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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리는 성주읍은 물론 성주군 전체의 생활중심지로서 印懸山에서 구불구불 용트림해 내린 邑基의 主脈이 마을뒤에서 標高 약80m의 鳳頭山의 丘陵으로 맺혔고 伊川이 東流하면서 曲流해 景觀이 秀麗한 리이다.

이 지역은 高麗 建國初期 부터 京山府의 邑基로 발전해서 이곳에 禮山里, 三山里등 읍내 10個里가 당시부터 各坊에 준한 內坊인 4개리로 편제되어 龍山里(坊)에 속하였으며, 1914년 行政區劃改編때 京山洞이 되어 현재 8개 行政里로 구분한다.

  • 사골[史洞]
    • 경산1리로서 天主敎會 뒷산쪽을 鳳頭山이라고 하여 古來로 邑의 地脈이 결집된 名穴로 여겨 이곳을 神聖示 하여 1900년초까지 千年栢林이 숲을 이루었고 人畜의 접근을 엄하게 막았다. 삿꼴(사골)은 위의 사동을 뜻하는데, 이 명칭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두가지의 견해가 전해진다. 첫째는 중국의 고대문화로 부터 동양에서 행해진 전통으로 왕이 나라를 얻으면 중앙과 각읍에 국토(사)와 오곡(직)의 신단을 만들어 사직신에게 제사를 춘추로 올렸고 그 업무를 맡은 사직서를 이곳에 두었으므로 사동(사골)이라 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1408년(조선 태조 16년) 4대史庫의 하나인 星州史庫가 설치되었던 곳이라 하여(임란 후 태백산사고로 옮김) 이곳을 사동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 볼 대흥리의 社洞마을 유래에서 언급되겠지만 實錄閣과 관련된 후자의 견해가 보다 타당하게 여겨진다.
  • 과아태·고아터·구아터·구아(舊衙)·고아(古衙)
    • 경산2리로서 현 군청에서 벽진면으로 향한 방향에 위치해 있다. 옛날부터 관아가 있던 곳이라 하여 관아터가 과아태로 칭해졌으며, 古衙나 舊衙라는 명칭 역시 이와 관련하여 생겨났다.
  • 사창앞[司倉前]·창동(倉洞)
    • 경산3리로서 지금의 군청에서 서문고개로 나가는 국도주변이다. 과거 경산부 관내의 양곡을 보관하는 사창(창고)의 업무를 맡은 司倉署가 있었고 그 앞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사창앞이라 했다. 이 사창은 원래 고려개국공신인 星山人(始祖) 李能一의 집터였는데, 이것이 고려조의 어느시기엔가 사찰로 변모하였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이곳에 다시 사창이 설치되었다.
  • 서문밖·성밖·서문동(西門洞)·서문외(西門外)
    • 경산4리로서 외적을 막기 위해 축조된 성주읍성에는 남서쪽으로 향하는 문이 있었으며 이를 西門이라 하였는데, 마을이 이 서문의 바깥쪽에 위치해있다 하여 서문밖이라 하였다.
  • 서배내리·작은배리[小裵里]
    • 경산5리로서 고려때는 東也里라 하였는데, ’裵里’라는 지명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조선개국공신이었던 裵克廉이 거주하며 부근에다 나무를 심고 관개시설을 하여 민생복리를 도모함으로써 백성들이 그 덕망을 기려 그의 姓을 따서 마을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큰배리에 비해서 인구수가 적다하여 작은배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 큰배리·대배리(大裵里)·동배리(東裵里)
    • 경산6리로서 마을의 형성유래는 작은배리와 같다. 작은배리에 비해서 인구가 많다하여 큰배리라 부르며 또한 작은배리의 동쪽편에 위치해 있다하여 동배리라고도 한다.
  • 저자리·장터·저자골·시장기(市場基)
    • 신라말부터 성주邑基가 터잡히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는데, 현재 경산7리인 이 마을이 바로 성주지역 상권의 중심이었으며 고려초 경산부로 승격한 이후 시장의 규모 또한 더욱 확대되어 영남일원의 중요한 상업중심지가 되었다. 시장의 들머리에는 ’돌다리길’(거리)이 있는데 이는 1921년 李恒柱가 재산을 내어 전에 있던 나무다리를 헐고 석재로 다리를 설치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 종로(鍾路)
    • 경산8리로서 과거 에 이곳에 鍾과 鍾樓가 설치되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장터에서 官衙(東軒)를 향해 넓게 트인 길에 위치해 있었다.

성주읍 중심에서 서편으로 33번 국도를따라 약 2km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류하는 伊川과 칠봉산에서 흐르는 沙川이 합류하는 갯마을이다.

통일신라이래 성주읍(경산부·성주목)의 각지에 있었던 방에 준하는 마을로서 백전리 및 대가면에 속해있는 용흥리와 더불어 本牙里에 속하였고, 914년 행정구역개편 읍내의 4개리(용산·본아·남산·북산)를 통합할 때 성주읍에 속하였다.

  • 개바대[浦坪]·가평(可坪)·개화대(開花臺)·구촌(龜村)·사동(社洞)
    • 성주읍 중심에서 서쪽으로 2km쯤 국도를 가까이해 칠봉산에서 흐르는 沙川을 앞으로 두르고 東南向한 마을이다. 마을의 이름이 ’개바대’라고 불리게 된 것은 이 곳이 伊川과 沙川이 합류하는 곳으로 들[坪]과 갯가[浦]가 합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또한 1920년경에는 마을 앞의 숲이 울창하고 꽃이 만발한 곳이라 하여 개화대라 불리기도 했으며, 마을의 뒷산에 사직단이 설치되었던 관계로 社洞이라고도 한다. {星州의 脈}에는 京山里의 사동(史洞)과 마을이름의 유래가 구분됨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社稷壇의 行禮를 맡은 별도의 행정기관은 社稷署라 하여 당시 治所 부근인 지금의 경찰서 뒤쪽 성주천주교 옆터에 있었는데 이 사직서는 고려초기부터 이곳에 있었다. 여기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골"의 마을 이름이 "史洞"으로 잘못 이해하는데 "사골"은 분명 "社洞"이다. 그 근거로 군청 뒤쪽 星州裵氏의 世宗朝 이전의 裵晋孫 裵閑 裵閏 시대때부터도 옛 譜冊에 社洞派로 되어 있으니 "社"와 "史"를 구분못했다고 볼 수는 없고 사골[社洞]은 社稷署에서 연원된 것이며 {京山志}를 비롯 鄕誌에 實錄閣마을(洞)을 表音化하여 "沙禮洞", "乍禮洞", "새록골" 등으로 하여 "史錄골"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삿골"은 사직서가 있는 마을이고 "새록골"은 史錄閣이 있었던 마을이며, "여동"은  壇이 있었던 마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미이미·하산(荷山)·하아(荷牙)
    • 개바대의 북쪽편에 동향하여 있는 마을이다. ’미이미’라는 마을이름은 그 유래가 확실치 않으나 순우리말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하아’라는 마을이름이 전해지게 된데는 두가지 견해가 전해지는데, 그 첫째는 조선 영조때 백성들의 부역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데서 荷山 또는 荷牙라고 했다는 것이며, 또 한 견해는 權近의 손자이자 太宗의 외손인 權聰과 관련한 설화이다.
      즉, 권총이 어릴때 부모가 모두 별세하였는데, 외조부인 태종이 총의 양육을 염려하여 人性이 醇厚한 京山府안의 명문집안 과부 8명을 궁중에 불러올려, 어린 권총을 둘러앉아 손짓하여 부르게 하니 권총이 判軍器監事를 역임한 崔壹의 아내였던 宋氏의 무릎에 올라 안겼다. 이러한 연유로 권총은 노년에 養母의 고향인 성주에 내려와 이 마을의 뒤쪽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마을 앞의 이천과 산수의 경관이 마음에 들어 늘 ’하아!’ ’하아!’하고 좋아하였으며, 그후 주변인들이 荷牙를 권총의 별호로 삼고 그것이 마을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선조때 金寧人 金壽는 충청남도 玉洞에서 입향해 名門의 代를 누렸으며, 그의 8세손인 金性彦은 학덕이 깊어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으며, 문객들의 출입이 잦았다. 그의 一門이며 제자인 金在植 또한 시문으로서 명성이 높았다.
  • 관동(管洞)·대끝·댓골[竹谷]
    • 개바대마을 끝부분의 낮은 구릉지대에 위치해 있다. 마을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두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전한다. 첫째는 이 마을에는 옛부터 동네어귀와 동네의 울타리가 대나무로 둘러쌓여 있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며, 또 한 견해는 마을이름은 ’대끝’으로 이는 마을 뒤산의 사직단에 臺가 있었고 그 ’臺’의 끝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으며, 竹谷으로 표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견해이다.

가야산 산맥이 修道山과 厭俗山을 돌아 狐嶺고개를 지나면서 관봉에서 일곱봉우리를 이루어 七峯山을 이루고그북으로 대가면과 경계하며 성주읍으로부터 서남쪽으로4km거리에 자리한 마을이다.

’大皇’이라는 마을이름은 마을 뒤산에 大皇堂이 있었기 때문인데, 대황당은 원시시대부터 할미신[老姑神]을 토속신으로 하여 제사를 드리던 민간신앙의 유제로서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각 지방의 군현단위마다 神堂이 설치되었다.

  • 칠산(漆山·七山)
    • 마을 뒤산의 봉우리가 7개로 형성되어 있어 ’七山’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으며, {京山志}에는 ’漆山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뒤산에 옻나무가 많이 자생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 구등골[九等谷]·굳은골·견동(堅洞)
    • 칠산의 동쪽 1km거리에 나란히 있는 마을로서 고려초 京山府가 설치되어 현재의 성주읍내로 관아가 옮겨지기 전에 本彼縣의 縣治가 있었던 곳이다. 마을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속전에 전하기로는 고을의 원이 너무 엄하여 마을 사람들이 좀처럼 말을 할 수가 없어 입이 굳은 때문이라고도 하며, 또한 한때 이 지역에 벙어리들이 많이 출생했다고 하여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 소샘골
  • 동만(同滿)
    • 본래 이곳에는 큰 못이 있었는데, 여름철에 심한 가뭄이 있어도 못의 물이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경과하면서 이 못이 점차 메워지고 결국 그 못터에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경산지}에 못의 이름이 同滿池라고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것이 마을이름의 유래가 된것으로 여겨진다.

성주읍의 중심에서 정동과 정남의 방향사이의 伊川건너 성산(389m)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앞은 성주읍을 관류하는 이천이 曲江이 되어 동류하고 넓은들이 관망되는 곳을 골라 앉았고 도심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있어 편리한 교통과 함께 취락환경이 조화로운 곳이다.

기원전 2∼3세기경부터 가야의 성읍국가로 이루어져 기원초 성산가야국으로 발전했던 고대문화의 본거지였으며, 신라말부터는 경산부의 남산리에 속하여 1885년(고종32년) 성주읍내의 4개리와 함께 남산리(방)에서 남산면이 되었다가 1814년 성주면으로 되고 1979년 성주읍이 되었다.

  • 차동골[車洞·茶洞]
    • 성주읍 남쪽 약 3km 거리의 용암면으로 넘어가는 굴티[屈峴]고개 못미쳐 지방도로 아래 산골을 트고앉은 마을로서 마을 남쪽 표고 200m의 굴티고개는 옛날 차도가 군내에 없었던 시기에 용암의 豆衣谷과 고령, 그리고 수륜남쪽으로 드나드는 읍의 관문이다.
      마을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임진왜란때 의병들의 전승지로서 수레가 많이 집결하였다는데서 유래하였다는 설과 용암면의 中巨洞쪽에서 목재와 숯을 실은 수레가 이 마을을 거쳐 성주읍내로 들어왔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 쇠비실·시비실[守備谷·所非谷·牛洞·牛碑谷], 복성동(福星洞)
    • 차동골마을 계곡아래 동쪽으로 상하롤 갈려있는 마을이다. 마을 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임진왜란때 관군의 수비대가 이곳에 설치되어 星山城을 지키면서 왜병을 무찌르고 수비한 곳이라 하여 守備谷이 음변하여 시비실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며, 둘째는 옛날 마을이 이루어질때 이마을 나무꾼이 백덕산에 소를 몰고 나무하러 갔다가 범을 만나게 되었는데, 소가 범에게 대항하여 나무꾼을 구하고는 범과 함께 죽어 마을사람이 소의 용기를 가상히 여기고 소의 공을 사람들도 생각해보자는 뜻으로 나무로 비를 세웠으며, 소비골 이라는 것이 마을의 옛이름으로서 현재의 마을이름도 여기서 연유하였다는 것이다.
  • 살망태·산막(山幕)·막골[幕洞]
    • 성주읍에서 동쪽으로 2km 떨어진 별티(星峴)고개 아래서 선남면 장학리로 나가는 길목마을이다.
      마을 동쪽에 있는 표고 389m의 성산(별뫼)은 성읍국가시대로부터 벽진가야의 동맹부족이 이곳을 의지해 생활했다. 많은 고분군은 당시 가야성읍의 번성함을 보여주고 있으며, 산위의 봉수대는 통일신라이래 한말까지 통신수단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마을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과거 이곳에 幕을 치고 주거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자세하지 않다. 이 산막마을은 羅衡의 아들 羅弘緖가 1435년(세종 17년) 문과에 등과하여 전라관찰사를 지내고 이곳에서 노년을 보낸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1948년에 세워진 천주교회가 있다.
  • 별터·빌티[星峴]
    • 성주읍과 용암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마을로 고령으로 가는 교통요지에 위치해 있다. 옛날 별이 떨어진 고개라는 데서 마을이름이 유래하였다.
  • 새뜸·새터·신기(新基)
    • 1920년(庚申年)의 대홍수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기 위하여 제방을 새로 축조하였는데, 이 곳은 성주시장이 300m 정도의 근거리에 있는 등 생활하기에 편리하여 예산리과 삼산리 등의 주민들이 저수지를 파고 이주하여 새로운 마을을 이룬 곳이다. 지금은 성주읍 신주택지로 알려져 있다.
  • 시어리[洗禮里]·승왜리(勝倭里)
    • 살망태에서 읍쪽으로 조금 내려앉은 변두리 마을이다. 마을이름의 유래와 관련해서는 두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임진왜란때 왜병과 싸웠던 격전지로서 왜장 구로다[黑田長政]의 군사 2,600여명을 섬멸한 승전지로 왜병을 무찔러 승리한 마을이라 하여 勝倭里라 하였으며, 음변하여 시어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곳에 京山府가 설치되어 있었을 시기에 官吏와 名士들이 이 마을에 건너와서 읍내를 바라보며 머리를 식히고 마음을 편히했다는 뜻에서 洗禮里라 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시어리는 안뜸과 웃뜸 그리고 바깥뜸으로 나누는데 이는 옛날 음력 정월 대보름에 마을을 두 편으로 나누어 줄다리기를 할때, 시어리의 안쪽 편을 안뜸마을이라 하고 그 위쪽에 위치한 마을을 웃뜸이라 하였다. 바깥뜸은 시어리의 안뜸과 웃뜸의 줄다리기 편이 결정되고 난 다음에 생긴 마을로서 안뜸과 웃뜸의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마을은 안뜸과 웃뜸의 줄다리기에 승패를 판정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한다.
  • 두덤골·두덤이골
    • 星山을 바라보는 양지바른 언덕배기에 맑은 물이 넘치는 웅덩이가 두 곳에 있어 두 웅덩이가 있는 마을이란 의미에서 두덤골로 불려졌으며, 현재도 수질이 맑고 깨끗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한때 성주에서 고령으로 가는 교통로의 구실을 하였다.
  • 개무산·개모산[浦池山]·덕성동(德星洞)
    • 함바우 못미처 성주읍과 들과 이천이 내려다 보는 앞이 창활한 마을이다. 냇가[浦]와 못[池]과 산(山)이 어울린다해서 개모산이라 했다고도 하며, 또한 마을 뒤에 있는 산이 개와 비슷하다고 하여 개산이라 하고 마을이름도 개무산으로 불렀다고도 한다. 현재는 덕성리로도 부르고 있는데, 이는 이 마을 주민들의 도덕심이 강한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 장자골[長者谷]
    • 남으로 성산을 등지고 산자락이 감싸서 정경이 안온한 마을이다. 마을이름은 고려시대에 趙氏 姓을 가진 安察使가 星山아래 살았는데, 그가 굉장한 부자였기에 長子라 불렸으며 이것이 마을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 함바우[函岩]·한바우[大岩]
    • 성주에서 대구로 나가는 30번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서 마을 뒷산에 함지같이 생긴 넓고 큰 바위가 있어 마을이름을 함바우 또는 한바우라 했다. 마을에 있는 함바우못은 東亭池라고도 하는데 1589년(선조 22년) 牧使 趙瑗이 둘레를 약 300m 정도로 넓혀 뱃놀이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성주읍을 감돌아 동류하는 이천의 곡강을 사이로 읍내에서 왜관과 선남방향의 양갈래의 국도를 접해있는 기름진 들녘부분에 위치해 있다.

고려초기에는 경산부의 용산리에 속했고 1914년 3월 행정구역 통폐합때 읍내의 용산, 본아, 남산, 북산리와 함께 성주면으로 되었다가 1979년 5월 읍으로 승격되고 1988년 1월 동을 리로 명칭 변경했다.

  • 댕끝·덤끝[大王걸]
    • 서쪽으로 성주읍의 都心을 약 2km의 거리로 두고 넓은 들과 伊川을 사이하여 星州-大邱간 30번國道의 執牛峴(지부티)의 덤아래 西向해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 大王寺가 있었고 그 大王寺로 통하는 길거리 마을이라 하여 大王거리라 한 것이 후에 댕끝으로 변화된 마을 이름이다.
  • 모산·지내(池內)·지산(池山)·수사(洙泗)·삼산(三山)
    • 삼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성주-왜관국도의 약 2km 지역 표고 100여m의 뒷산을 등지고 남향한 조용한 마을이다. 처음에는 洙泗池라 하다가 해방이후 삼산이라 하였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 곳은 게터로 못이 있어야 마을이 흥하고 지탱된다고 하며, 못을 파는 문제로 마을사람들 간에 분쟁이 있기도 하였다. 1882년(고종 19년) 임오군란때 朴彭年의 후손 晩休 朴宗鉉이 亂軍을 물리친 공을 세우고 고종으로부터 병조참의의 관직 및 서책과 조복을 하사받아 노년을 수사학을 탁마한 곳이다. 그후 향촌의 사림들이 그를 위해 洙泗亭을 지어 그의 덕성을 기리고 있다.
  • 갈막[加乙幕·蘆村·蘆幕]·각막(角幕)
    • 성주읍을 감돌아 나가는 이천의 東流가 水口가 되어 물꼬리를 감추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옛날에는 관민이 쓰는 육류를 조달키 위해 읍에서 떨어진 하천의 하류에서 가축을 도살하였는데, 소잡는 賤役을 담당하는 사람.들을[白丁] 이곳에 정착시켰으며, 또한 이 고장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봉우리가 끝나는 길목에 갈대로 엮은 움막을 짓고 살도록 한 탓에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 뒤 조금 떨어진 산아래 양지바른 곳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 鷹鳳山
    • 모산 뒷산을 매봉산이라고 하며, 伊川의 曲水가 邑基를 거쳐 水口가 되고 白川과 합류하는 곳의 산봉우리가 셋이 있는 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주의 풍속조에는 ’俗尙華麗好鷹犬’ 즉, ’화려한 것이 유행하고 사냥 매와 개를 좋아한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예로부터 이 매봉산에는 매를 길러 매사냥을 즐긴 이야기가 전해진다.
  • 지부티재[執牛峴]
    • 함바우에서 대구와 선남으로 나가는 댕끝 남쪽에 있는 고개이며, 과거에 伏虎山이라고도 했다. 고개 북쪽의 執牛山(185m)은 성주읍기가 臥牛形이라 소고삐를 메어둔다는 뜻으로 지부티라 한다.

성주읍의 동북면에서 白川사이로 月恒面과 접경한 江村으로, 통일신라이래 지금의 月恒面 甫岩과 함께 唐沼坊이었고 1914년 성주면에 편입되었다. 자연촌으로는 답계, 말뱅이, 새정지 등이 있다.

  • 댁기·답계(踏溪)
    • 大也峴(대야티) 동편의 山峰(약165m)을 마을의 뒷산으로 하고 그 동남의 산기슭에 白川과 月恒벌판을 건너보며 자리한 마을로서 {新增東國輿地勝覽}의 星州牧 驛院條에 ’踏溪驛 ; 在州北十里’라고 표현한 바와 같이 이곳은 옛날 성주에서 서울로 나드는 官吏들의 驛馬를 관리하고 말을 제공해주는 驛이 있었다.

      京山府道에 속하는 성주지역의 驛은 답계역외에도 용암면 상언리의 安堰驛이 있었다. 답계마을의 지리적 중요성과 답계역의 기능을 살펴보기 위하여 지루하지만 역원제의 전반에 대해 정리해 둔다. 역원(참)제는 공문의 전달, 관물의 운송, 공무를 띤 출장관리의 왕래·숙박 등에 편의를 주기 위하여 설치한 국가의 관용기관으로서 전국적인 육상운수체계를 형성한 교통망이었다. 이외에도 역참은 군대의 수송, 군수물자의 운반 등 군사적 목적과 아울러 앞서 언급한 貢物의 수송과 같은 경제적 목적에도 긴요하게 이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역제의 정비는 고려초기부터 시작되었으며, 성종대에 이르러서는 22驛道 525驛이라는 방대한 驛조직이 완성되기에 이르렀다. 역의 조직을 간단히 살펴 보면, 각 역에는 驛長, 驛吏, 驛卒, 驛丁을 두어 驛路를 정비케 하고 驛馬를 갖추어 出張官吏로 하여금 이용케 하고 驛田과 公須田, 紙田, 長田 등을 두어 그 조세로서 경비에 충당케 하였다. 또 역에 소속된 驛丁의 家戶를 [驛戶]라 하여 역의 모든 勞役을 부담케 하였는데, 역의 업무량에 따라 역의 등급(6등급)을 정하고, 그 등급에 따라 驛丁의 배치가 달랐다. 즉, 업무가 가장 많고 번잡한 역은 1등급(1科)으로 하여 70丁을 배치하고, 다음 2등급(2科) 역에는 60丁, 이러한 순서로 최하위인 6등급(6科)역에는 7丁을 배치하였다.

      그런데 驛丁의 노동력으로써 역의 운영이 어려울 경우에는 각 驛村에 있는 白丁의 자손이 보충되기도 하였다. 역의 전달방식은 驛丁에 의하여 역에서 역으로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서울에 있는 각 관청에서 지방에 공문을 발송할 때는 먼저 尙書省에 보고하여 발송의 허가를 받은 후 곧 근교인 靑郊驛의 館驛使(巡官)에게로 보내어 전송하도록 하였다. 만약 이러한 절차를 밟지 아니한 경우에는 관역사가 그 공문을 빼앗아 자세한 사유와 함께 상서성으로 돌려 보냈으며, 상서성에서는 그 위법자를 처벌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절차에 의해서 청교역으로 보내진 공문을 각 역에서 해당지방에 전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달방식에 있어서 긴급을 요하는 경우는 懸鈴式의 전달방식을 택하였다. 현령식의 전달이란 서류를 넣은 가죽자루에 방울을 달고 전달하는 방식으로, 3急(特急)時에는 3현령, 2急(中急)時에는 2현령, 1急(보통)時에는 1현령을 달아 완급에 따라 행하였다.

      또한 일의 완급에 따라 하루에 주행하는 거리가 달랐다. 즉 그 주행거리가 2월부터 7월까지는 하루에 3급이 6역, 2급이 5역, 1급이 4역이 여정이었고, 8월부터 다음해 정월까지는 주행거리가 1역씩 단축되었다. 다음으로 奉使의 왕래는 주로 驛馬를 이용하였는데, 이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供驛署]에서 발부되는 公卷이 필요하였다. 이 공권을 받음으로써 역마를 탈 특전이 승인되어 奉使는 역으로부터 적절한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의 관장은 兵部의 소관이었으며, 공역서가 그 실제사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시대적 변천에 따라 약간의 변화는 있었으나 대체로 1897년(고종 34년)까지 유지되어 왔다. 한편 마을 앞의 鳳凰池는 역전토지로서 일인에게 소작료 부담을 덜기 위해 {星山誌}를 저술한 固城人 李舜欽이 1912년 사재를 내어 형성하였다. 그후 몽리민들이 송덕비를 세웠다.
  • 말뱅(뱀)이·마율(馬栗)·두율(斗栗·斗方·斗村)
    • 성주읍과 월항면을 경계로 하는 白川의 서쪽에 자리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지명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들이 있는데, 우선 이곳은 성주읍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으로서 답계역에서 쉬어가는 길손들이 말을 매어 두던 곳이라 하여 말뱅이라고 하였다고도 하며, 또한 마을 뒤산이 말[馬]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말의 배 위치에 마을을 세웠다고 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마을의 냇가에 큰 밤나무 숲이 있어던 관계로 馬栗이라고도 불렸다고 하며, 또한 마을 남쪽 표고 141m의 산봉이 곡식을 가득 담은 말[斗]과 같아 말뫼[斗山]라 하고 마을을 말뱅이[斗村]라 했다고도 한다.
  • 갈막[加乙幕·蘆村·蘆幕]·각막(角幕)
    • 성주읍을 감돌아 나가는 이천의 東流가 水口가 되어 물꼬리를 감추는 지점에 위치해 있다. 옛날에는 관민이 쓰는 육류를 조달키 위해 읍에서 떨어진 하천의 하류에서 가축을 도살하였는데, 소잡는 賤役을 담당하는 사람.들을[白丁] 이곳에 정착시켰으며, 또한 이 고장의 기운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봉우리가 끝나는 길목에 갈대로 엮은 움막을 짓고 살도록 한 탓에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그 뒤 조금 떨어진 산아래 양지바른 곳에 새로이 마을이 형성되었는데 마을의 이름은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
  • 새정지·만수(萬水)·사정리(射亭里)
    • 답계마을 남쪽과 말뱅이 중간의 표고 50m의 마을이다. 마을이름은 옛부터 이곳에 활쏘기 연습을 하는 亭이 있었던 데서 연유하였다.

성주읍의 북부에 위치하고 邑基의 鎭山인 印懸山(185m)의 완만한 구릉이 읍의 중심부로 용트림해 남향해 돌아 내리는 지맥을 의지해 자리해 있고 성주에서 金泉으로 나가는 도로를 접해있다.

1895년(고종 32년) 5월의 관제개혁때에는 龍山, 南山, 本牙, 北山의 4개 里가 面이 되었는데, 예산리의 일부 및 龍山里와 초전의 뒷뫼, 운포, 와룡 등과 더불어 북산면에 속하였다.

자연촌으로는 연산, 도덕골, 고두무골, 외야골, 상당골 등의 마을이 이웃하여 있다.

  • 연산·인산(仁山·印山)·금산동(錦山洞)
    • 草田面과 경계한 印懸山(185m) 밑에 있는 마을이다. 성주의 牧使가 교체될 때 이 산에서 官印을 교체했다 하여 印山·印賢山이라 하였으나 顯宗때에 寒岡 鄭逑의 묘를 이곳에 이장하고 부터는 仁山·仁賢山이라 하게 되었다. 또한 蓮山은 印懸山의 준말이고 혹은 易家에서 蓮萃(花) 浮水란데에서 연산이라고도 한다. 인현산 동쪽 1km지점에 약 20m 높이의 낮은 산봉이 있고 그 사이로 표고 70m의 대야현(대야티)의 도로는 성주에서 김천으로 통래되는 요로이고 초전면과 경계한 곳이다. 대야티고개에는 옛날에 못이 있었는데 신임목사가 타고가던 말이 놀라서 뛰는 바람에 그 못에 목사가 익사했다고 한다. 그 뒤로 관리들은 이 고갯길을 피하고 답계(댁기)로 돌아서 내왕했다 한다. 인현산에서 읍중앙 대금(봉두)산까지 낮은 산언덕은 읍기의 성지라하여 옛부터 묘를 못쓰게 엄하게 막았는데 한강 정구의 묘를 옮겨쓴 후로는 지켜지지 않았다.
  • 도덕골[道德谷]·성당골
    • 인산마을 남쪽에 위치해 있다. 옛부터 이곳 주민들의 도덕심이 강하다 하여 도덕골이라 불렀으며, 성당골은 임진왜란때 피난하여 이곳에 우거한 崔氏의 호가 性堂이었기 때문이라 한다.
  • 고두무골
    • 성주농·공업고등학교 위쪽의 산언덕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 외야골
    • 인산마을앞 도로의 동남방의 들길을 건너 낮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동쪽의 낮은 구릉을 사이로 학산리 새정지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 상당골(상당곡)
    • 인현산에서 내리는 구릉이 읍내로 맥을 잇는 김천도로 서편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안에는 80년 역사의 성주농·공업고등학교가 자리해 있다.

성주읍의 중심부에서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구한말 관제 개혁시 세록골, 예동, 교촌, 신풍리는 北山面에, 물개(若夫洞)는 龍山面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시 성주면 예산동으로 통합되었다.

星州邑城을 경계로 남으로는 경산리와 접하고 북으로는 성주중학교 뒤쪽 구릉지에서 금산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동남으로는 왜관통로 충혼탑 옆 구릉지에서 삼산리와 경계를 이루어 부락이 형성되어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예산리는 옛 경산부의 읍기로서 東方寺址七層石塔, 星州鄕校, 石氷庫址, 官獄址, 裵氏井, 勵祭壇址 등 많은 文化遺蹟을 保有하고 있는 마을이다.

  • 세록골·세례골·관하리(管下里)
    • 경산 1리 사골과 星州邑城을 경계로 북향한 마을로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李朝 京山府時 邑基인 官家아래 새로이 생긴 부락이라 하여 官下村 또는 管下里로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또한 禮洞(舊 沙禮洞) 앞에 새로운 부락이 이루어졌다 하여 "새로 생긴 고을"이라 하였으나 변화로 "세록골" 또는 "세례골"이라 불려졌다 한다.
      지금도 "管下里" 또는 "세록골"로 부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새록골을 고려말과 이조초기 역대실록을 보관하던 사고(실록각)가 있었으므로 "새록 또는 새레골이라 부른다는 설이 있으나, {경산지} 각방편에 보면 실록각은 성내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 있고 경산 1리 사골마을의 명칭 유래가 史庫로 인하여 생긴 지명으로 추정되고 있어 새록골이 실록각에서 나온 지명설은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는 이조 고종조 사헌부 감찰을 제수받은 晩山 都甲模가 만년에 강학잠심을 위해 건립한 惺心軒이 위치하고 있다.
  • 예동(禮洞)
    • 읍 소재지에서 초전통로 왼쪽에 위치하며 성주중학교가 소재한 부락으로 沙禮洞이라 불려 오다가 전와되어 지금은 예동이라 부르고 있다. {경산지}에 의하면 고려 희종조 奉列大夫를 지낸 裵賢輔가 살든 곳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俗說에 의하면 이곳 일대가 京山府때 邑基라고 전하고 있다. 마을 앞에는 임진왜란시 정절을 지키다가 순절한 裵玄福의 딸 裵娘이 投身한 우물(일명 배씨정)이 있었으나, 지금은 매몰하여 그 흔적만 남아 있어 현재 주민들의 건의로 복원할 계획에 있다. 마을의 서쪽 언덕에는 이조초부터 설치한 려제단(성·일·월·풍·우·설·운·곡·산·수 용왕의 신단)이 있어 매년 청명절과 음력 시월보름에 제례를 올렸다 하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으며, 마을유례가 려제단이 있는 곳이라 "여동" 또는 "예동"으로 부른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히는 알 수가 없다.
  • 교촌(校村)
    • 성주중학교 동쪽 500m 거리의 들길과 세천을 건너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뒤 구릉은 인현산에서 돌아내린 완만한 110m여의 산봉이 농지로 변해있고 그 동남을 신풍리라 하며, 마을뒤 언덕에 남향하여 향교가 있어 마을이름을 교촌(校村)이라 한다. 향교는 조선초 지방의 교육기관으로 각 읍에 설립되었던 바 뒤에 성현을 봉사하는 위패를 모셨는데 대성전과 양편부속 건물이 있으며, 명륜당, 팔덕문, 수복사, 고사가 있다. 대성전에는 오성(공자, 안자,정자, 자사, 맹자)과 십철을 모셨고 송조 육현을 봉사한다. 동서 별실에는 십팔현을 제사지냈다.
  • 탑거리(塔路)
    • 고려때 있었던 동방사지에 높이 12m의 석탑이 있고 그 주변마을이다. 북쪽 언덕위에 현충탑이 있고 그 아래 국도변에는 읍내 방치 산재되어 오던 명사의 비석을 이설했다.
  • 물개(水能浦), 若夫洞
    • 경산1리 소재 흥안재에서 성광중학교를 잇는 도로의 북쪽편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조시대 이 마을에 한 순한 선비가 살던 곳이라 하여 若夫洞이라 칭하다가 약 100여년전 이곳을 개간하면서 물이 풍족하다 하여 물능개(水能浦)로 불리어 오다가 전와되어 지금은 물개라 부르게 되었다 하며 지금은 지역개발로 인해 경산리와 인접 경계가 불분명하고 성주 전신전화국이 위치하고 있다.

성주읍의 중심에서 서북부로 벽진방향의 30번 국도를 접해서 마을앞 들건너에는 이천이 흐르고 동편은 읍의 주맥인 완만한 구릉(표고 800m)이 대금산과 봉두산으로 멎어 있고 예산리와 경산 리를 이웃하여 자연부락으로는 불무골, 목우물로 구분하여 마을앞이 넓게 트여 취락의 위치가 좋 은 곳이다. 백전리는 고려초에 경산부의 본아리에 따랐고 1895년(고종 32년) 본아면, 백전동이 되고 1914년 성주면에 편입되었다.

  • 목우물 [項井]
    • 성주읍에서 벽진쪽 국도변 약 1.5km에 남향한 마을이다. 앞이 창활하여 서남쪽 멀리 성주의 주산인 가야산이 우뚝 바라보이고 수십리 성주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뒤 표고 90m의 언덕을 옛날에는 대금산이라 했고 이곳은 인현산에서 내려온 읍의 주맥인 바 옛날에는 천년노송이 있어 관에서 엄히 보호했다. 이곳 비탈에는 읍의 사대루의 하나인 서정의 터다.
  • 불무골[冶洞]
    • 읍의 중심에서 벽진으로 나가는 국도의 언덕너머 마을이다. 성주읍내의 취락이 형성될 때부터 낮은 구릉의 무성한 노백림이 있었으므로 잣밭골(백전동)이라 했고 고사목은 숫으로 하여 풀뭇간(대장간)이 있어 일손이 바빴다. 그래서 야동이라 했다. 불무(풀무)는 대장간의 숯불에 바람을 불어넣는 기구로 쓰였고 대장간에서는 고대사회에서 살, 창 같은 병기를 비롯 농기구 생할용구를 쇠붙이로 생산하고 정비한 일을 맡았다.
      고려때 삼중대광(향관 1품)의 벼슬에 오른 성산인 呂良裕(성산여시 중시조이며 기세조)가 살았고, 여우창의 아들 원형 呂希臨(1481∼1553)은 왕자 복성군의 스승이었고 창령현감과 내직을 두루 거치고 이곳에서 명암방수촌(벽진 소재지)로 이거했다. 이곳 冶洞 舊址에는 古井이 있는데, 井底 돌에 呂井이라 조각되어 있다고 한다. 또 고성인 모헌 이경명은 1562년(명종 17년) 문과에 올라 동래부사와 승지를 지내고 이곳에 와서 살았고 후손은 선남산전과 금수 적산에 살고 있다.
  • 탑거리(塔路)
    • 고려때 있었던 동방사지에 높이 12m의 석탑이 있고 그 주변마을이다. 북쪽 언덕위에 현충탑이 있고 그 아래 국도변에는 읍내 방치 산재되어 오던 명사의 비석을 이설했다.

성주읍의 서북부에서 성주∼무주간 30번 국도가 관통하고 서편은 벽진면과 접경한다. 마을앞은 넓은 이천평야와 멀리 서남으로는 가야산의 장관이 하늘을 이고 있다. 뒤로는 용자의 지명이 원만한 구릉이 용트림해 앉아 있다. 통일신라이래 경산부 북산리에 속했고, 1895년(고종 32년) 북산면 용산동이 되고 1914년 읍내의 용산면(방) 본아면(방) 북산면(방)이 합면되어 성주면이 되었다. 1979년 5월 성주읍으로 승격되었다. 1989년 1월 각동이 리로 개정되었고 조지뫼, 이방동, 용암의 자연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 조지뫼(봉산, 용산)
    • 성주에서 벽진으로 나가는 국도가 마을앞을 관통하고 낮고 완만한 뒤산을 등지고 남향해 광활한 성주평야를 내려보며 앉은 마을이다. 조지뫼 마을 이름은 자연환경을 두고 고찰해보면 마을 뒷편 구릉는 성주읍기의 명기가 와룡마을에서 읍내로 돌아가고 지맥의 요지가 그릇의 손잡이(꼭지)의 형이 되어있다. ’조지’의 고어는 역시 손잡이(꼭지)를 뜻하고 청구영언에 보면 "또아리를 버서? 조지에 걸고..."에서도 볼 수 있다. 조지뫼는 龍字의 지명이 흔한 주변의 名基를 표방해서 뫼뿌리의 꼭지(손잡이)로 이해된다. 또한 옛부터 새가 산에서 우는 것은 좋은 징조라 하여 마을이름을 鳥啼美 또는 鳳山이라 이름하였다고도 한다. 그래서 용산리라는 동명도 龍巖과 鳳山에서 각각 한 글자씩 借字하여 이루어졌다고 한다. 현재는 의성김씨 진양강씨 박씨 등의 성씨가 많이 사는 부유한 마을이다.
  • 이방동(伊坊洞)·예방동(禮方洞)
    • 조지뫼의 서쪽 약 300m에 들판을 접해 자리한 마을로서, 마을이름의 유래는 지금부터 약 360여년전 경기도 수원 부근인 기안리란 곳에서 白東雲이란 분이 이곳에 정착하여 元氏 성을 가진 사람 및 裵氏 성을 가진 사람과 교유하였는데, 마을 앞 들과 300m 거리에 있는 伊川의 伊字와 막을坊字를 합하여 伊坊洞이라 하였으며, 그후 이곳이 예의바른 마을로 인근에 전해짐에 따라 禮方洞이라는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 용암
    • 성주읍과 벽진면, 초전면의 경계를 접한 마을이며 근방의 낮은 산이 용트림해 있어서 龍字를 많아 쓰는 특색이 있고 마을에 큰바위를 용바위라해서 용암마을이 됐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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