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륜면의 총면적은 89.72㎢이다. 그 대부분은 산지이고 경지면적은 약 18% 정도이다. 그 연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수륜면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白雲洞·新坡洞·赤松洞·鳳陽洞이 靑坡坊으로, 新亭洞·水成洞·松溪洞이 大理坊으로, 修倫洞·午川洞·溪亭洞이 志士面으로, 南隱洞·甫月洞·鵲隱洞이 法山面으로 각기 구성되어 있었다. 그 후 1914년 4월 1일 靑坡坊·大理坊을 靑坡面으로, 志士面·法山面을 志士面으로 합하여 2개 면을 두었다가 1934년 修倫面으로 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6년 7월 20일 丙子年 大洪水로 면사무소를 수륜동에서 현재의 신파동으로 이전하였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령군 덕곡면 聖洞이 편입되어 본 면 지역이 다소 확장되어 현재 법정 14개리, 행정 25개리, 1,500여세대의 인구는 3,900여명이다. 1988년 조례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所件坊에 속하였던 白雲里는 星州郡의 서남단(북위35°46′10″)과 伽倻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경남 합천군 가야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해인사 방향의 997번 地方道와 접해 있다. 학발, 가라골, 우수동, 북두림, 신촌, 솔티, 진등, 중기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34년에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때 修倫面 白雲里라 하였다.
修倫面의 면소재지가 위치한 지역으로서 면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서쪽으로 트인 교통은 주민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가야산의 구릉에 위치한 조양리, 중리, 천방마을이 있다. 원래의 신당마을에 修倫洞 德村마을 동편의 만지마을에 위치한 面廳舍가 1936년의 홍수로 인해 폐몰되자 만지마을(市場)이 이설해서 도로변을 만지로로 이른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이래 所件坊에 속했다. 1845년 靑坡坊이 되었던 이곳에는 고려말의 星州人 陶隱 李崇仁(1349∼1392)이 世居하였다.
이곳에는 판돌걸(지석묘의 널찍한 돌이 있는 거리), 톳재비들(옛날 土亭이 있었다는 천방리 마을 앞 들), 삐끔징이(옛날 패구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밤징이(옛날 밤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蔓旨장터(수륜시장터), 수리개울(신당마을 옆의 細川) 등이 전해지고 있다.
修倫面 소재지의 동편과 동남부의 대가천변의 비옥한 평야와 까치산(鵲山 : 572m)의 남쪽으로하여 長江을 접하여 背山臨水의 전형적 촌락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이래 只士牙坊에 속하였던 이곳은 1895년에 志士面, 1934년에 修倫面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1936년 홍수로 인해 德村마을 동쪽의 面所가 위치한 蔓旨가 수몰되어 면소를 新坡里로 옮기게 되었다.
修倫面 소재지의 남쪽으로 33번 국도의 서편 산줄기를 따라 달리들을 두고 개차, 당계울, 달리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통일신라이래 所件坊에 속하였던 이곳은 수륜면 소재지의 서편으로 가야산의 구릉과 늘붓고개 남쪽에서 33번 국도와 979번 지방도를 접한 완만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적송리 마을과 오인동, 학동, 분통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수륜면 소재지에서 성주읍 방향 1km거리의 느릅(늘붓:楡)고개의 도로를 ’느릅티’라고 부른다.
修倫面 소재지에서 高靈 방향의 33번 국도를 접해 4km 거리의 평야와 大伽川을 사이로 두고 터를 잡고 있다. 냇물 서편의 마산, 부미마을과 동편의 지심과 사창마을로 구분된다.
통일신라 神文王 5년(685) 一利郡의 狄山縣(뒷뫼현)에 속하였고, 757년 星山郡의 都山縣(뒷뫼현)의 只士牙坊의 본거지(지시미마을)였다.
1845년에 志士坊이 되고 1895년 5월에 志士面이 되면서 午川洞으로 洞이 편제되었다. 1934년 靑坡面과 합해져 修倫面이 되면서 면의 중심지가 修倫里로 옮겨가게 되었다.
伽倻山 정동쪽의 광대한 山谷 및 그 구릉과 계곡을 차지하면서 서북쪽으로 伽泉面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 가야산 山峰을 포함하고 있다. 봉양리 서편의 가야산의 광범위한 골짜기인 太平洞은 가야산의 4絶의 하나이다. 가야산의 4絶은 東으로 太平洞, 南으로 白雲里의 龍起谷, 西로는 치인리의 海印寺, 北으로 伽泉의 馬水里이다.
이곳은 통일신라이래 所件(배야건)坊의 중심지이다. 1845년(憲宗 11)에 목사 김영이 靑坡坊으로 坊名을 고쳤다. 이때 所件(배야건)은 鳳陽으로 되었다.
修倫面 所在地 북쪽으로 星州 방향의 국도 2km 거리의 지방도의 갈림길 부분과 동쪽으로는 까치산(鵲山 572m)에 이르는 곳으로서 새별, 샛덤, 양정, 임천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757년(신라 景德王 16)에 一利郡이 星山郡으로 되었을 때 이곳은 大里坊의 본거지가 되었다. 1895년(高宗 32)에 大里面이 되어 新亭, 水成, 松溪洞이 編制 소속되었다.
이전의 坊의 중심이 林泉의 里城터에서 양정마을로 옮겨져 面所가 되었다. 그후 1914년에 靑坡面에 합해진 후 1934년 修倫面에 編制되었다.
고령-성주간 접경지점인 大伽川 동편에 마을이 터를 잡고 있다. 마을 앞에 대가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三隱의 이름을 따서 南隱이라고 하였다. 옛부터 省法山坊의 중심지로서, 法山과 그 동쪽 별뫼를 사이로 가락내( 川·鵲川), 南倉, 江亭의 마을이 펼쳐져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지사면 남은동으로 존재했으나 1934년 4월 1일 수륜면 남은리로 개편되었다.
修倫面과 伽泉面 경계의 국도와 大伽川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硯坎山(갖모봉:466m)이 솟아있고 동쪽으로는 갓말마을에 이르는 面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이래 大里坊에 속해 있었다. 1895년 水成洞으로 편제되었다.
修倫面의 동남부 大伽川의 서편에 위치하면서 高靈郡 德谷面과 접해 있다. 溪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部落과 沃土를 끼고 있고, 川邊에 나무가 무성하여 亭子나무처럼 둘러있기 때문에 溪亭이라 하였다.
옛날부터 只士牙坊에 속해 있었던 이곳은 1895년 志士面의 溪亭洞으로 편제되었다. 현재 계정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다. 1리는 농가호수가 52호로서 수도작을 주작목으로 하고 있으나 점차 시설원예 쪽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2리 역시 전가구수 77호중 농가호수가 70호로서 주로 시설원예 등을 하고 있다.
甫洞과 月村 마을의 이름을 따서 甫月로 불리워지는 이곳은 까치산에서 흐르는 계곡이 대가천에 합류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별뫼(星山;230m)와 달뫼(月山;200) 주변과 그 북쪽에 위치하면서 탑안, 새터, 기만, 월촌, 아래맏찔, 웃맏찔로 구성되어 있다.
省法山坊에 속했던 이곳은 옛날 교통이 근대화되기 전에는 맏찔마을을 거쳐 七嶺고개를 넘어 대구방면으로 통하던 길목이었으나 山間地로서 지금은 잡목으로 뒤덮혀 버렸다.
修倫面의 북단에서 997번 지방도가 호령고개를 통하는 남쪽으로 明溪川 山谷을 차지하는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이래 大里坊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修倫, 陜川, 居昌地方에서 호령고개 (표고 250m)로 통하는 옛길목으로서 {京山志}와 {大東輿地圖}에서도 要路로서 언급되어 있다.
修倫의 東部山岳 까치산(鵲山;571m)의 동편 약 10km의 좁고 긴 峽谷에 들어앉은 거뫼, 덕골, 모방골, 삼거리, 개티, 배티의 마을로 되어 있다. 거뫼는 해발 600m의 고원부락이며, 다른 마을은 산간에 의지해 자리잡고 있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