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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기슭에 자리잡은 수륜면의 총면적은 89.72㎢이다. 그 대부분은 산지이고 경지면적은 약 18% 정도이다. 그 연혁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수륜면의 행정구역은 현재의 白雲洞·新坡洞·赤松洞·鳳陽洞이 靑坡坊으로, 新亭洞·水成洞·松溪洞이 大理坊으로, 修倫洞·午川洞·溪亭洞이 志士面으로, 南隱洞·甫月洞·鵲隱洞이 法山面으로 각기 구성되어 있었다. 그 후 1914년 4월 1일 靑坡坊·大理坊을 靑坡面으로, 志士面·法山面을 志士面으로 합하여 2개 면을 두었다가 1934년 修倫面으로 합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36년 7월 20일 丙子年 大洪水로 면사무소를 수륜동에서 현재의 신파동으로 이전하였다.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령군 덕곡면 聖洞이 편입되어 본 면 지역이 다소 확장되어 현재 법정 14개리, 행정 25개리, 1,500여세대의 인구는 3,900여명이다. 1988년 조례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所件坊에 속하였던 白雲里는 星州郡의 서남단(북위35°46′10″)과 伽倻山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서쪽으로 경남 합천군 가야면과 경계를 이루면서 해인사 방향의 997번 地方道와 접해 있다. 학발, 가라골, 우수동, 북두림, 신촌, 솔티, 진등, 중기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34년에 있었던 행정구역 개편 때 修倫面 白雲里라 하였다.

  • 학발·학족(鶴足)
    • 지형이 鶴의 발(足)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학발, 혹은 鶴足이라고 부르는 이곳은 임진왜란 때인 1608년경에 全州人 李枯聖이 합천군 야로면 덕암리에서 이주하여 마을을 처음으로 형성하였다. 李喆宇, 南溪 李養中(1851년생)이 世居하였다. 지금은 이촌의 현상으로 인해 약 30명이 살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 보다는 노인층이 태반이다. 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생업으로 하고 있다.
  • 가라골[楸洞]
    • 1670년경 陳昌佑가 합천군 봉산면 산현리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조성하였다. 가래나무를 베어 버리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하여 가라골이라고 한다.
  • 새터·우수동(牛首洞)
    • 약 140년전에 이룩된 마을로서,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새터라고 불려졌다. 또 지형이 소의 머리와 비슷하다고 하여 지금은 牛首洞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샘을 파면 마을에 액운이 생긴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까지 한군데도 우물을 파지 않고 냇물을 마시고 있다.
  • 중 기(中基)
    • 조선 선조 때 咸安 趙氏와 金寧 金氏 등이 정감록을 신봉하고 임진왜란을 피할 땅을 찾아 가야산 남쪽인 이곳에 정착하였다. 이곳이 이 고장의 중앙이라고 하여 中基라고 일컬었다. 현재 마을 주민의 대부분이 논농사와 밭농사를 하고 있다. 그러나 가야산 국립공원의 개발에 따른 향락적 숙식시설이 속속 들어서고 있는 실정이다.
  • 신 촌(新村)
    • 조선조 崔氏라는 선비가 中基보다 뒤에 마을이 생겼다고하여 新村이라고 칭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의 앞 개울에는 가야산 용기골의 맑은 물이 흐르고, 뒤로는 가야산 정상이 보인다. 토종 양봉을 부업으로 하고 있다.
  • 솔 티(松峴)
    • 조선 영조 때 배씨라는 선비가 中基에서 소나무가 우거진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라고하여 솔티라고 칭하였다. 이 마을의 앞산은 경남 합천군과 경계지이다.
  • 북두림(北斗林)
    • 조선조 영조 때 이곳에 마을터를 잡고 북쪽에 우거진 숲속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北斗林이라고 칭하였다. 해발 600m에 위치한 이 마을은 산간오지 마을이다.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가 생산되며, 해인사와 가야로 통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어 가야산 개발에 따른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다. 마을 주민은 15명 정도로서 농업에 주로 종사하고 있다.
  • 밤 티[栗峴]
    • 백운리 입구에 위치한 마을로서 옛날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밤티라고 전해진다. 가야산 국립공원 개발지역으로서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진 등[長嶝]
    • 백운리 중기 마을 법수사 옛터에서 1km 떨어진 지점으로서 고령군 덕곡면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지형이 40도 이상 경사가 진 긴 등으로 되어 있어 진등이라고 부른다.

修倫面의 면소재지가 위치한 지역으로서 면의 중심부에 해당한다. 서쪽으로 트인 교통은 주민생활의 중심이 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가야산의 구릉에 위치한 조양리, 중리, 천방마을이 있다. 원래의 신당마을에 修倫洞 德村마을 동편의 만지마을에 위치한 面廳舍가 1936년의 홍수로 인해 폐몰되자 만지마을(市場)이 이설해서 도로변을 만지로로 이른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이래 所件坊에 속했다. 1845년 靑坡坊이 되었던 이곳에는 고려말의 星州人 陶隱 李崇仁(1349∼1392)이 世居하였다.

이곳에는 판돌걸(지석묘의 널찍한 돌이 있는 거리), 톳재비들(옛날 土亭이 있었다는 천방리 마을 앞 들), 삐끔징이(옛날 패구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밤징이(옛날 밤나무 정자가 있었다는 들), 蔓旨장터(수륜시장터), 수리개울(신당마을 옆의 細川) 등이 전해지고 있다.

  • 신당(新塘)·신파(新坡)
    • 조선 선조 때 全州李氏가 이곳에 입향하였다. 蓮塘池가 있는 곳이라고하여 新塘이라고 칭하였다. 1936년의 병자년의 대홍수로 인해 修倫洞에 위치한 면소재지가 이곳으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곳은 全州人 李承(1522∼1593)과 그의 아들 心遠堂 李堉 등의 文名과 忠孝의 자취가 남아 있다.
  • 천방리(千方里)
    • 이곳은 고려시대부터 이름난 名醫가 대를 이어 살아 중국 唐나라의 醫書 ’千金醫方’을 비유하여 千方里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는 조선 정조 무렵 김경규의 선조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는데, 지질이 좋고 산세도 좋아 큰 마을을 이루어 살 것 같다고하여 千方里라고 칭하였다고도 한다.
  • 조양리(朝陽里)
    • 이 마을은 지대가 높아서 아침 해가 일찍 뜨고 양지가 바른 곳이라고하여 조양리라고 하였다. 安東人 金炳과 그 손자 金鍊周의 世居地로서 그 후손이 살고 있다. 또 조선조 憲宗 15년에 礪山人 宋柱漢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世傳해 살고 있다.
  • 중밑·본리(本里)
    • 가야산 국립공원 백운리 진입로 입구에 위치한 이곳은 고려 말엽에 이루어졌다고 전해진다. 길 밑에 마을이 위치해 있다고하여 중밑이라고 칭한다.

修倫面 소재지의 동편과 동남부의 대가천변의 비옥한 평야와 까치산(鵲山 : 572m)의 남쪽으로하여 長江을 접하여 背山臨水의 전형적 촌락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통일신라이래 只士牙坊에 속하였던 이곳은 1895년에 志士面, 1934년에 修倫面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후 1936년 홍수로 인해 德村마을 동쪽의 面所가 위치한 蔓旨가 수몰되어 면소를 新坡里로 옮기게 되었다.

  • 윤동(倫洞)·수륜동(修倫洞)·죽백촌(竹栢村)
    • 修倫里의 大村인 倫洞은 고려 때는 長洞, 고려말에는 竹栢村이라 했고, 조선 중기에는 垂綸洞, 1500년대에는 修倫洞이라고 했다. 竹栢村은 대나무와 잣나무가 많은 마을이라는 뜻이고, 修倫洞은 人倫을 닦은 마을이라는 뜻이다. 또 조선 中宗 때 義城人 金關石이 입향해 그 후손이 集姓해 살고 있다.
  • 새말(新村)·도용곡(道龍谷)
    • 골짜기 모양이 龍이 기어가는 모습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을 道龍谷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하여 새말이라고도 부른다.
  • 서원골(書院谷)
    • 조선 中宗 때 金關石의 德泉書院을 이곳에 세웠다. 그후 서원이 폐해지고 마을이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인해 서원이 있었던 골짜기 마을이라고 하여 서원골이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 토 실(土谷)
    • 가야산 東脈의 정동쪽 까치산(572m) 아래 大伽川을 서편에 낀 곳에 위치한 이 마을은 倫洞 朴·金 양 성씨의 原鄕이다. 산이 높고 계곡이 깊으며 토질이 비옥하다고하여 토실이라고 불렀다. 조선 仁祖 때 김윤의가 입향한 마을이다. 밀양인 展力副尉 朴德純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 덕 촌(德村)
    • 조선 英祖 때 德亭 박종서가 덕봉서원을 건립하고 마을이름을 德村이라고 칭하였다.
  • 후생촌(厚生村)·성기촌(成基村)
    • 1949년 李成基 면장이 난민을 위해 조성한 마을로서 당시의 면장의 이름을 따서 成基村이라 하고 일명 厚生村이라고 하였다.

修倫面 소재지의 남쪽으로 33번 국도의 서편 산줄기를 따라 달리들을 두고 개차, 당계울, 달리 등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 계차(溪且)·포상(浦上)
    • 조선 英祖 때 조성되었으며, 당시 마을 모양이 갯가에 떠있는 배의 형상과 같다하여 浦上이라고 불렀다. 근래에 와서 마을 앞에 개울이 흐르고 있다고하여 마을 이름을 溪且라고 고쳤다.
  • 달리·월평(月坪)
    • 조선 선조때 朴氏라는 사람이 이룩한 마을이다. 당시에 마을 옆 土山에 달이 비칠 때 마을 모양이 토끼가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하여 月坪이라고 불러오다가 지금은 達里라고 부른다.
  • 땅개울(塘溪里)
    • 이 마을의 앞길에 못이 있고, 동네 옆으로 맑은 개울이 흐른다고하여 땅개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원래는 고령군 덕곡면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지리적, 행정적 불편으로 인해 행정구역이 변경되어 성주군 수륜면으로 편입된 마을이다.

통일신라이래 所件坊에 속하였던 이곳은 수륜면 소재지의 서편으로 가야산의 구릉과 늘붓고개 남쪽에서 33번 국도와 979번 지방도를 접한 완만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적송리 마을과 오인동, 학동, 분통골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수륜면 소재지에서 성주읍 방향 1km거리의 느릅(늘붓:楡)고개의 도로를 ’느릅티’라고 부른다.

  • 적송리(赤松里)
    • 고려시대에 장대왕이라는 사람이 海印寺의 주락전을 짓고 동쪽으로 가다가 이곳에서 하루를 묵을 때 赤松이 많은 것을 보고 이 마을의 이름을 赤松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적송리마을 뒤쪽의 계곡마을을 ’땅개울’이라고 부른다
  • 새주막(新酒幕)
    • 1776년경부터 이 동네 앞으로 海印寺로 가는 길이 생겼는데 인가가 없고 깊은 산골이라서 쉬어 갈만한 곳이 없이 불편하였다. 이때 해인사를 자주 드나들던 金氏라는 사람이 주막을 차리면서 하나 둘 인가가 생겨나게 되어 이곳을 새주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 학 동(鶴洞)
    • 조선 太宗 때 조성된 마을이다. 마을 뒷산의 우거진 송림 속에서 봄이면 학들이 모여 새끼를 치고 번성하였기 때문에 이 마을의 이름을 학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오인동(五印洞)
    • 고려말에 藝文館提學을 지낸 문충공 陶隱 李崇仁의 다섯 아들 李次若·李次參 등이 이 마을을 이루고 효성과 우의를 다졌다. 이곳 뒷산에 五印齋를 건립하고 다섯 형제가 五印岩에서 놀았다고 한다. 五印岩은 현재 마을의 洞祭터이다. 이 오인암과 오인재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이름을 五印洞이라고 하였다.

修倫面 소재지에서 高靈 방향의 33번 국도를 접해 4km 거리의 평야와 大伽川을 사이로 두고 터를 잡고 있다. 냇물 서편의 마산, 부미마을과 동편의 지심과 사창마을로 구분된다.

통일신라 神文王 5년(685) 一利郡의 狄山縣(뒷뫼현)에 속하였고, 757년 星山郡의 都山縣(뒷뫼현)의 只士牙坊의 본거지(지시미마을)였다.

1845년에 志士坊이 되고 1895년 5월에 志士面이 되면서 午川洞으로 洞이 편제되었다. 1934년 靑坡面과 합해져 修倫面이 되면서 면의 중심지가 修倫里로 옮겨가게 되었다.

  • 마산(馬山)·오산(午山)
    • 려말선초에 星州로 내려온 順天人 朴可權의 셋째 아들이 정착하여 이 마을을 이룩하여 世傳하고 있 다. 이 마을 산의 모양이 말과 같이 생겼다고하여 馬山이라고 불렀다. 일명 午山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조 成宗 때 海平人 止止堂 金孟性이 여생을 저술로 보낸 곳이다.
  • 부미(鳧山)·부산(鳧山)
    • 마을 뒷산이 오리 모양과 같다고하여 부미·부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는 金寧金氏와 漆原諸氏, 金海金氏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 지심·지천(芝泉)
    • 마을 옆 산 모퉁이에 말코 모양의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에 이어 제방이 길게 뻗쳐져 있는데, 그 모양이 말 고삐 같으며, 이 바위 뒤로 이어 있는 뒷산은 말의 몸통같이 보인다. 이런 모양의 전체를 한 눈에 보면 말이 풀을 뜯는 형상이라고 하여 지심(잡초)이라고 불렀다. 또 일설에 의하면 마을의 샘 곁에 큰 버섯이 많이 나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지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 사 창(社倉)
    • 조선 宣祖 때 義倉이 있었던 자리라고하여 社倉이라고 하였다. 南平文氏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다. 그러나 남평문씨의 대부분은 금릉군 지례로 이주하고 지금은 倫洞에 入鄕한 順天人 朴可權의 후손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다. 또 선조 때 淸風人 金浚이 忠州에서 入鄕해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伽倻山 정동쪽의 광대한 山谷 및 그 구릉과 계곡을 차지하면서 서북쪽으로 伽泉面을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 가야산 山峰을 포함하고 있다. 봉양리 서편의 가야산의 광범위한 골짜기인 太平洞은 가야산의 4絶의 하나이다. 가야산의 4絶은 東으로 太平洞, 南으로 白雲里의 龍起谷, 西로는 치인리의 海印寺, 北으로 伽泉의 馬水里이다.

이곳은 통일신라이래 所件(배야건)坊의 중심지이다. 1845년(憲宗 11)에 목사 김영이 靑坡坊으로 坊名을 고쳤다. 이때 所件(배야건)은 鳳陽으로 되었다.

  • 새묵·새목[鳳項]
    • 名士 裵德龜의 世居地인 새목마을은 조선중엽 무렵 晋州人 姜文煥이 入鄕해서 그 후손이 살고 있다. 그 당시 이곳에 들러 큰 바위에서 잠시 낮잠을 자다가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큰 새소리에 깜짝 놀라 깨어보니 뒷산의 생김새가 새의 목과 같아서 새목이라 하고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 안계(安溪)·개울선불[溪仙佛]
    • 1715년경에 이 마을이 처음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마을 옆에 편안히 누울 수 있는 큰 바위가 있어 安溪라고 하였다. 그후 마을 옆에 개울이 흐르고 뒤에 절터가 있었던 마을이라고하여 개울선불이라고 칭했다.
  • 먹 들[黑坪]
    • 1880년 경 諸氏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다. 그때 집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헤치자 검은 암석이 나오므로 자리를 옮겨 팠으나 검은 돌이 계속 나왔다. 그래서 마을이 길게 늘어지게 되어 먹들이라고 칭했다.
  • 상선불(上仙佛)
    • 조선 正祖 때 星州都氏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다. 당초 이름은 磻溪라 하였다. 성주 도씨와 선불사와의 갈등이 생겨 선불사의 큰 절인 용기사 주지에게 그 사실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용기사 주지가 마을 앞 큰 바위를 깨면 마을이 번창하고 자손이 잘될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말을 따라 그 바위를 깨뜨리니 바위에서 피가 나고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고 한다. 그후 도씨문중과 선불사는 망하였다. 현재는 여러 각성받이들이 15호를 이루고 있다. 번계마을이 망한 후에 지명을 상선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배양골(栢陽谷)
    • 조선 正祖 때 星州都氏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다. 당초 이름은 磻溪라 하였다. 성주 도씨와 선불사와의 갈등이 생겨 선불사의 큰 절인 용기사 주지에게 그 사실을 고하게 되었다. 이에 용기사 주지가 마을 앞 큰 바위를 깨면 마을이 번창하고 자손이 잘될 것이라고 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그 말을 따라 그 바위를 깨뜨리니 바위에서 피가 나고 하늘에서 번개가 쳤다고 한다. 그후 도씨문중과 선불사는 망하였다. 현재는 여러 각성받이들이 15호를 이루고 있다. 번계마을이 망한 후에 지명을 상선불로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큰밭골[大田谷]
    • 조선 正祖 때 어떤 선비가 이곳에 있었던 절에 머물고 있었다. 절안에 이가 너무 많아 하는 수 없이 불태우고 그 터를 밭으로 개간하여 큰밭골이라고 칭하였다. 지금은 가야 목장으로 개간되어 있다.

修倫面 所在地 북쪽으로 星州 방향의 국도 2km 거리의 지방도의 갈림길 부분과 동쪽으로는 까치산(鵲山 572m)에 이르는 곳으로서 새별, 샛덤, 양정, 임천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757년(신라 景德王 16)에 一利郡이 星山郡으로 되었을 때 이곳은 大里坊의 본거지가 되었다. 1895년(高宗 32)에 大里面이 되어 新亭, 水成, 松溪洞이 編制 소속되었다.

이전의 坊의 중심이 林泉의 里城터에서 양정마을로 옮겨져 面所가 되었다. 그후 1914년에 靑坡面에 합해진 후 1934년 修倫面에 編制되었다.

  • 새별·신연·신현(新峴)
    • 新淵 宋師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다. 入鄕한 사람의 이름을 따서 마을의 이름을 新硯이라고 하였는데 와전되어 新峴으로도 부른다. 李文夏, 李宗浩 등의 星山李氏의 世傳마을이다.
  • 새터(新基)
    • 1947년 원평이라는 마을에서 南平文氏들이 이주하여 새로 이룩한 마을이라고하여 새터라고 하였다. 이 마을의 서쪽에 丹洞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폐동되었다고 한다.
  • 양정(陽亭)·양양촌(羊陽村)
    • 이곳에는 고려때부터 糧倉이 있었으므로 倉坪이라고 하였다. 조선초 염소를 길러서 羊場이라고도 했다. 또 조선 후기 양지바르고 정자가 있는 마을이라고하여 陽亭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 임천(林泉)
    • 조선 선조 때까지 李城터라는 마을로 전해오다가 1729년 裵鎭鴻이라는 사람이 마을 앞의 숲과 샘이 좋다고하여 林泉이라고 불렀다. 이 마을 북쪽에 점촌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현재는 폐동되었다.

고령-성주간 접경지점인 大伽川 동편에 마을이 터를 잡고 있다. 마을 앞에 대가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三隱의 이름을 따서 南隱이라고 하였다. 옛부터 省法山坊의 중심지로서, 法山과 그 동쪽 별뫼를 사이로 가락내( 川·鵲川), 南倉, 江亭의 마을이 펼쳐져 있다.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해 지사면 남은동으로 존재했으나 1934년 4월 1일 수륜면 남은리로 개편되었다.

  • 법 산(法山)
    • 이 마을의 뒷산은 옛날부터 숲이 우거져 있기로 유명하지만 호랑이와 같은 사나운 짐승들이 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뒷산의 형태가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맹수를 다스리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法山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永川崔氏의 집성마을로서, 현재 약 8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남 창(南倉)
    • 이곳에는 단종 폐위에 불복한 順天人 金嗣成이 벼슬을 던지고 漢城에서 낙향하여 정착함으로써 그 후손이 살게 되었다. 조선 英祖 32년(1756) 牧使 金致溫이 양곡창고를 지어 南倉이라고 하였다. 그후 창고는 없어졌지만 마을의 이름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현재 4가구만 살고 있다.
  • 강 정(江亭)
    • 이 마을은 수륜에서 고령으로 흐르는 大加川 가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 명종 때 竹軒 崔恒慶의 정자가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江亭이라는 마을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냇가에는 영천최씨의 선대를 위한 鰲岩亭이라는 낡은 정자가 그대로 남아 전하고 있다. 현재 3가구가 살고 있다.
  • 가락내·작천(川·鵲川)
    • 조선 成宗 때 조성된 마을로서 星州李氏 二樂堂 李重亨의 후손이 살고 있고, 또 밀양인 朴文彬의 후손 朴在榮의 세거지이고, 永川崔氏 竹軒 崔恒慶의 후손 月洲公의 후예들이 이거하여 三姓이 균형을 이루어 살고 있다. 마을 앞에 개천이 흐르고 옆산의 모양이 까치가 나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鵲川이라고 하였다. 또 시내가 흐르고 가락나무가 많은 마을이라 하여 川이라고도 불렀다.

修倫面과 伽泉面 경계의 국도와 大伽川을 접하고, 서쪽으로는 硯坎山(갖모봉:466m)이 솟아있고 동쪽으로는 갓말마을에 이르는 面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이래 大里坊에 속해 있었다. 1895년 水成洞으로 편제되었다.

  • 갓말·지촌[枝村]
    • 조선 선조 때 寒岡 鄭逑 先生이 이 마을 뒷산(창평산)에 선영을 쓰고 3년간 여막을 지키게 된 인연으로 해서 이곳에 안착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학문과 도덕을 닦으며 장여헌, 허미수와 같은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지명은 마치 본줄기에서 떨어져나온 작은 가지와, 같은 산 기슭 밑에 있는 마을이라고하여 枝村이라 하였다. 枝村을 이두로 칭하여 갓말(가지 끝에 자리하는 마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현재 淸州鄭氏 집성촌을 형성하고 한강선생으로부터 450여년간 이어오고 있다.
  • 가람·갈암(葛岩)·운라(雲羅)·운산(雲山)
    • 조선조 宣祖 때 宋氏라는 사람이 이곳에 入鄕하였다. 당시에 마을의 중앙에 큰 바위가 있고 이 바위의 주위에 칡넝쿨이 무성한 마을이라고하여 葛岩이라고 불렀다. 그후 발음이 변화하여 현재처럼 가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는 마을 앞 개천물이 비단같이 흘러내린다고하여 雲羅라 하기도 하고, 구름같이 떠오르는 모양의 마을이라고하여 雲山이라고도 한다.
  • 노루미기·장항(獐項)
    • 마을 북쪽 산의 생김새가 노루가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하여 마을 이름을 노루미기라고 하였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우물을 파면 노루가 빠진다고하여 우물을 파지 않고 냇물을 길어 먹고 있다.
  • 수국[水國·水局]
    • 조선 宣祖 때 조성된 마을로서 앞산의 형상이 배와 같다고하여 水國으로 당초 불렀다. 그러나 조정에서 나라 ’國’字를 지명으로 쓰지 못하게 하자 水局으로 고쳐 부르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새뜸·신창(新昌)
    • 1936년 병자년 대홍수로 인해 수국부락이 유실되자 그 주민의 일부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어 새뜸이라고 불렀다.

修倫面의 동남부 大伽川의 서편에 위치하면서 高靈郡 德谷面과 접해 있다. 溪川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部落과 沃土를 끼고 있고, 川邊에 나무가 무성하여 亭子나무처럼 둘러있기 때문에 溪亭이라 하였다.

옛날부터 只士牙坊에 속해 있었던 이곳은 1895년 志士面의 溪亭洞으로 편제되었다. 현재 계정 1리와 2리로 나뉘어져 있다. 1리는 농가호수가 52호로서 수도작을 주작목으로 하고 있으나 점차 시설원예 쪽으로도 눈을 돌리고 있다.

2리 역시 전가구수 77호중 농가호수가 70호로서 주로 시설원예 등을 하고 있다.

  • 묵은 터(舊溪), 유산(酉山)
    • 이미 마을 터가 있었던 곳에 이룩된 마을이라고 하여 묵은 터라고 하다. 또 마을 뒷산 모양이 닭이 앉아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하여 酉山이라고도 한다.
  • 새터, 닭목, 계산(鷄山), 계신(鷄新)
    • 묵은 터에 생긴 부락이라 하여, 새터 혹은 鷄新이라 하였다. 또 이 마을 뒷산이 닭과 닮았다고 하여 鷄山이라 하고, 이 마을의 입구가 닭목과 비슷하여 닭목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 중 마(鷄中)
    • 굿정(舊鷄) 마을과 鷄山 마을 사이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중마(鷄中)라 부른다. 350년전 東萊鄭氏가 이주하여 마을에 入鄕하였다. 현재 동래정씨 6 가구와 星山呂氏가 鷄山에서 이주하여 20여 가구를 이루고 있다.
  • 구 정(鳩亭)
    • 웃딩기마을과 連接한 南便에서 星州∼高靈간 國道邊의 老姑山城 기슭아래 東北을 向해 標高 100m에 자리한 마을이다. 옛날 80壽의 老人이 지팡이에 비둘기모양(鳩飾)을 하는 例에 따라 長壽를 追求하는 뜻의 鳩字와 楚辭의 名地인 汀州의 汀字를 취하여 鳩汀이라 했다가 日帝下에 행정구역 再編時 鳩汀으로 改稱되었다.
  • 올바다·올바대[條坪]
    • 淸風金氏가 마을에 入鄕하였다. 들에 올미가 많다고 하여 올바다라고 한다. 또한 못이 있었다고 하여 동명을 올바대(條坪)라고도 한다. 성주와 고령 국도면의 고령 기점 12km 지점의 도로변에 6 가구가 있다.
  • 웃딩기[元基]
    • 1600년경 두릉곡 杜氏와 星山李氏가 入鄕하였으며, 1700년경 사람들이 집단으로 와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뒷산이 닭이 우는 형상이라 하여 鳴鷄라는 마을이 있었으며 이 마을은 딩기 마을 위에 있다고 하여 웃딩기라고 칭하게 되었다.
  • 수진동(修珍洞)·후생촌(厚生村)
    • 1951년 修倫面 酉山 출신 朴魯珍이 난민을 위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 修倫面의 ’修’字와 朴魯珍의 ’珍’字를 따서 동네의 이름을 修珍洞이라 하였다. 일명 厚生村이라고도 한다.
  • 덕 은(德隱)
    • 현 굿정(鳩亭)과 德隱 마을에 德을 쌓은 선비가 많다고 하여 德隱이라고 하였다. 星山呂氏가 入鄕하였으나 현재 마을이 폐촌되어 성산여씨 한 가구만이 남아 있다.

甫洞과 月村 마을의 이름을 따서 甫月로 불리워지는 이곳은 까치산에서 흐르는 계곡이 대가천에 합류하는 부위를 중심으로 별뫼(星山;230m)와 달뫼(月山;200) 주변과 그 북쪽에 위치하면서 탑안, 새터, 기만, 월촌, 아래맏찔, 웃맏찔로 구성되어 있다.

省法山坊에 속했던 이곳은 옛날 교통이 근대화되기 전에는 맏찔마을을 거쳐 七嶺고개를 넘어 대구방면으로 통하던 길목이었으나 山間地로서 지금은 잡목으로 뒤덮혀 버렸다.

  • 탑안(塔內)·탑동(塔洞)
    • 이 마을에는 통일신라시대 때 세워진 높이 5.1m의 3층석탑(지방유형문화재 제119호)이 있다. 조선 영조 때 이광국이라는 사람이 이 마을 이름을 탑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탑안, 혹은 탑동이라고 하였다. 이곳에는 星州의 土姓인 星州人 李崇仁의 후손들이 世傳하는데, 현재 8 가구가 살면서 농업에 종사하고있다.
  • 새뜸·신기(新基)
    • 탑안 주민들의 일부가 새로 잡은 터이다. 그로 인해 마을 이름을 새뜸, 혹은 新基라고 부르게 되었다. 1927년에 첫 이주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10 가구가 살고 있다.
  • 월 촌(月村)
    • 국도 33호선에서 동북쪽으로 약 800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1875년 경에 작천의 星州 李氏가 入鄕하였다. 마을 뒷산이 동쪽에 떠오른 달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月山의 月字를 따서 月村이라고 하였다. 현재 24 가구 68 명이 거주하며, 이중 성주이씨가 13 가구, 그외 여러 성씨들로 분포되어 있다. 마을 남쪽에 월남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었으나 폐교되고 학생들은 현재 모두 지사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다.
  • 귀만·귀암·보리골·보동(甫洞)
    • 원래는 보리골이라고 하였는데, 마을의 형태가 月村의 뒷산인 月山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여 甫洞이라고 하기도 하고, 또 마을 뒷산의 모양이 거북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귀암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귀만으로 통하고 있다. 현재 2 가구가 살고 있다. 1993년의 경지정리 실시로 인해 옛 모습이 많이 바뀌었다.
  • 웃맏질·상형곡(上兄谷)/아래맏질·하형곡(下兄谷)
    • 이 마을은 북쪽으로는 용암면 상신리와 접하고, 남으로는 운수면과 접하며 중국의 春秋時代 施伯의 후손인 明나라의 行營將軍 施文用이 壬辰倭亂 때 援軍으로 왔다가 戰後에 이곳에 정착함으로써 逝江 施氏의 集姓마을을 형성하였다. 이곳에 살던 형제 중 아우가 분가하여 아래 마을로 내려가게 되자 형이 살던 곳을 兄谷이라 하였다.
    • 그후 세대가 늘어남에 따라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上兄谷, 혹은 웃맏질이라고 하고, 동생이 분가해 나간 곳을 下兄谷, 혹은 아래맏질로 구분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맏질에는 逝江 施氏 12호 25명, 星州 李氏 7호 15명을 비롯한 29가구, 60명이 거주하고 있다. 대부분 미작중심의 농업을 영위하였으나 근래에 들어와 참외농사 6호, 축산농 5호가 나타나게 되었다.

修倫面의 북단에서 997번 지방도가 호령고개를 통하는 남쪽으로 明溪川 山谷을 차지하는 이곳은 통일신라시대이래 大里坊에 속해 있었다. 이곳은 修倫, 陜川, 居昌地方에서 호령고개 (표고 250m)로 통하는 옛길목으로서 {京山志}와 {大東輿地圖}에서도 要路로서 언급되어 있다.

  • 황새봉·학봉(鶴蜂)·관봉(觀蜂)
    • 조선 영조 때 조성된 마을로서 앞산의 모양이 황새가 고동을 잡아먹는 형상이라고하여 황새봉, 또는 관봉이라고 불렀다. 마을의 노목인 향나무 밑의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은 아무리 가물다고 하더라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현재 9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거문골·금성(琴城)
    • 1710년 무렵 이곳에서 어떤 선비가 거문고를 켜고 놀았다고하여 거문골이라고 불렀다. 지방도에서 150m 떨어진 이 마을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마을 어귀 100m만 벗어나도 마을이 보이지 않아서 6·25전쟁 때 근처의 마을사람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현재 12가구가 살고 있다.
  • 밝은내·명계(明溪)
    • 조선 世宗 때 達城人 裵惠가 漢城에서 入鄕하였다. 사도실의 義城人 金季孫은 그의 사위이다. 宣祖 때 晋陽人 姜時遠은 楊州에서 입향하였다. 마을 뒷산 송대봉에서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이 맑고 깨끗하여 마을의 이름을 밝은내, 明溪라고 불렀다. 일제시대 때 金鑛으로 흥성하였었다. 현재 총 25가구가 거주하고 있다.
  • 부흥동(富興洞)
    • 조선 正祖 때 李氏라는 선비가 조성한 마을이다. 당시 극빈자들이 모여서 노력 끝에 富村을 이루었다고하여 富興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총가구는 25가구로서, 그중 12가구가 李氏이다.
  • 솔산·송산(松山)
    • 金海人 金文福(1614년생)이 이 마을에 입향하여 학덕을 닦음으로써 후손들이 世居하게 되었고 齋室이 있다. 마을 앞산에 老松이 많다고하여 솔산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노송이 많았던 앞산은 밭으로 바뀌었다.
  • 솔동·송라(松羅)·송라동(松羅洞)
    • 조선 英祖 때 어떤 선비가 入鄕한 마을로서 비단같이 아름다운 마을터라고하여 松羅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철 맑은 물이 흐르던 마을 앞 개울은 농업용수로 쓰기 위해 못으로 바뀌었다. 현재 9가구가 살고 있다.

修倫의 東部山岳 까치산(鵲山;571m)의 동편 약 10km의 좁고 긴 峽谷에 들어앉은 거뫼, 덕골, 모방골, 삼거리, 개티, 배티의 마을로 되어 있다. 거뫼는 해발 600m의 고원부락이며, 다른 마을은 산간에 의지해 자리잡고 있다.

  • 거 뫼[巨山]
    • 修倫面 東部山岳地帶 계곡 상류부위의 해발 600m의 고원에서 북쪽으로는 大家, 修倫, 龍岩面의 살피에 있는 하미기마을과 도로로 이어진 마을이다. 光山人 李重坤, 李夏坤, 李達英이 세거한 마을로서, 그 후손이 살고 있으나 약 10호의 閑村에 속한다.
  • 덕 골[德谷]
    • 거뫼마을 동남쪽 500m의 계곡에 접하여 鵲隱里 북부 산간의 중심을 이루는 깊은 山村이다. 마을 남쪽으로 계곡을 따라 내려가 星州-高靈 사이의 국도에 이르기까지는 약 8km의 외진 산골이다. 약 10호의 마을이 있다.
  • 모방골[方洞]
    • 덕골 서쪽 500m 거리의 閑村이다. 離農으로 인해 두어집만 남아 있다.
  • 산거리(山巨里)
    • 덕골마을 동쪽 700m 거리의 楸山(574m) 서북골짜기를 골라 앉은 고원부락으로 3∼4호가 남아있는 古村이다
  • 개티·개고개[介峴]
    • 수륜면 동부 산악지대의 중심부 계곡의 마을이다. 동쪽 용암면과 境界陵線의 산길마루를 개고개(介峴)라 하였는데, 곧 마을의 지명이 되었다. 개고개에는 지금은 廢村이 된 深隱마을이 있었다. 그곳에는 세상의 영화를 멀리 한 隱士들이 安貧樂道한 自足處였다. 개고개의 한자표기는 介山을 연상시킨다. 중국 山東省 介山에 春秋時代 介子推(介之推)가 은거한 것에 비유하여 개고개 남쪽 介山(320m)과 深隱마을이 성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개티마을에는 조선 仁祖 때 南平人 文南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살게 되었다. 지금 10여호의 峽谷마을이다.
  • 배티·배고개
    • 개티마을 동남쪽 약 2km 거리의 山峽溪谷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마을 동북 용암면 웃티마을로 넘나드는 梨峴(배고개)의 아랫골이라 해 마을이름도 배티라고 하였다. 鵲隱洞의 관문에 위치한 이 마을은 산수가 맑은 외진 골짜기이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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