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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州郡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면적은 67㎢ 이고 2,620여세대에 인구는 7,350여명이고 소재지는 관화리이다. 동부에는 낙동강이 남류하면서 충적평야를 형성하고 그 지류인 백천연안에도 충적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동쪽은 낙동강 건너 칠곡군 왜관읍과 달성군 하빈면, 서쪽은 성주읍과 월항면, 북쪽은 월항면과 칠곡군 약목면으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통일신라 이후 未近乭, 吾道旨, 禾谷, 道南의 4개방이 있었는데 道南坊은 고려초 까지 船南部曲으로 된 적도 있고 未近乭坊은 동암, 취곡, 신부, 성원동을 관할했고, 1602년 特使 申慶晋이 山南坊으로 개명했다 道南坊은 노석(기산면), 용신, 도흥지역이고, 吾道旨坊은 오도, 관화, 문방지역인데 1845년 使 김영이 吾道坊으로 개명했으며 禾谷坊은 도성, 소학, 선원동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南谷面과 吾山面을 통합하여 선남면으로 개칭하였고, 老石,龍新, 道興, 仙源,巢鶴, 道成, 東岩, 翠谷,新夫, 星元, 文方, 吾道, 官花 13개동으로 편성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다시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本面 老石洞을 칠곡군 기산면에 귀속되고 龍岩面 柳西洞이 선남면으로 편입되었다. 1988년 5월에 조례제 1076호로 각 리로 개정되었고, 1989년 1월 1일 龍岩面 明浦, 壯學리가 本面에 편입되어 法定 15개 리와 行政 31개리로 되었음.

1680년 병자호란 당시 민휘 선비가 이곳에 입향하여 유촌이라 하였고 그 후 조선조 말엽 초곡방에 속하였다가 1934년 행정구역 개편시 유서촌이라 개칭하였다.

  • 버들곡(류촌)
    • 유촌은 지류인 초곡천이 합류되는 신당리 마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낮은 산으로 둘러가리고 서향한 마을이다. 남쪽 약 1km거리에 141m의 산봉은 용암면과 경계를 한다. 옛날에는 성주에서 대구로 나드는 중요한 도로의 마을이며 류림정이 있다 약 40여호의 가로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민휘 선비가 약 300년 전에 이곳에 와서 살았는데 그 당시 이곳은 버들이 무성하여 민휘의 호를 유산이라 하였는데 마을 이름 또한 유산이라 하였다. 그후 150년 전에 마을 이름을 유촌이라 하였는데 행정구역 개편과 더불어 유서리라 이름하였다.
  • 질매골(동)
    • 질매골은 유촌 서남쪽 1.8km거리의 세천상류에 있는 산촌이고 그 마을 서남 약 2km거리의 안산(245m)과 대명동 동편의 대명산(173m) 사이를 질매질( )이라고 한 데서 나온 마을이름이다. 이 마을 북쪽 1.km쯤에 질매골이 있다 .약 4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유해원이란 선비가 액 300년 전에 이 마을에 입향하여, 당시 용마가 달아나다가 마을 앞산에 안장을 벗어 놓고 갔다고 하여 이 산을 안산이라 명하였다. 골짜기 이름 역시 안동이라 칭하였다. 속칭 질매골이라고 한다.
  • 마을의 문화유적
    • 골짜기가 크고 길다하여 대곡이라 하였고 이 골짜기 막바지에는 맷돌바위가 있는데 길에서 약 300m 뒤쪽에서 쳐다보면 맷돌과 같이 생겼으며 그 밑에는 구멍이 있어 아들 못 낳는 사람은 이곳에 돌을 던져 10개 중 3개만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다.
  • 배버리골
    • 약 200년전 가난한 사람이 남의 잔치집에서 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배가 터져 죽어 이곳에 묻었다 하여 배버리골이라 한다.
  • 불당골
    • 약 300년전 이 골짜기에 절이 있어 불당골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도 조각이 남아 있고 일제 말엽에 이 골짜기에서 조그마한 부처를 주워 엿장수와 엿을 바꾸어 먹었다고 한다.

1634년 이화춘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정화리라 하였으며 원래 성주군의 吾道坊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관산동, 정화동, 대흥동 일부와 산남면의 동천동 일부를 합병하였다. 선남면사무소가 위치하고 있고 관산의 관자와 정화리의 화자를 본따서 관화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떡뫼 (獨山)
    • 선남면 소재지 마을이고 관화리의 중심되는 마을이다. 金容和란 선비가 주막을 개설하여 독가로 있다가 1927년 면사무소가 이설됨에 따라 남북으로 트인 30번 국도변에 마을이 크게 이루어졌다. 마을 동편은 넓은 들건너 말티고개의 산자락이 감싸고 서쪽은 동암리가 白川을 사이로 마주하고 있다. 성주읍과는 약 7km의 거리에 있고, 대구광역시와는 동으로 약 28km거리로서 산업, 교통의 전망이 밝은 마을이다. 독산은 약 10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 지고 뒷산을 떡뫼라하여 독산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 덤섬이, 덤뒤(岩洞, 大興洞)
    • 선남면 소재지 북쪽 큰마을의 서편부분으로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앞에 덤섬이라는 바위셋이 있어서 덤섬마을로 부른다. 성산이씨, 김해김씨, 밀양손씨 등의 부촌으로 살고 있다. 약 4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 지고 마을 뒤 산중턱에 바위가 많이 산재하여 있다고 하여 덤더리라 하였다가 그후 이태연이라는 선비가 입향하면서 크게 일어나라는 뜻에서 대흥이라 개명하였다 한다.
  • 정화리(井花里)
    • 덤섬동쪽 부분의 마을인데 그 앞 부분의 선남초등학교가 있는곳을 안산, 덤뒤등으로 부른다. 심방산 아래의 마을로서 약 6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 지고 이화춘 이라는 선비가 개척할 당시 샘물이 양호하여 주변에 괴화나무가 무성하여 정화라 이름하여 왔다고 한다. 성산이씨 집성마을이고 龜岩 李采興이 世居했다.
  • 안산(內山,敎洞)
    • 안산은 정화리 마을의 안쪽이라고 하여 안산이라 부르며 선남초등학교가 건립되어 상가가 들어옴으로 일명 교동이라 한다. 약 1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 말티(馬峴)
    • 선남면 소재지 동쪽 들건너 표고 120m의 낮은 산줄기 사이 고개를 말티고개라 한다. 말티재는 소학리와 도흥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며, 마현은 그 아래의 마을이다. 약 1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마을 뒷산을 넘어 대구부를 가는 곳으로, 경상감사가 부임지에 말을 타고 넘는다하여 말티 또는 마현이라 명하여 왔다.
  • 世庄碑
    • 정화리의 오랜 사적을 표시한 바이다.
  • 事蹟碑
    • 이규희 사적을 기록한 바이다.
  • 龜岩齊
    • 구암 이채홍을 추모하는 곳이다.
  • 學圃齊
    • 1906~1927년까지 선남면 사무소로 사용한 바 있는 星山李氏 재실로서 옛 건물은 헐어 버리고 1994년에 2억여원을 들여 신축하여 現在 祖上을 崇尙하는 道義와 學文의 道場으로 使用되고 있음.
  • 書齊谷
    • 松溪先生이 後學을 講學하던 곳으로 現在는 터만 있다. 위치는 官花里 서재골 入口에 있다.

1592년 이 문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취곡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취와동, 침곡동, 서촌동 일부와 초곡면의 송포동 일부를 병합하여 아랫마을 취대의 ’취’자와 침곡의 ’곡’자를 인용해 취곡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취와대, 취바대(취와대, 상평)
    • 취와대는 초곡천변 평야를 동서로 펼쳐놓고 성산에서 내린 나즈막한 구릉을 뒤로하여 남향한 마을이다. 동쪽은 신당리와 연접하고 자연환경이 빼어난 마을이다. 약 30여 호의 가구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60년전에 마을이 조성될 당시에 앞산에 푸르고 검은 바위가 있고 마을이 늪속에 개구리가 앉아있는 형이라 하여 취와대 또는 취와라고 이름하여 왔다 한다.
  • 방아실(곡)
    • 침곡은 성산(389m)의 동남쪽에서 머금들과 300m 거리로 하고 마을이 산줄기로 둘러앉아 옛날 난세때 은사와 풍월을 즐기는 명사가 점거하나 예가 많았다. 40여호의 가호로 덕산이씨의 집성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90년전에 이규문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로 이주한 것이 마을로 조성되었고, 당시에 고와, 호박이라는 사람이 우막을 짓고 살고 있었으므로 고와 호박이 있으면 방앗간이 있어야 한다면서 곡이라 이름하여 왔다. 속칭 방아실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 점터
    • 옛날에 도자기를 제작하였던 곳이라 하여 점터라고 불러오고 있으나 지금은 흔적도 없고 다만 사기조각이 유존하고 있다.
  • 흥선제
    • 광산 이씨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 첩암제
    • 단산 정씨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 이이당
    • 첨곡 마을안의 이이당은 선조 때 덕산인 주간 이 문을 추모하는 제사이다.
  • 굴근절
    • 신라말기에 큰 절이 있었다 하여 굴근절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지금은 기와 조각이 산재하고 있다.
  • 불당골
    • 시대미상의 절이 있었다 하여 불당골이라 하고 빈대로 인하여 절이 망하였다고 전한다. 기와조각이 산재하여 있다.
  • 낭신바위
    • 남근과 같이 생긴 바위를 낭신바위라 하고 바위 끝 부분에 물이 스며 있다고 한다.
  • 패구나무설
    • 마을 중간에 약 500년생으로 패구나무가 잎이 피는 것이 매년 다르므로 이에 따라 흉. 풍년을 사전에 알 수 있다고 한다.

1630년 노덕현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모전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오리동, 용대동, 모선동, 신기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띠 밭(茅田)
    • 현령산에서 동남으로 군계를 이루며 내린 산맥이 낙동강에 이르며 도고산(349m)을 이루고 그 동남 낙동강을 따라 넓게 펼쳐진 강변평야를 바라보는 성주군의 최동단 마을이다. 이조 인조때(1630년) 입향한 魚德玄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조성하여 모전이라 하였으며, 그의 후손으로 國軒 魚聖國(1682~1730)을 추모하는 木齊가 있고 愚坡 魚鍾集을 위하는 愚坡亭이 있다.
    • 금릉 岩洞에서 입향한 鄭宗의 후손이 사는데 성종때 평양감사 이조참판을 지낸 寒碧齊 鄭錫 추모하는 景寒齊가 있고 神道碑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약 6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芽(띠)가 무성하였다 하여 모전이라 칭하였다.
  • 상 곡(上谷)
    • 상곡은 약 3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띠밭보다 윗쪽 계곡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상곡이라 명하여 왔다.
  • 용 대 골(龍大谷)
    • 용대는 1590년 백지원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용대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게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대의 용자와 윗마을 신기의 신자를 인용하여 용신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띠밭마을 서쪽 약 1km에서 표고 약 40m의 나즈막한 언덕을 둘러 동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 표고 약 182m의 용대산이 있다. 약 6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용신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며, 그 아래에 위치한 낙동강지류인 비리천이 있어 인어가 용으로 승천 하였다하여 용대라 칭하였다.
  • 새 터(新基)
    • 신기는 용대마을 북쪽 약 1km 강변의 동부초등학교가 있는 마을이다. 낙동강변의 성주땅으로 가장 위쪽의 마을이다. 약 2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용대에서 자녀들의 분가로써 샛터를 잡았다 하여 신기라고 명하여 왔다.
  • 오 리 골(吾洞, 亭)
    • 오리곡은 1586년 徐興著란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오리동이라 하였다가 그후 제정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새터(新基)마을 서쪽 약 1km의 낮은 산골에 있는 같은 권의 두 마을이다. 약 3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400년 전에 徐興著라는 선비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처로 들어와서, 이 곳이 나의 故鄕이라고 하며 五里洞동이라 하였다가 마을 앞에 정자나무를 심었던 것이 풍치가 중국에 있는 제주땅의 정자나무와 같다 하여 제정이라 칭하였으며 京山人 三 堂 李達新의 三子 가 이곳에 卜居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 신 촌(新村)
    • 新村은 1993년 3월 성주댐 건설로 인하여 금수면 봉두리 일대가 수몰되어 이주대책으로 이주민들의 16여호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新村이라 명하였다.
  • 갈계밭
    • 낙동강 하류에서 서식하는 갈계가 홍수만 지면 상류하여 갈대에 매달려있다고 하여 갈계밭이라고 하나, 지금은 농경지로 이용하여 갈대는 없어지고 갈계 자체도 볼 수 없다고 한다.
  • 숲고개
    • 이 고개는 높지도 않고 강변에 위치하였으나 잡목이 울창하여 도적들이 많아서 행인들이 통행을 꺼리는 고개라고 하여 숲고개라고 한다.
  • 堂산
    • 마을을 조성할 당시 산신에게 마을의 발전을 기원하였던 제단이 있는 곳으로 일제시대까지 神을 모셨다고 하나 지금은 당산이란 이름만 있을 뿐 제를 지내지는 않는다.
  • 草田嶝
    • 풀이 많아 옛날부터 목동들이 소를 먹이던 곳으로 초전등이라 불리어 왔으나 어린 남녀가 사랑을 속삭여 부모로부터 꾸중을 듣고 풀밭에 숨어 굶주려 죽게 된후부터 흐린 날씨에는 배고프다는 소리가 난다고 하며 지금은 그 곳에 가는 사람이 없고 잡목만이 무성하다.
  • 義學齊
    • 수원 백씨들의 집회장소로 쓰인다
  • 景采齊
    • 달성 서씨들의 집회장소로 쓰이는 곳이다
  • 義齊
    • 함평 노씨들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 景寒齊
    • 新村은 1993년 3월 성주댐 건설로 인하여 금수면 봉두리 일대가 수몰되어 이주대책으로 이주민들의 16여호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새로 마을을 형성하였다 하여 新村이라 명하였다.
  • 愚坡亭
    • 함평 노씨들이 집회 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1545년 김귀남 장군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관석이라 하고 산남방의 관석동, 예촌동, 봉암동, 신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신흥과 부흥의 이름을 따서 신부리라고 이름하였다.

  • 머금들(관석)
    • 관석은 성산(389m)의 동남 1km의 거리에 위치하여 남쪽으로 방아실과 약 300m의 거리로 표고 70m의 구릉의 소분지에 위치한 마을이다. 동남으로는 100m높이의 다섯 산봉으로 둘러있다. 성주읍의 구등골과 함께 고대 가야 부족 성읍국중의 동맹국의 하나로 추측할 수 있는 곳이며 통일신라 이래 맑은돌방(미근돌방)으로 지속되다가 1906년 오도방과 합방되어 오산면이 되었던 산골 역사의 중심부락이다
    • 맑은돌(미근돌) 가야의 천년, 맑은돌방의 1300년의 유서깊은 유적지이다. 약 40여호의 가로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435년에 김귀남 장군이 마을에 입향할 당시 뒷산에 돌이 많다 하여 관석이라 명하여 왔다고 한다.
    • 선조 때 경주인 성 김귀남이 진주 덕산에서 가천면 마수리에 입향하여 그 자손이 살며 성암의 묘소가 있다. 선조 때 김해인 김춘인이 창원에서 용암뱀원에 입항햐여 이 마을에 후손이 살고 있다. 신부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이다.
  • 부흥동(부흥동)
    • 부흥동은 성주-대구간 국도가 백천을 건너는 곳에서 월항면 소재지로 갈리는 백천동편의 남향마을이다. 마을서쪽 토죽골의 두어 집도 이 마을권에 포함된다. 20여호의 마을이며 약 240년전에 조성하면서 부자가 되라는 뜻에서 부흥이라 칭하였다.
  • 신기마(신촌)
    • 신촌은 선남면 소재지와 2km 거리의 성주읍쪽 국도변 백천의 신부교 가까이의 마을이고 성산이씨,김녕김씨, 수원백씨 등이 살고 있고, 국도와 접해서 전망이 밝은 마을이다. 새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로 신촌이라 이름하고 있다.
  • 예촌(예촌)
    • 예촌은 머금들 동북1km에 낮은 언덕을 터잡아 동쪽으로 성주-대구간의 국도와 가까이 하여 신기마을과 연해있다. 약 5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140년전에 이희라는 선비가 마을에 입향하고 착실한 예를 갖추라는 뜻에서 예촌이라 명하였다고 한다. 성산이씨, 정시 등이 살고 있다.
  • 절탑골
    • 고려시대 절이 있었다 하여 절탑골이라하고 빈대가 많아 중이 떠남으로써 절은 망하고 터만 남아있다 한다.
  • 빈소골
    • 조선조때 상례로 시묘살이 하다가 떠났다고 하여 빈소골이라 한다.
  • 성산제
    • 성산이씨의 집회장소로 쓰이고 있다.
  • 토고산
    • 마을 앞산의 모양이 옛날 장군의 투구와 같이 생겼다고하여 투구산 또는 토고산이라 한다.
  • 류목정
    • 신촌 북쪽에 있는 정자이다.
  • 경산제(당산서옥)
    • 이 제합은 성산 이씨의 매실, 자 "경수", 호 "당산"을 추모하기 위하여 자손(광희 절)들이 정축년(1937)에 건립하였다.

1844년 노한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신흥이라 하였으며 조선시대에 도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도남방의 도자와 신흥의 흥자를 인용하여 도흥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新興(道南)
    • 신흥은 낙동강 성주대교로부터 북쪽 2km거리의 표고 30m 평야지로 도로에 접한 동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동쪽은 낙동강 연안개발로 멀리 아득한 평야와 강과 대교가 광활한 전망의 자리를 차지해 있다. 마을은 신흥과 방천걸로 구분하나 같은 권역이다. 약 28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140년전에 노한욱이라는 선비가 담방이란 곳에서 살다가 지세가 좋지 못하다하여 獨家로 이전한 것이 마을로 조성되었고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에서 신흥이라 칭하였다. 도흥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 신택(新宅)
    • 신택은 약 1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신흥마을이 번영하여 자녀들의 분가지로 이저한 곳이며, 이에따라 신택이라 명하였다.
  • 사압실(谷)
    • 삽곡은 도남마을 서북 700m거리에 부원산(120m) 낮은 동남향한 마을이다. 약 3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400년전에 三嘉에서 충주인 三山堂 石琮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당시 왕산 동편 부원산아래에 위치하여 삽과 같은 지형에 왕재가 탄생한다고 하여 삽곡이라 칭하였다. 마을 서편에 固城 令 子方 星山氏 先代墓가 있는데 葛菴 李玄이 撰한 石村 燦의 墓道碑가 세워져 있다. 李 의 묘가 있고, 또 이산에 조개바위라는 넓고 큰바위가 이름나 있다.
  • 內 洞(內洞, 洞)
    • 船南面 소재지에서 東쪽으로 2km 지점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南北쪽으로 馬峴山을 끼고 동쪽으로 부원산, 북쪽으로 도고산 지령인 왕산을 끼고 있는 작은 마을로 地形이 마치 궁궐의 內命府와 흡사하다하여 內洞이라고 불리워졌다고 한다. 이 마을은 慶州崔氏가 世居하는 마을로써 350여년전에 成均生員인 崔善吉이란 선비가 광해조 당쟁에 회의를 느끼고 벼슬을 마다하고 내려와 처음으로 이곳에 隱逸하여 後學을 講道하면서 마을이 이루워졌는데 마을 全盛期에는 30餘戶가 살다가 都市로 移居하고 지금은 15戶가 살면서 마을내의 祖上을 追慕하는 山書堂이 지금도 있다.
  • 차곡(谷, 車洞)
    • 차곡은 삽곡 북쪽 500m거리의 낮은 등너머 마을과 들을 나즈막한 언덕으로 둘러감싼 마을로 착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약 1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王山아래의 어거소라고 하여 車洞이라고 하였다.
  • 모금재
    • 함평 노씨들의 집회장소로 쓰이던 곳이다.
  • 道南齊
    • 高麗末 版圓判書公 金海金諱管 三賢派 中始組의 20世와 21世孫인 遠 斗, 啓周, 啓坤, 啓圭 등이 후학 양성을 목적으로 辛亥(1911)에 건립하였는데 마을 이름을 본따 道南書堂이라 하였다. 현재의 위치는 선남면 도흥리 443번지이다.
  • 소산재
    • 함평 노씨들의 집회장소로 쓰어던 곳이다.
  • 귀원제
    • 仁同人 張脩를 추모하기 위하여 1935년에 건립하였다.
  • 경주 최씨 세덕비
    • 경주최씨 득성시조로부터 현조파조의 세득을 기록한 비이다.
  • 乃山書堂
    • 乃洞마을에 처음 入鄕한 成均生員 崔善吉의 9代孫인 李昌園參奉 榮煥 선비가 生時風流하고 後孫을 講하던 재실이다.
  • 也軒齊
    • 乃洞마을에 처음 入鄕한 成均生員 崔善吉의 9代孫인 李昌園參奉 榮煥 선비가 生時風流하고 後孫을 講하던 재실이다.
  • 石鎬文愛國志士功績碑
    • 字는 友益이고 號는 光韓, 貫은 忠州며 1921年生, 性品이 强直하고 平素 抗日精神과 民族主義, 愛族의 信念이 强烈하였는데 日帝時 對中國戰에 강제로 日軍에 入隊되어 中國에 끌려가 對中戰爭 수행중 夜中을 틈타 九死一生으로 탈출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여 상해임시정부 김구선생과 이범 장군 지휘하에 용전사력을 다하여 祖國光復을 爲하여 中國 中慶까지 가서 活躍中 終戰이 되어 6餘年만에 臨時政府要因과 같이 故國에 돌아와 李將軍 밑에서 民族靑年團에서 계속 愛國運動을 하다가 1983年 2月에 別世하였다. 政府에서 國家有功者墓域淨化事業의 일환으로 大韓軍事援護聰에서 1984년 1월에 公蹟碑를 세웠다. 道興2里 앞산하에 所在함.
  • 완석정 유지
    • 반아실에 있는 완석정의 유지로 소학리의 송정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 지족당 유지
    • 방아실에 있는 지족당의 터.
  • 왕지말랑
    • 장차 나라를 다스릴 인물이 왕산하에서 출생한다고 하여 왕산봉을 숭배하고 왕지말랑이라 한다.
  • 약샘
    • 부원산 중턱에 있으며 큰조개 모양을 한 암석 밑에서 물이 한방울 떨어지는데 사람들이 먹으면 약효도 있고 소원성취가 된다고 하여 많이 먹고 있다.
  • 절터
    • 고려말기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유적으로 보이는 여러 가지 흔적이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알수 없다.
  • 덕임산
    • 신기를 잡아 이주된 마을이 크게 번영하는 것을 마을 뒷산의 명기에 의지함이라고 하고 덕이 산에 있다 하여 덕임산이라 한다.
  • 반아곡
    • 계곡의 길이가 4km로서 좌우 양등성이 아옹이 이빨같이 생겼다 하여 반아곡이라 하고 풍치에 의하여 신선이 오르내린다고 한다.
  • 成均進士事蹟碑
    • 正廟시 성균진사 石鎭字의 사적비로 차동 서편에 있다.
  • 石義士碑
    • 石鎬文公이 중국에서 抗日獨立鬪爭한 功으로 대한민국정부에서 건립하였고 王嶺下에 있으며 마을 입구 동북쪽에 있다.
  • 石琮遺蹟碑
    • 성주 입향주 石琮선생을 추모하는 碑로서 차동 서편에 있음
  • 三山堂
    • 충주석씨 삽실 입향선조 石琮선생을 추앙하고 모시는 서당으로 약 350년전에 건립되었는데 100년전에 중건하였다.
  • 烈閣
    • 石煥의 처 全州李氏의 出天之烈行을 기리는 비각인데 星州郡에서 94년에 보수하였다.

연산군때 박망달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고 묘골로 부르는 것을 경상감사가 황신이라고 명하고 산 남방에 래거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용포동, 하유목동, 황신동, 신흥동 일부를 병합하여 성산아래 산남방의 으뜸이라는 뜻으로 성원이라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黃 新
    • 성주읍에서 동쪽으로 지불티를 넘어 국도 4㎞지점의 새원마을 북쪽에 있는 성산에서 북으로 내려감싼 산줄기로 터를 잡은 동남향한 고령박씨 집성마을이다. 마을앞은 넓은 들과 백천이 흐르고 냇물건너는 한개 마을과 이웃한다. 약 5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오래 전부터 묘꼴마을로써 몇개의 가호가 산재했다고 하나 자세히 알 수 없고 경상감사가 성주목을 순시시에 지나면서 주변에 나무가 누렇게 무성한 것을 보고 새로운 풍치라고 하여 황신이라 명했다고 한다.
  • 새 원(新院)
    • 신원은 함바위에서 지불티를 넘어 도남동쪽 산기슭에 동향한 마을이다. 옛날 성주봉수대의 보조마을로 발전했다고 한다. 약 4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90년전 이종이란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였고 성주목에서 10여 리 간의 거리에 院집을 신축하였다는 뜻에서 신원이라 명하여 왔다.
  • 토주골(土竹谷)
    • 토주곡은 황신마을 동남 800m 선남에서 월항면쪽으로 나드는 도로변에 있고 마을 북쪽이 월항면의 경계로 되어 있다. 약 1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동학혁명시 관군과 동학도가 싸운 장소라 하여 討賊谷이라 명하여 왔다고 한다.

1418년 車씨라는 상인이 마을에 入鄕하여 무릉이라 하였으며 그 후 1930녀 김종운이라는 사람이 무릉과 도원에는 신선이 있다 하여 선원이라 개칭하였다고 하며, 화곡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동안동, 복산동, 무릉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무릉리
    • 무릉은 성주의 북단 별뫼(715m)의 줄기가 현령산(792m)과 角山(468m)을 거쳐 뻗은 그 한뿌리가 멎어앉은 곳이며, 군내 6개면읍을 골고루 흘러내리는 백천이 낙동강에 합류하는 삼각지의 마을이다.
    • 인조때 밀양인 박유현의 일족이 도성리 못뚝과 이곳에 나누어 살았고, 약 5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신라때부터 낙동강을 교통수단으로 활용되면서 물건을 배에 싣고 옮기고 하던 중 약 560년 전에 車씨라는 상인이 숙소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을 지은 것이 마을로 조성되었다.
    • 그리고 지세가 중국의 무릉땅과 같다고하여 무릉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야기를 살펴보면 도잠의 도화원기에 나라 太元時代(서기 376~396년)에 무릉이란 곳의 한 어부가 떠 내려오는 복숭아 꽃이 흐르는 강을 따라 배를 저어 올라가니 아름다운 마을의 어느 어느 굴속에서 600년전 진나라에서 난을 피해 온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니 바깥 세상의 변천과 세월의 흐름을 알지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늙지않고 세월이 흐르지 않는 즐거운 세상의 마을이라는 뜻이다.
  • 도원리
    • 1650년 여희문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고 아랫마을 이름이 무릉리이므로 격에 맞추어 도원이라 칭하였다가 화곡방에 속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억 개편때에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도원리는 북쪽 약 1km에서 마을 동쪽은 독산(81m)의 낮은 산봉으로 낙동강을 가려 막고 서편은 약 100m높이의 산으로 이천을 가려서 남향한 마을이다.
    • 옛날부터 낙동강을 통해서 남해안과 하류 남도의 각 지방 각종화물의 이동운송을 하는 번잡한 상선과 관수물이 이웃마을에 상주하는 관원의 통제를 받으며 낙동강의 수운이 이루어지던 동산진의 본거지이다. 나루터는 동쪽 새창마을에 있다.
    • 약 50여호의 가로호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00년 전에 여희문이라는 선비가 서당을 차리는 것이 마을로 조성되고 아랫마을 무릉리가 있으니 복숭아를 심도록 하여 중국의 지명을 인용하여 도원계라 칭하였다고 한다
  • 파밭골(巴洞)
    • 파동은 성주대교의 하류쪽의 남쪽에서 동향한 마을이다. 서기 936년 견훤과 그의 아들 신검이 왕건에게 파멸되었고, 1950년 한국동란 때 격전장이 되기도 하였던 역사적인 유서가 깊은 마을이다. 약 5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도원리에서 농지를 따라 이거하면서 중국의 지명을 인용하여 무릉과 도원의 격에 맞추어 파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 새 창(新艙)
    • 신창은 무릉과 도원의 가까운 중간에 위치하고, 강변에 있는 동안진의 나룻터 마을이고, 고려조부터의 倉(東安倉)의 자리이다. 약 1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00년 전부터 낙동강을 통과하는 상인들의 물품을 보관하는 곳이라고 신창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대흥사
    •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호국 영령을 모시기 위하여 1975년 이용택이 창건하여 대흥사라고 한다.
  • 밤나무 숲
    • 마을 강변에 밤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밤나무 숲이라 전하나 병자년에 대수해로 인하여 유실되고 지금은 강이 흐르고 있다.
  • 이성들
    • 마을 앞 강변의 황무지로 풀이 많아서 인근동에서 소먹이 풀로 사용하였다 한다.
  • 돌집 고개
    • 행인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돌 세 개를 던지고 침 세 번을 ?b고 가지 않으면 가정에 재앙이 오고 몸에 피부병이 생긴다는 전설이 250년 전부터 전해내려 오다가 한국전쟁 후에는 없어지고 지금은 흔적도 없다고 한다.
  • 당 산
    • 약 250년 전부터 내려오는 풍습에서 무당이 굿을 하면 제일 먼저 대나무가 가는 집은 제주가 되고 두 번째 가는 집은 음식을 만들고 세 번째 가는 집은 심부름꾼이 되어 정월 초 구일 당산에서 제를 지내고 10일에는 전동민이 모여 일년동안의 무사하기를 비는 제를 올리는 곳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사라지고 지금은 당산나무 몇 그루만 남아있다고 한다.

1445년 權希孟 좌찬성이 이 마을에 入鄕하고 권송계선생이 살았다고 하여 문왕포라고 칭하고 조선시대에 오도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문포동, 대방동, 종산동을 병합하여 문포와 대방의 방자를 합하여 문방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이 마을에 權希孟 강원감사 神道碑가 墓下에 竪立되어 있다.

  • 大 方 洞
    • 대방동은 문포남쪽 계곡 1㎞거리에 자리하여 서쪽에는 영취산(325m)과 2㎞ 떨어져 마을 하류편에는 종산마을과 독자골로 이어진다. 홍언수의 후손인 남양홍씨와 성산이씨가 많이 살고 있다. 또 선조때 충주인 석여명의 8세손 충장위를 지낸 석득건이 이 마을에 입향해 복거를 정했고 그의 묘소는 한 개에 있고 그 후손이 近洞에 살고 있다. 충주석씨 경인보에는 시조 석린의 7세손 석수명과 형제로 형인 판윤은 홍주로 아우 문하주서는 충주로 관향을 달리했다가 그뒤 합보했다 한다. 약 5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오래전 부터 함안조씨가 살았다고 하나 후손이 없어 미상이고, 약 330년전 홍세형이란 선비가 마을을 정하고, 그후 홍우범이란 선비가 서당을 차려서 인근마을의 자제들이 수학하여 과거일자를 기다린다고 待榜이라고 하였다. 문방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었다.
  • 물안개(文浦, 文王浦, 水餘浦)
    • 칠곡군 지산면과 월항면, 선남면의 경계를 하고 있는 달암산(월암산, 304m)남쪽 1㎞거리의 오도천의 상류 계곡에 자리하여 계곡을 따라 평지 2㎞에 산재한 마을이다. 옛날 마을의 형성을 종족의 안전과 隱居善隣의 바탕을 숭상해서 대개 산간에 터를 잡았고 그런 곳에는 농사를 지을수 있는 토지와 식수를 제공하는 계곡이 있었다. 이런 환경의 대촌을 골안이라던가 물안이라해서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물안개의 마을뜻도 마을 밖에서 부질없는 외인의 출입을 멀리하고 接賓客, 奉祭祀와 일하고 글만 읽는 특정마을의 고유성을 나타내고 있다. 약 5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로 약 540년 전에 권송계선생이 학식을 비유하여 문왕포라 하고 그후 河賓李氏가 들어와서 水餘浦(물남계)라 하였다가 이조 孝宗시 星山李氏 碩海선비가 文浦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 종산(宗山)
    • 오암천을 끼고 대방동 남쪽으로 이어져 표고 50m의 들판을 바라보며 남향한 자연환경이 빼어나고 경치가 좋은 마을이다. 宗山이란 主山에 가까이서 수백의 봉우리가 솟은 곳의 지명을 옛부터 종산이라 하며, 이런 곳의 마을의 자리를 나타낸 뜻이 있다. 종산은 약 3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300년 전에 석득립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고 입향 당시 뒷산의 모양이 종과 같다 하여 종산이라 칭한다.
  • 독 가(獨家)
    • 독가는 약 1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200년 전에 신명원이란 선비가 홀로 이주하였다고 하여 독가라 명하여 왔다고 한다.

1592년 경주 이씨. 동래 정씨, 경주 최씨 3대가 마을에 입향하고 다포라고 하였으며 원래 성주의 화곡면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송정, 마안동, 다포동, 복산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였으며, 마을 앞 강변이 학의 서식처라고 하여 소학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다 계(포)
    • 다계는 성주 대구간의 30번 국도가 광영마을에서 북쪽의 갈림길이 있고 그곳 1km거리의 길서편으로 위치하고 있어 새로운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약 6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경주 이씨, 동래 정씨, 경주 최씨 3대촌으로 단란한 마을이었으나, 임진왜란시 낙동강을 상류한 왜구들이 온갖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다못하여, 전동민이 밤을 틈타 왜구들의 선박을 격침하였다. 그후 왜군의 보복으로 행패가 심하여 산으로 피신하고 없으니, 왜구들이 집에 있는 술을 마시고 놀았다고 하여 다포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소학리의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 교동
    • 교동은 약 3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1950년 4월 1일 동부초등학교 분교장으로 신축됨에 따라 인근의 주민들이 상업을 목적으로 이주한 이후 교동이라고 이름하게 되었다고 한다.
  • 신송정
    • 신송정은 성주대교의 들머리 두마을과 이어진 서쪽마을이다. 구송정 마을이 차츰 이곳으로 이주해서 마을이 이루어졌으며, 마을 앞에는 30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약 40여호의 마을이며, 낙동강변에 위치한 송정마을이 예전에 대홍수로 인하여 침수되고 당시 선남면장 금락순이 진두지휘하여 이주하게 하고 신송정이라 이름하였다. 구송정에는 대략 2여호의 가호만이 남아있고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울창하여 하절기에 피서지가 되었다고 하여 송정이라 한다
  • 구송정
    • 선남대교 북쪽 500m의 강변의 마을터이며, 1987년 낙동강 연안공사로 마을이 편입되어 신흥리로 모두 이사가고 현재는 강변이 되어 갈대만 무성한 곳임. 새로 생긴 신송정과 구분하기 위하여 구송정이라고 한다.
  • 뱃머리(津두)
    • 진두는 신송정 마을과 이어진 동편의 성주대교의 마을이다. 약 1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옛날부터 낙동강을 왕래하는 나루터였다고 하여 진두라고 한다.
  • 농장
    • 약 10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55년 전 일본인 보판일수라는 사람이 양잠을 한 장소라고 하여 농장이라 이름하여 왔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 송급
    •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주민을 괴롭힘으로 전주민이 밤을 틈타 왜구들의 본거지를 급습하여 창과 낫 등으로 왜선을 격침하였으나 한 여인의 남편이 행방불명되어 애타게 기다리다가 고개마루에서 죽었다고 하여 松라고 한다.
  • 매봉산
    • 천지개벽 당시 매가 앉을 장소만 남고 물에 잠겨있었다고 하여 매봉산이라 전한다.
  • 갈 밭
    • 칡넝쿨이 많이 우거져 있다고 하여 갈밭이라고 전한다
  • 용 소
    • 옛날에 용이 있었다고 하여 낙동강을 왕래하는 배가 이 곳을 지날 때 마음의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들여야 사고가 없고 만약 불결한 정성이 있으면 용이 방해하여 침몰한다고 한다.

도고산(348m) 일맥이 무시고개를 거쳐 선남면 소재지의 동북 오도천에 머물고 그 兩端水 동편에서 서향한 고촌이다. 서기 685년 이후 오도지방으로서 일리군에 속했고 서기 757년 성주군에 속했고 서기 1895년 오도지면이 됐고 서기 1914년 남곡면과 오산면이 합면되어 선남면으로 되어 오도의 긴 역사를 안고 있다. 서기 1560년 이 마을에 공곡서당을 세웠는데 이는 당시의 목사 황준량이 권응정, 응창 형제와 함께 남긴 공적인데 임진왜란때 아깝게 다 불타고 한강 정구의 도움으로 다시 정사를 지어 고성인 야노당 李淳이 서재로 썼다. 그 뒤 공곡서당은 완폐되어 200년 후인 1875년에 고성인 이순흠, 이두연이 사림과 논의하여 대가면 칠봉리에 이설했다. 마을 동남 2㎞ 거리의 왕산(196m)은 고려태조의 戰勝地로 깊은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 해동촌(蟹洞, 蟹洞村)
    • 오도말 동북 1㎞ 도고산 남쪽 3㎞ 거리의 세천과 산협에 둘러싸인 서남향한 마을이다. 옛날 오도방의 안방마을로 특수한 자연환경으로 터잡힌 마을이다. 마을 동쪽 표고 100m의 낮은 언덕고대를 무시고개라 하고 용신리 오리골로 통로가 있다. 남으로는 착골, 이압실, 오도말의 길이 뚫려있고 서쪽으로는 종산, 대방으로 나가는 길이 있다. 이렇게 산간마을이면서도 사통팔달의 산간요충지대의 특징은 게(蟹)의 발과 같아 해동이라 했고 이런 지리적 환경은 고려건국초 후백제의 견훤의 아들 신검이 부왕을 호군하며 927년 신라의 왕도를 침범하고 돌아가는 길에 京山府의 領屬한 지산면의 들판 볏더미에 불을 지르고 이듬해는 다시 그곳의 벼를 노략질해 가는 등 낯익은 길이였는데 그가 935년 아버지 견훤을 다시 금산사에 유폐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후 이미 고려땅이 된 칠곡 岐山面까지 쳐내려 왔으나 고려태조 왕 건군과 맞섰는데 왕건은 낙동강 동쪽에 진을 치고 대비하다가 이곳 성주대교 주변 일대에서 접전이 이루어져 마침내 왕산(196m)과 해동촌 부근의 요충지를 이용해 신검의 대군은 전멸하였다. 신검은 간신히 도망쳐서 황산에서 항복하여 후백제 최후의 운명을 결정한 역사깊은 유적지이다. 3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다.

1560년 이원만이라는 선비가 마을에 입향하여 광령이라 칭하였으며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광령동과 동안동, 마안동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도인들이 많다하여 도성리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 광영(광령)
    • 광령은 성주, 대구, 용암방면 국도의 세 갈래 길의 북쪽 300m의구릉인 표고 40m의 서남향한 마을이다. 약 3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420년전에 이원변 선비가 임지왜란 때에 못안에서 피난하였다 하여 호인 광령당을 따서 광령지라고 하고 그후 마을을 조성하였다 하여 광령이라 칭하였다 한다.
  • 중리
    • 중리는 마안골 서편에 가까이 있는 마을이고 마을 뒤의 표고 120m로 말티고개를 등지고 서남으로 1km거리로 못뚝마을(지원)과 이웃하고 있다. 마을 남쪽은 표고 75m의 나즈막한 산봉이 있다. 약 2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250년 전에 마을을 조성하면서 마을산 중간지점에 위치하여 중리라고 칭하여 왔다고 한다. 도성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이다.
  • 못 둑(지원)
    • 지원은 선남면 소재지 동남 1.7km거리의 l30번 국도를 접해서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남쪽에는 명인여자중.상업고등학교가 있다. 약 3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100년 전에 소유지 뚝에 박일출 선비가 명산지라 하여 마을을 개척하고 못뚝에 있다 하여 지원이라 이름하여 왔다고 한다.
  • 소꼴(속골)
    • 중리마을 앞산에 초원이 풍부하여 목동이 소를 먹이러 많이 갔다하여 소꼴이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지금은 잡목이 우거져 있다.
  • 감나무골
    • 마을의 서남쪽에 위치한 큰 밭에 감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감나무골이라 하고 지금도 그 주변의 산 및 밭뚝에 산감나무가 많이 산재하여 있다.
  • 가라골
    • 산 계곡의 형태가 가락과 같이 희다고 하여 가라골이라 하며 지금도 개간된 논이 층층을 이루고 있어 산골 농촌의 풍치를 간직하고 있다.
  • 배나무정
    • 오랜 배나무가 정자를 이루고 있다 하여 배나무정이라 하고 인근의 유현의 놀이터로 활용하고 있다 한다.
  • 한산재
    • 밀양 박씨 집회장소로 쓰이고 있다
  • 삼효각
    • 마안골 남쪽에 있는 박안연, 박 귀, 박광인의 세 효자 정문
  • 효자박구려문
    • 못뚝 서쪽에 있는 효자 박구의 정려문이다.
  • 열여유씨여문
    • 광령 서북쪽에 있는 이선의 아내 유씨의 열부정려문이다

박명호란 선비가 약 300년 전에 마을에 入鄕하여 신불이라 이름하였고 그후 배춘길이라는 선비가 금계라 개칭하여 조선시대말엽에는 초곡방에 속하였다가 1989년 행정구역 개편때 선남면에 소속되었다.

  • 금은계(金溪)
    • 옛날 초곡방의 본거지인 새실마을 동남쪽 약 800m거리에 사방을 산으로 감싸 두르고 동남향한 산촌이다. 마을안에는 東萊人 鄭善國을 享祀하는 聽松齊가 있다. 약 6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박명호라는 선비가 약 360년전 마을에 入鄕할 때 극심한 가뭄으로 매년 흉년이 들어 풍년을 기원하는 뜻에서 신풍이라 하였고 약 250년전 배춘길이라는 선비가 마을 앞 계곡에서 금이 많이 났다고하여 금계라 개칭하였다.
  • 선 무(仙舞洞)
    • 금계마을 동쪽 500m거리에 위치한 마을이며 동쪽 1㎞거리에 회목으로 넘어가는 두리티재가 있고 그 넘어 용암면 소재지로 이어지는 도로가 있다. 북쪽으로 약 600m거리에 있는 새실마을과 아웃하는 마을이다. 약 2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200년전에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고 갔다하여 개척당시 谷名을 선무곡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 솔 개(松浦)
    • 걸바대 마을 북쪽 300m쯤 거리의 낮은 언덕을 깔고 남향한 마을이다. 새실, 걸바대와 함께 고대 초곡방 요지의 마을이다. 약 26가구에 138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이성우란 학자가 약 370년전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송림이 무성하여 송포라 칭하였다고 한다.
  • 걸바대(文海, 渠坪, 文明洞)
    • 새실마을 동북 약 500m에 초곡천과 평야를 접하여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서북으로는 성산(389m)에서 내뻗은 산자락이 마을을 감싸고 북쪽은 솔개와 근접하고 있다. 걸바대는 걸(渠 ; 시내), 바대(坪 ; 들)의 고어의 복합어로 들과 냇물이 산세에 조화된 아름다운 경관을 갖춤을 표현하고 있다. 33가구에 178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 새 실(草谷)
    • 초곡은 선남면의 서남부의 초곡천의 종간지점에서 마을 북쪽으로 여유있는 들판을 건너 성주로 향하는 도로는 별티를 거쳐 성주읍과의 7㎞의 거리를 하고 있다. 남으로는 두리티 넘어 용암면 소재지와 도로가 이어지고 동북으로는 선남면 소재지로 래왕하는 도로가 있다. 통일신라 이후 유서, 명포, 장학과 용암면 중거리의 중앙행정의 중심마을로 초곡방의 자리다. 새실마을은 고대 성주의 중요한 지방으로 역사와 유래가 깊은 곳이다.

칠봉산(516m)에서 원출한 초곡천이 12km 동류하여 선남면 소재지 남쪽에서 백천과 합류하는 곳의 남향한 마을이다. 마을 안에 봉암이란 신당의 단석이 있고 이 바위의 서편을 서촌, 동편을 동촌이라고 구분한다. 지금도 마을이름의 유래를 잘 모르고 편의에 따라 나누어 부르고 있다. 군내 도처에 신당마을이 있고 그와 같은 발음의 신촌등을 많이 볼 수 있다. 1642년 이달운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신당이라 하였으며 그후 마을이 번영하여 동촌, 봉암, 서촌으로 분동하였으며 조선시대에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에 봉암동, 동천동, 서촌동, 유촌동의 각 일부를 합병하여 마을을 만들고, 동촌의 동자와 봉암의 암자를 합하여 동암이라 하고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 동촌
    • 동촌은 봉암동쪽에 있고 약 5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약 500년 전에는 장씨, 윤씨 가족들이 마을 뒷산 중턱에서 살았다고 전하나 흔적도 없고, 그가 불어나면서 동촌, 봉암, 서촌으로 분동하였다. 마을의 위치가 동편에 있다고 동촌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봉암
    • 봉암은 약 40여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신당의 중간마을이다. 바위가 마을 한가운데 있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봉바우라고 하고 마을도 역시 봉암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 서촌
    • 1642년 이달운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신당이라 하였고 그후 마을이 번영하여 분동하였다. 그 위치가 마을의 서편에 있다고 하여 서촌이라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 산남방에 속하였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성주군 선남면에 속하게 되었다. 서촌은 약 7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며 봉암서편의 마을이다.
  • 매산
    • 암석이 매화꽃과 같은 무늬 한 조각이 많이 산재해 있다고 하여 매화산 또는 매산이라고 한다.
  • 慕암제
    • 성산 이씨의 집회장소로 쓰이는 곳이다.
  • 용두산
    • 산맥이 용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용두산이라 하고 마을 주민들이 한발이 계속되면 기우제를 모시는 장소이기도 하다. 용두에 청주 정씨가 묘를 설치하고 묘사에는 반드시 살아있는 잉어를 재물로 삼고 제가 끝난 후에는 앞 냇물에 넣는다고 한다.

별티에서 두리티로 이어지는 성주 - 용암 도로의 초곡면 서쪽 상류 1㎞거리의 계곡을 사이로 양지, 음지로 구분하는 반경 1㎞의 대촌이다. 약 3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각 성부락인 이 마을은 산수가 맑고 조용한 산촌이다.

  • 은 점(銀洞)
    • 선남면의 최서단의 마을이며 초곡 서쪽으로 용암면의 중거리와 경계하고 있으며 5∼6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한촌이다.
  • 장골(壯谷, 壯洞)
    • 성주에서 별티를 넘어 새실마을과 두리티를 넘어 용암으로 나드는 초곡천의 교차지이다. 남향한 이 마을은 여유있는 들판과 물길이 넉넉하여 생활환경이 좋은 곳이다. 강릉유씨의 약 10여 호의 가호로 이루어진 마을이고 남쪽의 성주골 마을은 이농으로 인해 한 두 가호만 남아있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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