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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대에는 이곳에 큰 우물이 있었으므로 이물방 또는 내물방이라 불리어졌다.조선조에 와서는 가천방으로 개칭하였다가 고종32년 (1895) 지방관제개정에 의하여 가천면이라 하여 심천,은학,신당,창리,중평,천동,천서,구정,산성,학산,궁항,장대,삼존,상범림,하범리,점촌,아전,오리,마수,내사부,상사부,하사부,전동,정동,갈동,상적리,하적리,신촌,화전,상죽곡,하죽곡,대흥,장산,웅수,동계,도원의 37개동리를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금수면의 영천리와 영파면의 중산동 보남동의 일부와 금릉군 증산면의 고방리를 병합하여 영천,창천,금봉,법전,용사,신계,화죽,마수,동원의 9개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가 1917년에 영천동을 금수면에 넘겨주었다. 광복후 1952년 8월에 8개동 13개 분동을 두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 때에는 대가면 중산동을 편입시켜 9개 법정리에 14개 행정리로 구성 되어있다. 동으로 대가면,서로 금릉군 증산면과 경남 거창군 가북면,남으로 수륜면,북으로 금수면과 접계 하고 있으며 남서방에 가야산,독용산과 형제봉이 높이 솟아 있어서 산지가 많고 동방과 남방에 약간의 평지가 있다. 농산물은 주곡과 특용작물로 참외재배가 성하고 교통은 성주,김천,고령을 연결하는 도로가 있다.

  • 난민정착지
    • 일제 때 행정기관의 알선으로 영세민을 정착시켜 개발하게 하였던 곳으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고 있다. 아전촌에서 가야산 쪽에 위치 하고 있다.
  • 모래재, 사령, 오리동
    • 조선조 문인이었던 사봉 김천택이 만년을 보냈던 곳이다. 그는 이 곳에서 후학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의 호인 사봉에서 모래재란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한편 그의 정자인 사봉정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마을 입구에는 도덕동이란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있다.
  • 법림, 상법동
    • 임진왜란 후에 개척 되었으며, 옛날에 있었던 법림사란 절의 이름에서 유래되어 법림이라 부른다. 이 절에 빈대가 너무 많아서 불태웠다고 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은 남아 있다.
  • 아전촌
    • 마을 뒷산이 나비의 형상과 같아서 아전촌으로 부른다. 응달과 양달이 있으며, 부근에는 장수 폭포가 있는데 옛날에 장군이 말을 매어 놓고 부하들과 술을 마시며 휴식을 취했는데 그 때 장군이 앉았던 흔적과 말발굽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 옹기점, 점촌
    • 법림 앞 냇물 건너편에 있으며 그릇 굽기에 알맞은 흙이 있어서 옹기를 구웠다고 하여 점촌이라 칭한다. 약 60년 전부터 옹기 굽는 일은 중단되었다.
  • 명덕실, 명덕
    • 동리 앞산이 벌 같고 뒷산이 벌집 같아서 마치 벌이 벌집으로 들어가는 형상인데 재래종 벌통의 이름인 명덕[벌통]을 따서 마을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임진왜란후 성주도씨가 개척하였다.
  • 신당, 신흥
    • 조선조 고종때에 동리가 생겼는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고 신당,신흥이라 불리어진다.
  • 중평
    • 조선초기에 마을이 생겼을 때부터 중평으로 부르다가 광복후부터 창천3동으로 부르며 현재의 시장부근이 된다.
  • 창리
    • 현재의 창천2동의 옛이름으로 조선초기부터 생긴 마을로서 창천동의 남쪽편에 있는 마을이다.
  • 천동
    • 조선초기에 생긴 마을로써 광복이후 창천1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창천동의 동쪽에 있다고 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천창, 창천동
    • 이곳에 샘이 많고 임진왜란때 곡물창고가 있었으므로 천창으로 불러오다가 일제시대 일본 발음으로 센소라 부르니 뜻이 좋지 않다고 하여 창천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 갈곡, 갈동
    • 덜내미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신계동에서 해발 약 550m 나 되는 고지대 산 기슭에 있는 마을 뒷산의 형상이 칡이 얽혀 있는 모양이라 갈곡이라 부르게 되었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30여 가구 이상 살았는데 대부분이 이농 하였고 앞으로 고랭지 재배지로 이용가치가 높다.
  • 새마, 교통, 시촌, 신촌동
    • 옛날 최씨들이 살던 마을은 없어지고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라 불렀다. 지금도 밭을 갈면 기와 조각이 나온다고 한다. 또 학교가 생긴 이후부터는 교동이라 부른다.
  • 덜내미, 상적, 월남
    • 동네 앞의 시루봉에 가려서 하룻밤에 달이 한 번 뜨고 가야산 쪽으로 돌아와서 다시 달이 뜨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여 월남이라 한다. 이 동네 뒷산의 불귀재로 거창군 사람들이 창천장을 보기 위해 넘나들며 이 곳에서 쉬어 갔다는 전설이 전하여 지나 지금은 길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 떡메골,독산
    • 마을 전체의 형상이 떡을 떡메로 치면 늘어나는 형상과 같다고 하여 떡메골이라 하며 그 부락 앞에 조그마한 산봉우리가 홀로 있다 하여 독산이라고도 한다.
  • 쇠점, 새점, 신점, 하적
    • 새마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서, 옛날 무쇠점이 있었다고 하여 쇠점이라 불러 왔는데 요즈음은 모두들 새점이라 부른다. 마을 한가운데로 깊은 골을 이룬 소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마을 주위에 언덕이 많아서 풀을 뜯어 먹던 소들이 넘어져 죽기도 한다.
  • 대실, 죽곡
    • 1400년경 뒷산에 자생하는 대나무가 많아서 생긴 동명이라 전해진다. 이 마을에 大王寺가 있었고 그 大王寺로 통하는 길거리 마을이라 하여 大王거리라 한 것이 후에 댕끝으로 변화된 마을 이름이다.
  • 상죽
    • 죽곡의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임진왜란 때에 이덕혼이란 사람이 개척하였다고 한다
  • 음죽
    • 죽곡에서 음지에 있는 마을로서 조선때 이언부가 개척하였다.
  • 법하동, 하법림
    • 1400년경 심 황이 법림사의 이름을 따서 법림이라 하였으며 가야산쪽으로 약2km 위쪽에 있었던 법림사의 아래쪽에 있다고 하법림이라 칭한다.
  • 하죽
    • 죽곡의 아래쪽에 위치하였다고 하죽이라 불리어진다. 야성송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 금바우, 짇말리, 정동, 금암
    • 마을 뒷산이 가야산이며, 그 아래 쪽에 큰 바위가 있다 하여 금바우라 한다. 또 동네 한가운데 오래된 정자나무가 있어 정동 이라고도 하며 비가 오면 진흙탕이라 하여 짇말리라고도 불리어진다.
  • 안사부랭이, 내사
    • 사부랭이 안쪽에 있는 마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폐동이 되었다.
  • 웃사부랭이, 상사
    • 아랫 사부랭이에서 산비탈을 따라 약 1km쯤 산길을 거슬러 올라간 산중턱에 위치하고, 용사동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있는 마을이며 옛날에는 가장 안전한 피난지로 알려졌으며 10여 가구가 살았으나 지금은 1가구가 살고 있다. 앞으로 산양 사육지로 각광을 받을 것이다.
  • 사부랭이
    • 안사부랭이, 웃사부랭이, 아랫사부랭이를 총칭하여 사부랭 이라고 하며 이 곳에서는 봄철에 산나물이 많이 생산되고 곡우 무렵 자작나무에서 곡우물이 생산되어 외래객들이 많이 ?O기도 한다.
  • 아랫사부랭이, 하사
    • 용사동에서 으뜸가는 마을로서 산기슭에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가야산 깊은 골짜기에서 사계절 맑은 물이 마을 주위로 흘러 내리기 때문에 연중 물 걱정이 없으며 신계, 용사, 양동에서 농사짓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 염주실, 염주동
    • 그 지형이 염주 형상이라 하여 염주실, 염주동으로 전해 오나 폐동이 되었다.
  • 올미, 용동, 용암동
    • 전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며 마을 어귀에 용처럼 생긴 바위가 주옥을 물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용암동이라 한다.
  • 전동
    • 마을 뒤에 대밭이 있으며 예전에 화살을 만들었다고 하여 전동이라 한다. 북쪽에 큰 산이 가로 막고 있어 신계,용사,양동 중에서 가장 살기 좋은 마을이며 주위 산에는 고사리, 취나물 등 산나물이 생산되어 생활에 보탬이 되기도 한다.
  • 서침실, 현침실, 현침곡
    • 형제봉 남쪽 깊은 골에 있는 마을로서 그 형상이 바늘을 매단 형국이라 하여 이름지어졌으며 마을 주위에 명당 자리가 있다고 한다. 2 가구가 화전을 하면서 살았으나 지금은 폐동이 되고 빈 집터와 화전으로 일구었던 밭들이 남아 있으며 뒷산에 곡우물이 나는 나물들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 가무리, 갓무리
    • 도원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인데 지금의 동원동을 말한다. 예로 부터 가뭄이 잘든다고 해서 갓무리라고 부르게 되었다. 당초에는 가무리라고 하였으나 점차 갓무리로 변했다고 한다. 음지 갓무리 마을뒤에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는데 갓무리란 이름을 잘 뒷받침 해주고 있다.
  • 낭금
    • 양촌 뒷산의 서쪽 정상부근에 있는 마을로서 길의 모양이 주머니 같다고 하여 낭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성산이씨의 제실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밤나무가 무성하고 밤맛이 좋기로 유명하다.
  • 양지갓무리, 양촌
    • 갓무리의 양지쪽에 있는 마을이며 현재 동원1동이다. 이 마을에서 화죽동의 음죽으로 넘어가는 고개가 울미 고개인데 어느 해 탁발하러 온 중이 이 마을에 가뭄이 심한것을 보고 측은히 여겨 울면서 이 고개를 넘었다고 울미고개라 부른다.
  • 외 야 골
    • 인산마을앞 도로의 동남방의 들길을 건너 낮은 언덕위에 위치해 있으며, 마을동쪽의 낮은 구릉을 사이로 학산리 새정지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 음지갓무리, 도원
    • 갓무리의 응달쪽에 있는 마을이며 현재 동원2동이다. 도원의 유래는 1600년경 개척당시에 복숭아 나무가 많고 살기 좋은 곳이라 하여 도원이라고 했다 한다.
  • 금봉동, 구정동, 금봉천
    • 임진왜란 때 아군의 임전 태세가 철통 같아 마치 독용산성에 조정의 삼정육조가 있는 것처럼 이를 사수 했다는 데서 유래되어 삼정육조를 합한 구정이란 뜻으로 구정동이라 하였다. 마을이 내를 따라 형성되고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많이 날아 왔다고 금봉 또는 금봉천이라 부른다.
  • 활미기, 궁항
    •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데 독용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협곡이다. 예로부터 활로 지키기에 알맞은 전략 요충지라 하여 활미기 또는 궁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 쉬시골, 북다랑
    • 시여골에서 산성 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전해 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성산 가야 시절에 산성보다 더 놓은 산에 북을 매달아 놓고 이것을 쳐서 백성들이나 또는 이웃의 연락 장소에 각종 통신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 산성
    • 해발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성산 가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독용산성 안에 있었던 마을이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 시여골
    • 계곡 위쪽의 은광대에서 협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힘차게 흐른다고 하여 나온 이름이다. 처음에는 수력곡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시여골로 부르게 되었다.
  • 학산동
    • 금봉동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활미기를 가려면 이 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남향인 이 마을의 앞뒤 산세가 마치 쌍학쌍무의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학산동이라 불렀다. 마을 뒤에는 내력이 확실하지 않은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는데 안국사라 부르고 있다.
  • 금시, 곰시, 웅수
    • 지형이 마치 곰이 물을 먹는 형상과 같아서 웅수라고 불렀으며, 정감록에 보면 가야산 밑에 만수의 비결이 있다 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예로 이쪽엔 피란민이 많이 모여 살았다고 한다.
  • 마수, 마수동
    • 말 머리와 비슷한 바위가 있고 또 말안장 같은 바위가 있다고 하여 마수라 부른다. 면소재지에서 약 6km의 거리에 있으며 가야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아직도 토종벌을 쳐서 주민의 소득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 미륵딩이, 탑양지
    • 마수동 위쪽에 바위로 된 자연 미륵상이 있는데 그 곳을 미륵딩 이라고 부르며,또한 절이 있었고 그 절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탑양지라고 불려진다.
  • 오리바우평전
    • 앞산 능선 평전에 아주 크고 넓은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모양이 오리 같아서 생긴 이름이다. 이 바위를 일명 독사 바위라고 부르기도 한다.
  • 강정
    • 강변에 큰 정자나무가 있다고 하여 조선 선조 때 우승지를 지낸 괴제 배상호가 지은 동명이라고 한다.
  • 머지미, 머지뫼
    • 먼 산쪽(머지뫼)에 생긴 동네로 한자를 빌려 우리 말로 표현한 동명이다.
  • 안뜸
    • 머지미 안 쪽에 있는 마을로서 주로 성산 배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는데 이곳에 온 지 600여 년이 되었다고 전한다.
  • 도장골, 천석골, 중미, 중산, 중산동
    • 250여 년 전 도장골이라는 산골에 약 100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당시에 한 농가에서 벼를 천석하였다고 동명을 천석골로 불러 오다가 어느 해 산적이 들어와서 곡식을 약탈해 가자 동리를 현 위치로 옮겨서 중산동으로 부르게 되었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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