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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군수 정시 선생의 순국

선생은 청주 정씨(淸州鄭氏)로 자는 덕원(德圓), 호는 백우(伯友)이며, 처사(處士) 노(魯)의 아들로 한강(寒岡)의 8대손이다. 1768년(영조 44년), 수륜면 수성동 갓말에서 태어나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홍경래의 난(洪景來亂)에 순국(殉國)했다.

1799년(정조 24년), 무과에 급제하고 그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가 훈련원 주부(主簿), 도총부경력(都 府經歷) 등을 역임하고 1811년(순조 11년) 가산군수로 임명되었다. 이 해 겨울에 홍경래가 광부들을 모아 난을 일으키니, 가산이 온통 적의 소굴이 되었다. 비단 그의 도당들 뿐 아니라 관청의 군교사령(軍校使令)들까지도 적에 가담한 자가 많았다. 홍경래의 도당은 밤에 관청으로 몰려 와서 군수가 잠자는 방으로 들어와 칼을 들이대며 관인(官印)을 내놓으라고 협박하였다. 선생은 무릎에 칼을 맞고도 관인을 오른손에 쥐고 완강히 거절하니, 적은 칼로 그의 오른팔을 쳤다. 팔이 떨어지자 선생은 왼손으로 관인을 집어서

"내 머리는 너희들에게 줄지언정 관인은 줄 수 없다."

하고, 다시 거절하니 적은 칼을 휘둘러 난도질을 하여 죽게 하였다.

이 날은 그해 12월 18일이었다. 이 때는 선생의 아버지도 함께 관청 안에 있었는데 적이 선생을 죽인 후에 그의 아버지도 끌어내어 항복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그의 아버지는 끝내 굴하지 않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은 그의 인품이 청렴결백한 사람으로서 관직에 있을 때에도 검소한 생활을 하여 왔다. 한번은 휴가를 얻어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내려오게 되었는데, 그의 부인은 나들이 옷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다.

"사내 대장부인 당신이 비록 가난하기로서니 안사람의 몸을 가릴 변변한 옷 한벌을 장만하지 못한다고 해서야 말이 되겠소?"

부인의 말을 들은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과연 부인의 말이 옳소, 그러나 내 여러 제수(弟嫂)들도 모두 옷이 없으니, 어찌 오직 내 아내의 옷만을 장만하리오."

하니, 이 말을 들은 부인은 다시 내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가산에는 연홍(蓮紅)이란 기생이 있었다. 연홍은 적들이 관청을 습격하는 밤에 선생의 아우 질이 칼에 상처를 입은 것을 자기 집으로 부축해 가서 숨겨 두고 간호를 하여 살아나게 하니, 사람들은 연홍을 의기(義妓)라고 일컬었다.

또 선생은 말을 잘 탔다. 관청에는 그가 특히 좋아하던 말이 한 필 있었는데, 적들은 그 말을 끌러 가지고 가서 홍경래의 부하 장수에게 바쳤다. 부하 장수는 이 말을 타고 관군을 대항해 싸우는데 한창 싸우는 도중에 말은 소리를 높여 울면서 위에 탄 적장의 머리를 베이게 되었으니 이 또한 의마(義馬)라고 하였다.

선생이 순직한 지 28일만에 안주에서 염을 하였는데, 얼굴이 살았을 때와 같았으며, 고향인 성주로 운구하게 되자 관(棺)이 지나가자 연도(沿道)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관을 영송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자를 공면(公勉), 호를 창파(蒼坡)라고 하였다. 독서하기를 좋아했으며 젊은 시절에 진주로 유람을 갔다가 의기 논개(義妓論介)의 사당에 가서 엎드려 절을 하였다. 동행한 친구들이 깜짝놀라며

"양반이 한갓 기생의 사당에 절을 하느냐?"

하고 , 책망하니 그의 그 친구에게 정색하고 말하였다.

"나는 기생에게 절을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충절에게 절을 한 것이네."

관청에 홍경래 도당이 습격해 오던 밤에 두 아들이 순직을 각오하고 그 뜻을 아버지에게 알리니 그는 얼굴에 위엄을 갖추고 두 아들에게

"나라에 난이 일어났을 때에 나라를 위해서 죽는 것은 백성의 본분이다. 너희는 이 늙은 아비를 염려하지 말고 오직 본분을 위해서 심신을 다 바쳐라."

하고 말하였다.

선생의 아우인 질은 적들이 칼을 달고 달려들자 아버지 대신 나를 죽여라하고 몸으로 막다가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었는데, 이 때에 기생 연홍(蓮紅)이 통인(通引) 한 사람과 더불어 방에 들어가 보니, 선생과 그의 아버지, 그리고, 아우인 질, 3부자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어졌는데 오로지 질만이 아직 맥박이 뛰고 있으므로 그를 업고 집에 와 간호하여 소생시켰다. 그 후 조정에서는 그를 참봉으로 임명하였으나 상처가 다 낫지 않아 얼마 안가서 죽으니, 사람들은 '팔창참봉(八創參奉)' 이라고 하였다. 팔창은 칼에 맞은 상처가 여덟 군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순조임금은 이들 부자가 순직했다는 보고를 받자, 매우 애석히 여겨 관(棺)을 하사하고 아버지 정 노(鄭魯) 선생에게는 집의 (執義) 벼슬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이조참판을 증직, 1859년(철종 10년)에 다시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충경(忠景)이라 시호하였다. 아들 정 시(鄭蓍) 선생에게는 병조참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부총관(五衛都摠府副摠管)을 증직하였다가 뒤에 다시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충렬(忠烈)이라 시호하였으며, 정주성 남쪽에 그의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업데이트 날짜 : 2017-12-18 13:3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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