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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청풍 장기석 선생

선생의 자는 진여(進汝) 호는 자하(紫下), 인동 장씨(仁同張氏) 안세(安世)의 후손, 세헌(世憲)의 아들로 1860년(철종 11년) 11월 22일, 벽진면 봉계동 집실(家谷)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성품이 온후, 정직하고 옳은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의협심이 누구보다도 강하였다. 1884년(고종21년) 10월, 칠곡군 약목면 평북동의 함양 박씨와 결혼하여 가난한 가운데서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1898년(고종 광무 2년), 국운이 날로 기울어져 가는 것을 통탄하여, 무식으로는 큰 일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39세에 늦게나마 학문에 뜻을 두고 벽진면 해평동의 고종(姑從) 수당 여심연(守堂呂心淵) 선생에게 수학하여 43세 때에는 사서 육경(四書六經)을 통달하여 연구심이 깊고 지조가 굳음을 칭찬 받았으며 후세 교육을 위하여 전심하였다.

1910년(순종 융희4년) 한·일합방설이 있자, 그가 가르치던 제자들을 모아 놓고 "독립 국민이 어찌 오랑캐의 백성이 되겠느냐? 제군들은 충의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
라 하며 비분강개하였다.
그 해 8월 합방이 되고 11월 3일, 일본 임금 명치(明治)의 생일을 축하하는 천장절 경축식에 성주읍까지 나와 참석해 달라고 초청장이 성주 군수와 경찰서장 이름으로 전달되었다. 일본을 오랑캐 나라로 여기는 선생이 경축식에 나갈 리가 만무하였다. 며칠 뒤, 이번에는 국경(國慶) 반대자로 호출장을 보내어 성주경찰서에 출두를 명령하였다.
선생은 심부름 온 경찰관을 호통치며 호출장 뒷면에 '내 목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수놈의 부름에 발을 옮길 수 없다. (我頭可斷, 足不可移)' 라 써서 되돌려 보냈다.
이를 본 경찰서장은 대노(大怒)하여 수십 명의 경찰관을 보내어 결박하여 오게 명령하였다. 일경에게 묶이어 가마에 실릴 때 부인 박씨는 선생에게 집안일은 염려 마시고 대의(大義)를 밝히시라고 격려하였다고 전한다.

1910년 12월 7일, 성주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날부터 그들이 주는 음식을 전폐하였으며 심문에 답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이요. 일본 국왕은 우리의 국적이다. 합방하던 날 죽지 않은 것은 동포가 단합하여 너희놈을 격멸하기 위함이다." 라 하여 그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하였다.

1910년 12월 9일, 대구형무소로 이감시켜 갖은 방법으로 꾀고, 달래고 협박하였으나 선생의 마음을 움직이기는 커녕 섬나라 오랑캐의 무도한 침략을 신랄히 비난하니 손톱발톱을 뽑고, 불로 온 몸을 지졌으나 끝까지 항거하였다.

1911년 1월 5일, 식음을 전폐한 지 27일만에 두 눈에 피눈물을 흘리면서 나라 잃은 설움을 안은 채 그 추운 겨울, 얼음장 같은 옥중에서 눈을 감았으니 향년 52세였다. 이튿날 장례차가 대구 시가에 나올 때는 모든 점포가 문을 닫고, 남녀노소가 거리에 나와 통곡하니 그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1911년 3월 8일, 경북도내 유림 만여 명이 모여 장례식을 거행하매 만장(輓章)이 천여 수요, 제문(祭文)이 백여 수였다. 그 후 전국 유림에서 의논하여 선생의 충의와 절개를 기리기 위하여 '백이숙제 백세청풍비(伯夷叔齊白世淸風碑)'를 모방, 높이 13자 너비 5자의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를 선생이 살던 집실 자양산(紫陽山)에 세웠다. 이 비문의 글은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짓고, 글씨는 이동흠(李東欽)이 썼다.

그 이듬해 4월 26일, 성주경찰서로부터 "장 기석은 일생 동안 일본을 반대하였으며 해동청풍비는 조선 민족 사상을 고취하는 것이므로 파괴한다." 라는 전갈이 왔다. 이 소리를 들은 박씨 부인은 태연자약하였으나 동네 사람들은 부인의 거취를 주시하였다. 그것은 선생의 장례날 묘터에서 자결하려던 것을 만류로써 견디어 온 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씨 부인의 마음 속으로는 이미 남편의 뒤를 따르려는 결심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자정, 목욕재계한 부인은 아무도 모르게 부군의 묘앞에서 목매어 자결하였으니 이 또한 얼마나 장하고도 슬픈 일인가! 이튿날 예상대로 무장한 왜경 10여 명은 석공(石工)을 데리고 와서 '해동청풍비'를 부수어 근처 냇가에 버리고 갔다고 한다. 김 구(金九), 김창숙(金昌淑) 선생 등이 '해동청풍비'를 복구할 것을 의논한 끝에 왜경이 부순 비를 찾아 모아 쇳조각으로 이어 세우고 심산 김창숙(心山 金昌淑)이 다시 비문 뒷글을 짓고 백범 김 구(白凡 金九)가 글씨를 썼다. 이어서 도내 유림들이 박씨 부인의 충렬을 기리기 위하여 해동 청풍비 앞에 '박씨 부인 기열비(朴氏夫人紀烈碑)'를 정인보(鄭寅普) 글, 김우진(金禹鎭) 글씨로 세웠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8 11:0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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