 동부초등학교를 마치고 어릴 때부터 장거리에 뛰어난 소질이 인정되어 그 당시 육상으로 전국에서 많이 알려져 있던 대구 영남중학교에 진학하였으며, 처음에는 뛰어난 전적을 나타내지 못했지만 장거리에 대한 두드러진 소질로 장래의 유망주로 지목되었다.

이창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였다. 특히 이창훈은 고등학교 1학년 후기부터는 단연 경북에서 장거리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도내의 모든 경기는 거의 석권하다시피 하고, 전국 대회에서도 중거리 이상의 종목은 모조리 휩쓸어 그의 명성이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베를린올림픽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날린 손기정이 다녔던 양정고등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면서 세계 제패라는 신념을 갖고 당시 감독이었던 손기정선생의 집에서 기숙하면서 지도를 받았으며, 자기 자식보다도 더 아끼는 보살핌을 받기도 하였다.

1955년 6월 11일~12일 이틀간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파견 마라톤 예선전에서는 고등학교의 학생의 몸으로 그 당시 한국 마라톤계의 수많은 선배 선수들 틈에 끼어 42.195㎞(서울운동장~오류동간 왕복)의 마라톤 풀-코스를 주파하여 2시간 48분 57초의 기록으로 당당하게 2위에 입상했다.

민족의 이름으로 달리다

1956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에서 개최된 제16회 올림픽에 한국대표선수로 출전한 그는 2시간 28분 45초의 기록으로 4위에 입상하여 손기정선생의 뒤를 이어 한국 마라톤의 위용을 세계에 과시하고 국위를 선양했다. 특히 올림픽에서 그는 출발 초에는 중위그룹으로 밀려났다가 30㎞ 지점부터 눈부신 역주를 펼쳐 4위로 골인했으며, 그가 제친 선수 중에는 ‘인간 기관차’로 불린 에밀 자토펙(체코)도 있었다.

특히 그는 멜버른올림픽 당시를 회고하면서 “결승점까지 불과 1,000여 미터 밖에 안 남았다. 그러나 마라톤 경기에서 마지막 피치를 올려 사력을 다해 달리는 ‘죽음으로 달리는 길’인 이 코스에서 또다시 결투를 해야 할 숨막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내가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일본 선수만은 이겨야 한다는 민족의식이 앞서 힘 드는 것도 잊고 달렸다. 그러나 일본선수도 최선을 다해 달리고 있어 100여 미터를 앞선다는 것은 40마일을 뛰는 것보다 더 많은 체력이 소멸되는 것 같았다. 드디어 스타디움이 보이는데 일본 선수가 10여 미터 앞에서 뛰고 있다. 교포들의 응원소리 , 한국말로 ‘일본선수를 이겨라! 빨리!’ 하면서 발을 구른다. 도로 앞 편에서 코리아! 코리아! 하는 소리에 용기를 얻어 스타디움 입구 앞에서 앞서기 시작하여 최후의 힘을 다하여 골인을 했다. 일본선수는 14초 뒤에 골인을 했다.”라고 하면서 철저한 민족의식에 바탕한 강인한 정신력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아시아 최고로 우뚝서다

이 때의 그의 우승은 일본에 커다란 충격을 준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재일동포에 커다란 민족적 긍지를 심어준 쾌거라 할 수 있었다. 그는 시상식 후 있은 인터뷰에서 일본선수를 누르고 우승하여 기쁘다고 말하면서 “나는 레이스에 임하면서 한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맬버른올림픽의 4위, 즉 세계 4위의 나는 아시아의 제1인자가 아닌가. 따라서 아시아에선 나를 이길 선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에 우승은 내것이라고 자신하고 시종 여유를 갖고 달렸다”고 말하는 등 일본인들의 기세를 꺾는 대한국민으로써 자부심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어 1959년에는 한국일보와 대한육상경기연맹에서 주최하는 9.28 서울 수복기념 제1회 국제 마라톤 대회(서울~인천간)에 출전하여 2시간24분7초의 한국기록을 수립하며 우승하는 등 1950년대 후반 한국마라톤을 이끈 선두 주자로 활약하였다.

현역에서 은퇴 후

이창훈은 이후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대한육상경기연맹 전무이사, 마라톤 강화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육상 발전에 기여하는 등 체육인으로서 체육발전에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올림픽, 아시안게임 등에 출전했을 때 보여준 일화를 통해 알 수 있듯 훌륭한 마라톤 선수이기에 앞서 철저한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에 바탕한 강인한 정신력을 발휘하여 후세에 모범이 되고 있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9 17:54:44

자료담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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