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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심학의 대종 한강 정구 선생

선생의 생애

선생은 1543년(중종 38년), 대가면 칠봉동 유촌(柳村)에서 태어나 78세로 1620년(광해군 12년) 팔거현 사양정사(泗陽精舍 : 지금의 대구시 칠곡 사수동[泗水洞])에서 세상을 떠났다.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로 대장군 의(毅)의 후손이며 복재 총(復齋 摠)의 6대손이요, 사중(思中)의 셋째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영채(英彩)가 뛰어났던 선생은 5세 때는 보는 사람마다 그 재주에 탄복하여 신동(神童)이라 했고 7세에 벌써 대학, 논어(大學, 論語)의 뜻을 이해하였으며, 9세에 부친이 별세하자 슬퍼하기 어른과 같았다 한다.
10세에 이미 학문에 뜻을 두어 독서에 열중하였고, 13세에 성주향교에 교수로 와 있던 덕계 오 건(德溪 吳建)에게 주역(周易)을 배우면서 건곤(乾坤) 2괘(掛)를 읽고는 나머지를 모두 미루어 통달했다고 하며, 22세에 과거보러 상경한 적이 있었으나 느낀 바 있어 과장(科場)에 들지 않고 귀향하여 그 길로 과거를 포기하고 오직 학문에만 정진하였다.

1573(선조 6년), 31세 때에 조정에서 예빈시참봉(禮賓寺參奉)으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고 이로부터 7년 동안 건원능참봉(建元陵參奉), 의흥(義興), 삼가(三嘉), 지례(知禮) 등의 현감 발령이 있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고 창평산(蒼坪山) 선영 곁에 집을 지어 한강정사(寒岡精舍)라 이름하고 거기에 거처하면서 제자들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 1580년(선조 13년), 38세에 다시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발령되어 비로소 부임, 1년 반 동안 지방행정에 종사하여 선정으로 생사당(生祠堂)이 세워졌다. 그러나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발령됨을 기회로 벼슬을 버리고 매화 100그루를 심어 백매원(百梅園)이라 불렀다.

작고작은 산앞에 조그만 집을 지어
뜰 가득 매화·국화 해마다 늘어나네
구름과 물을 더하여 그림 같은 자연속
이 세상에 내 생애 가장 사치스럽네
(小小山前小小家 滿園梅菊逐年加 更敎雲水粧如畵 擧世生涯我最奢)

이 시는 선생이 백매원을 두고 읊은 것으로 세속의 부귀영화를 등진 대신, 자연미를 마음껏 누리는 자기의 생활을 세상에서 가장 사치스럽다고 노래한 것이다.
그 뒤 외직으로 동복(同福), 함안(咸安), 통천(通川) 등 고을살이를 거쳐 임진왜란 중에 강릉부사(江陵府使), 강원감사(江原監司), 성천부사(成川府使), 그리고 난(亂) 후에 충주목사(忠州牧使), 안동부사(安東府使) 등을 역임하였고, 내직으로 교정청(校正廳) 교정랑(校正郞), 동부승지(同副承旨), 좌승지(左承旨), 형조참판(刑曹參判) 등을 거쳐 광해군 초에 대사헌(大司憲)으로 특진(特進)되었으나 굳이 사퇴하고 나왔다.
선생의 벼슬살이 경력을 보면 내직은 항상 사퇴를 하였으나 외직에 대해서는 대체로 부임하였다.

특히 임진왜란 중에 외직을 통하여 국사(國事)와 민정에 진력하는 한편, 각 지방의 전몰장병을 매장, 애도하고 나아가 외적을 물리친 최춘명(崔春命), 원충갑(元沖甲) 등 민족의 영웅들을 위해 사당(祠堂)을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도 하여 당시 군민 (軍民)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었다.
그러나, 선생의 만년은 광해군이 형제(임해군과 영창대군)를 죽이고 모후(母后)를 폐하는 등 소동을 당하여 여러 번 상소를 올렸으나 이루지 못했고 북인정권(北人政權)의 횡포(橫暴) 밑에 여러 차례 중상과 모함을 입기도 하여 그의 은퇴지였던 무흘(武屹 : 금릉군 증산면)에서 다시 노곡(盧谷)으로, 또 다시 사양정사(泗陽精舍)로 이주하여 78세를 일기를 선생의 숭고한 일생을 마쳤다.

선생의 학통(學統)

선생이 우리 나라의 대현(大賢)으로 500년 유학사(儒學史)에 뚜렷한 존재가 된 것은 남다른 천품으로 일찍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했던 때문이겠지만 당시 영남 상하도에 자리잡고 있었던 퇴계(退溪), 남명(南冥) 두 스승을 찾아 배움을 청했던 것이 중요한 계기였다고 본다. 즉 21세 때에 퇴계에게, 그리고 3년 뒤인 24세 때, 남명 조식(南冥曺植)에게 제자의 예를 닦게 된 것이 선생의 일생에 있어서 학문적 정신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퇴계에 의하여 영남 상도(上道)는 인(仁)을 위주하고 남명에 의하여 영남 하도(下道)는 의(義)를 위주했는데 퇴계의 유화(儒化)를 바다의 넓음에 비한다면, 남명의 기절(氣節)은 산의 높음에 견줄 만한 것이며 이에 이르러 우리 나라 유교적 문화는 그 정점(頂點)에 도달했었던 것이다. a이와 같은 영남 상하도의 학문을 도산(陶山 : 퇴계) 덕천(德川 : 남명) 두 사문(師門)으로부터 흡수(吸收), 소화하여 자기를 대성(大成)시킨 분이 바로 한강 선생이었다.

원래 선생은 천성이 호매하여 체질적으로 남명과 닮았고, 남명이 갈고 닦은 명행(名行)과 출처의리(出處義理)를 본받았지만 선생의 학문태도에 있어서는 퇴계를 따랐던 것 같다. 말하자면 남명적 체질 위에 퇴계적 함양(涵養)을 더했던 것이다. 선생이 훗날 마침내 퇴계학의 탁월한 계승자(繼承者)로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선생은 전국에 걸쳐 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특히 당시의 영남 인사들의 대부분이 그의 문도들이었거니와 한편 근기(近畿) 출신의 미수 허 목이 따로 선생의 학문 정수(精髓)를 물려받아 훗날, 근기학통(近畿學統)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을 연원(淵源)으로 한 근기학통의 계보(系譜)는 곧 조선후기(朝鮮後期)의 실학사상(實學思想)의 주류(主流)를 이루는 경세치용파(經世致用派)로 이어졌다.

선생의 저술(著述)

  • 성리학 : 개정주자서절요총목(改定朱字書節要總目), 중화집설(中和集說), 성현풍절(聖賢風節), 심경발휘(心經發揮), 수사언인록(洙泗言仁錄), 곡산동암지(谷山洞庵志), 염락갱장록(濂洛羹墻錄)
  • 예학 : 가례집람보주(家禮輯覽補註), 오선생예설분류(五先生禮說分類), 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 오복연혁도(五服沿革圖)
  • 역사·전기 : 역대기년(歷代紀年), 고금충모(古今忠謨), 경현속록(景賢續錄), 와룡암지(臥龍岩志), 무이지(武夷志), 고금치란제요(古今治亂提要), 유선현록(儒先賢錄), 일두실기, 고금명환록(古今名宦錄)
  • 지지 : 창산지(昌山志), 동복지(同福志), 함주지(咸州志), 통천지(通川志), 임영지 (臨瀛志), 관동지(關東志), 충주지(忠州志 : 미완성), 복주지(福州志)
  • 의학 : 의안집방(醫眼集方), 광사속집(廣嗣續集)
  • 문학 : 고금문수(古今文粹), 낙천한적(樂天閒適), 주자시분류(朱子詩分類)

선생의 학문의 굉박성(宏博性)과 응용구시적경향(應用救時的傾向)은 뒤에 미수를 통하여 근기학통(近畿學統)의 학자들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었고 성호 이익(星湖 李瀷), 순암안 정복(順菴 安鼎福),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등에 의한 저술·편찬(編纂)의 바람의 고조(高潮)와 경세치용적이론(經世致用的理論)과 사상(思想)의 심화(深化), 확대(擴大)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유감된 일은 선생의 그 방대한 저술·편찬물들이 지금 거의 얻어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진왜란에 선생은 통천군수로 있었고 고향에 두었던 많은 장서(藏書)와 각종 원고(原稿)가 성주 인사들의 노력으로 해인사(海印寺)에 옮겨져서 난리를 피해 잘 보존하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1614년(광해군 6년), 선생이 노곡(盧谷)으로 피신하여 살 때에 큰 화재를 입어 모든 책들이 하루 저녁에 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 선생은 "하늘은 나를 장례하는도다."하고 통탄했지만 이미 72세의 노경에 이른 선생의 근력으로 그 전부를 다시 편찬할 수 없었고 오직 몇몇 종류만 다시 집필하여 복원(復元)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후(死後)의 일들

1620년(광해군 12년) 1월, 선생이 돌아가자 문목(文穆)의 시호(諡號)를 내리고 인조반정 후에 이조판서, 효종 때 영의정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사림(士林)들이 선생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를 청하는 글에 선생을 한훤당 김 굉필(寒暄堂 金宏弼), 일두 정여창,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퇴계 이황(退溪 李滉)에 이어 교남(嶠南 : 영남) 오현(五賢)으로 꼽았으며, 숙종보감(肅宗寶鑑)에 '중국 사신이 와서 동방심학(東方心學)의 종(宗)이 누구냐고 묻거든 정 한강의 심경발휘(心經發揮)가 동방심학의 종이라 답하자고 조정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는 기록은 선생의 학문에 대한 그 시대의 존경을 단적으로 나타내 준다.

1672년(인조 5년), 회연서원(檜淵書院)을 초당자리에 세워 선생의 위판(位板)을 봉안(奉安)했으며, 1690년(숙종 16년)에 사액(賜額)되었는데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양현청(養賢廳) 등 건물의 현판은 한석봉(韓石峰)의 글씨이며, 역학(易學)을 새긴 각판(刻版)이 서원에 보관되어 있다.서원 앞 백매원뜰에는 신도비가 서 있으며 처음 수륜면 수성동 창평산에 장사지냈으나 1663년(현종 4년), 무덤을 성주읍 금산동 인현산(印懸山)으로 이장했다. 그밖에 선생을 향사한 서원은 성주의 천곡(川谷), 창녕의 관산(冠山), 현풍의 도동(道東), 대구의 연경(硏經), 창원의 회원(檜原), 안동의 도연(道淵), 언양의 반구(槃龜), 칠곡의 사양(泗陽), 함안의 도림(道林), 성천의 학령(鶴翎), 동복의 도원(道源), 목천의 도동(道東), 충주의 운곡(雲谷), 옥천의 삼양(三陽), 통천의 경덕(景德)서원 등이다.

무흘구곡(武屹九曲)

주자(주자 : 이름은 희{熹})의 한천(寒泉)을 본따서 선생은 호를 한강(寒岡)이라 했고, 또 주자가 학문을 닦고 시를 읊은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받아 대가천(大伽川)의 절경 아홉 군대를 노래로 읊었으니, 이것이 한강의 무흘구곡(武屹九曲)으로 1곡(曲)은 수륜면 신정리 양정의 봉비암(鳳飛岩), 2곡(曲)은 수륜면 수성리 갓말의 한강대(寒岡臺), 3곡(曲)은 금수면 무학리의 배바위(船岩 : 무학정([舞鶴亭]), 4곡(曲)은 금수변 영천리의 선바위(立岩 : 소학봉), 5곡(曲)은 금수면 영천리은지골의 사인암(捨印岩), 6곡(曲)은 금릉군 증산면 유성리의 옥류동(玉流洞), 7曲(곡)은 증산면 평촌리의 만월담(滿月潭), 8곡(曲)은 증산면 평촌리의 와룡암(臥龍岩), 9곡(曲)은 증산면 수도리의 용소(龍湫 : 완폭정[阮瀑亭])이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9 17:5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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