星州郡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67㎢ 이고 2,620여세대에 인구는 7,350여명이고 소재지는 관화리이다. 동부에는 낙동강이 남류하면서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그 지류인 백천연안에도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낙동강 건너 칠곡군 왜관읍과 달성군 하빈면, 서쪽은 성주읍과 월항면, 북쪽은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 未近乭, 吾道旨, 禾谷, 道南의 4개방이 있었는데 道南坊은 고려초 까지 船南部曲으로 된 적도 있고 未近乭坊은 동암, 취곡, 신부, 성원동을 관할했고, 1602년 特使 申慶晋이 山南坊으로 개명했다 道南坊은 노석(기산면), 용신, 도흥지역이고, 吾道旨坊은 오도, 관화, 문방지역인데 1845년 使 김영이 吾道坊으로 개명했으며 禾谷坊은 도성, 소학, 선원동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南谷面과 吾山面을 통합하여 선남면으로 개칭하였고, 老石,龍新, 道興, 仙源,巢鶴, 道成, 東岩, 翠谷,新夫, 星元, 文方, 吾道, 官花 13개동으로 편성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本面 老石洞을 칠곡군 기산면에 귀속되고 龍岩面 柳西洞이 선남면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에 조례제 1076호로 각 리로 개정되었고, 1989년 1월 1일 龍岩面 明浦, 壯學리가 本面에 편입되어 法定 15개 리와 行政 31개리로 되었음.
1680년 병자호란 당시 민휘 선비가 이곳에 입향하여 유촌이라 하였고 그 후 조선조 말엽 초곡방에 속하였다가 1934년 행정구역 개편시 유서촌이라 개칭하였다.
1634년 이화춘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정화리라 하였으며 원래 성주군의 吾道坊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관산동, 정화동, 대흥동 일부와 산남면의 동천동 일부를 합병하였다. 선남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관산의 관자와 정화리의 화자를 본따서 관화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1592년 이 문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취곡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취와동, 침곡동, 서촌동 일부와 초곡면의 송포동 일부를 병합하여 아랫마을 취대의 ’취’자와 침곡의 ’곡’자를 인용해 취곡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1630년 노덕현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모전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오리동, 용대동, 모선동, 신기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1545년 김귀남 장군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관석이라 하고 산남방의 관석동, 예촌동, 봉암동, 신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흥과 부흥의 이름을 따서 신부리라고 이름하였다.
1844년 노한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신흥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도남방의 도자와 신흥의 흥자를 인용하여 도흥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연산군때 박망달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고 묘골로 부르는 것을 경상감사가 황신이라고 명하고 산 남방에 래거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포동, 하유목동, 황신동, 신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산아래 산남방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성원이라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1418년 車씨라는 상인이 마을에 入鄕하여 무릉이라 하였으며 그 후 1930녀 김종운이라는 사람이 무릉과 도원에는 신선이 있다 하여 선원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며, 화곡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동안동, 복산동, 무릉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1445년 權希孟 좌찬성이 이 마을에 入鄕하고 권송계선생이 살았다고 하여 문왕포라고 칭하고 조선시대에 오도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문포동, 대방동, 종산동을 병합하여 문포와 대방의 방자를 합하여 문방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 마을에 權希孟 강원감사 神道碑가 墓下에 竪立되어 있다.
1592년 경주 이씨. 동래 정씨, 경주 최씨 3대가 마을에 입향하고 다포라고 하였으며 원래 성주의 화곡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 마안동, 다포동, 복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마을 앞 강변이 학의 서식처라고 하여 소학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도고산(348m) 일맥이 무시고개를 거쳐 선남면 소재지의 동북 오도천에 머물고 그 兩端水 동편에서 서향한 고촌이다. 서기 685년 이후 오도지방으로서 일리군에 속했고 서기 757년 성주군에 속했고 서기 1895년 오도지면이 됐고 서기 1914년 남곡면과 오산면이 합면되어 선남면으로 되어 오도의 긴 역사를 안고 있다. 서기 1560년 이 마을에 공곡서당을 세웠는데 이는 당시의 목사 황준량이 권응정, 응창 형제와 함께 남긴 공적인데 임진왜란때 아깝게 다 불타고 한강 정구의 도움으로 다시 정사를 지어 고성인 야노당 李淳이 서재로 썼다. 그 뒤 공곡서당은 완폐되어 200년 후인 1875년에 고성인 이순흠, 이두연이 사림과 논의하여 대가면 칠봉리에 이설했다. 마을 동남 2㎞ 거리의 왕산(196m)은 고려태조의 戰勝地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1560년 이원만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입향하여 광령이라 칭하였으며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광령동과 동안동, 마안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인들이 많다하여 도성리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박명호란 선비가 약 300년 전에 마을에 入鄕하여 신불이라 이름하였고 그후 배춘길이라는 선비가 금계라 개칭하여 조선시대말엽에는 초곡방에 속하였다가 1989년 행정구역 개편때 선남면에 소속되었다.
칠봉산(516m)에서 원출한 초곡천이 12km 동류하여 선남면 소재지 남쪽에서 백천과 합류하는 곳의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안에 봉암이란 신당의 단석이 있고 이 바위의 서편을 서촌, 동편을 동촌이라고 구분한다. 지금도 마을이름의 유래를 잘 모르고 편의에 따라 나누어 부르고 있다. 군내 도처에 신당마을이 있고 그와 같은 발음의 신촌등을 많이 볼 수 있다. 1642년 이달운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신당이라 하였으며 그후 마을이 번영하여 동촌, 봉암, 서촌으로 분동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봉암동, 동천동, 서촌동, 유촌동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마을을 만들고, 동촌의 동자와 봉암의 암자를 합하여 동암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별티에서 두리티로 이어지는 성주 - 용암 도로의 초곡면 서쪽 상류 1㎞거리의 계곡을 사이로 양지, 음지로 구분하는 반경 1㎞의 대촌이다. 약 3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각 성부락인 이 마을은 산수가 맑고 조용한 산촌이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