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면은 군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74.50㎢, 600여세대에 인구는 1,200여명이고, 면 소재지는 광산리이다. 변한시대에는 금릉군 甑山面이 거물가야(軍彌國)의 주변이라 하여 통일신라 시기에 거물밖(今勿法)坊이 되어 가천면에 있었던 斯火縣에 속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금물방이라 하다가 조선조 1845년에 와서 목사 김영이 군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명하면서 今勿面 또는 今水面이라 하였다. 면의 서남쪽은 독용산(955m)·도장골산(520m)·신흥뒷산(503m)·형제봉(1,022m) 북쪽은 염속봉(870m) 등의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남북 양 산곡간을 대가천이 꾸불꾸불 흐르며, 그 활주사면에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과 특용작물인 참깨 들깨 및 참외가 재배되고 있으며, 또한 과수, 잎담배 재배와 양봉, 축산업이 성하다. 도로는 변산에서 대구간 국도가 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성주와 통하며, 또한 광양-양양간 국도가 59호선이 면의 남북을 통과하여 김천 고령 등과도 연결되므로 교통은 편리하다. 영천리의 하고방마을에는 김우옹이 후학육영을 위하여 세운 考槃書堂이 있다.
또 안챙기 마을에는 四未軒 張福樞가 많은 후학을 길러낸 묵방서당이 있고 하입암마을 동쪽 냇가에는 군내의 명승지인 선바위가 있으며, 또한 1987년에 착공한 성주댐이 1994년부터 담수를 하여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어 행락철이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봉두리에 현광호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하여 대가천가 경승지에 지은 정자인 白雲亭이 있다. 면내의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금수면은 광산·명천·어은·후평·봉두·무학·영천 등 법정 7개리, 행정 13개리이다. 1988년 5월 조례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살티(살티)고개 남쪽 산간에 분포해서 김천과 성주댐으로 통래하는 지방도와 그 주변에 위치한다. 옛 사람들이 고래로 산촌의 安貧樂道를 즐기며 살아온 곳이다. 황산, 아래후리실, 이실뫼, 살티, 송정, 신성리, 말뫼, 갓안으로 나뉘어 있다. 창천-김천간의 국도에 있는 고개인 살티재가 있고, 살티고개 서편 금릉군과의 경계인 표고 870m의 厭俗山이 있다. 말뫼마을 뒤에는 표고 384m의 斗山이 있는데, 이것은 곡식을 가득 담은 말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안새출로 넘어가는 산고개인 토꾸재가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경주정씨 10호, 청주이씨 5호, 성산여씨 5호, 경주최씨 5호, 그 밖에 42호이다. 이실뫼(노산)마을에는 경주인 鄭喬岳(1714생)이 영조년간의 戊申亂을 피하여 입향했고, 광해 때는 古阜人 李光曄이 세거했다. 신성리에는 韓春富의 후손이 살고 있다. 또한 신성리 마을앞에는 성주댐 수몰지구 기록비가 있다.
금수면의 동부산간의 30번 국도와 대천으로 나가는 군도를 접하여 세천을 끼고 있는 면소재지 마을이며 평촌·죽전·골마·덕말리·오당·중평 등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골마뒷산에는 황새봉이라는 봉우리가 있고, 광산 2리 뒷산에는 성지굴이라는 암굴이 있다. 신라말기부터 가천면의 斯火(壽同)縣에 속한 금파곡방에 따랐고, 1845년 금파방이 되고, 1895년 서부의 금수방과 합쳐져서 금수면의 소재지로 되었다. 坪村마을에는 星山人 月潭 呂孝思(1612년생)가 不求聞達로 학문에 정진한 이후 그 후손이 살고, 골마는 濫溪라 한다. 이것은 공자의 家語에 양자강의 발원지에 술잔을 띄울 만한 細川이 있어 이를 "濫觴"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덕말리에는 단종 때 順天人 金嗣成이 서울에서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산 이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오당마을에는 黃允中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성산여씨 22호, 순천김씨 12호, 성주이씨 14호, 창원황씨 10호, 의성김씨 5호, 인동장씨 5호, 벽진이씨 5호, 고성이씨 5호, 그밖에 28호이다.
완공되어 가고 있는 성주댐의 수몰지역의 마을인데 새출, 구성골, 날래미, 범들, 사드레, 봉성리로 구분해 있다. 신성리에서 새출로 넘어가는 국도상의 고개인 날래미고개가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청주한씨 22호, 성산이씨 12호, 경산이씨 10호, 김해김씨 6호, 인동장씨 5호, 그밖에 45호가 살았으나 성주댐 수몰로 20여호만 남아있다.
새출마을에는 선조 때 延州人 玄舜昌이 첨사를 지내고 입향하여 살았다고 하며, 구성골에는 京山人 李亨示古가 만년을 학문에 심취해 지냈던 곳이라 한다. 범들에는 선조대 進士 淸州人 韓春富가 입향한 후 그의 후손이 사드래마을과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며, 봉성리는 杜甫詩의 "銀漢遙應接鳳城"이라는 명구를 인용한 지명인데 꿈의 궁성을 뜻한다.
금수면 동단부에 위치하여 남북은 산줄기로 가리고 동서로는 계천과 도로로 산간에 들어앉은 조용한 농촌이다. 대내, 새터, 수름재, 화음, 희봉, 소도골 등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성산배씨 11호, 밀양박씨 10호, 성주이씨 10호, 연안이씨 5호, 진주강씨 5호, 수원백씨 5호, 그밖에 31호이다.
1914년 大家面에서 편입되었다. 대내(죽천)마을은 비옥한 농토로 부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선조 때의 인물인 仁同人 張鳳翰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진주인 姜篆의 후손과 金海人 金大生의 후손도 살고 있다. 수름재마을에는 숙종 때 水原人 白道先이 입향해서 산 이후 그 후손이 회봉마을에 살고 있다. 새터마을에는 延安人 李成實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또 순조 때 淳昌人 薛楠이 의령에서 옮겨와 세거한 곳이기도 하다.
독용산성(956m)의 북쪽으로 대가천상류 절경의 곡강을 접해 산협에 의지해 있는 넓바위, 챙기, 먹뱅이로 구분되어 있다.넓바위마을 앞 산모퉁이며 협곡산촌에 손님을 맞는 곳이라는 빈주봉이 있고, 특산물로는 곡우절에 자작나무에서 수액을 내어 마시는 속칭 곡우물과 산약, 산채가 유명하다.
명승지로서 배바위가 수몰을 면한 지역에 있다.거대한 바위밑을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이다. 옛날 대가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를 매어두던 바위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위의 생김새가 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을 접한 부분이 배의 중앙처럼 볼록하고 배위의 12평 정도의 평지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들놀이를 즐기던 장소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정선씨 10호, 전주이씨 10호, 창녕조씨 8호, 해평김씨 7호, 경주김씨 7호, 김해김씨 5호, 밀양박씨 5호, 그 밖에 48호가 있다
고래로 가천면의 사화현에 따른 금물법방으로 됐으나 1845년 목사 김영이 금수방으로 개정했고 1895년 금수면으로 편제되었다. 배바위는 조선초 石陵君 金龍의 세거지였고, 이 후 그 후손의 집성촌이 되었다. 챙기마을 고종때 서울 재동에서 順興인 안중혁이 入鄕하여 世居한 곳이다.
금수면 소재지에서 성주댐 방향의 국도로 가까운 거리의 동편에 있는 언내마을과 그 동편 고개너머 적산마을과 언내 서북 국도의 고갯마루에 있는 웃후리실 마을로 분포된 외진 마을이다. 적산마을 남쪽 고루산(260m)에는 할미산성의 전초망루가 있었고 이 누각에는 북을 달아 산성과 요소에 북을 울려 교신했다고 한다. 고루(북다락)가 있어서 고루산이 되고 고루재를 고름재라고 한다. 적산마을은 금수면에서 벽진쪽의 국도 안쪽의 關門 마을이다. 고려 말 성주인 李仁敏의 아들인 李稷(1362-1432)이 만년에 세거하던 고택이 있었는데 뒤에 名僧 학조가 이 집을 얻어 積山寺라고 했다 한다. 그후 200년 뒤 임진왜란 때 이 절에 있던 중 贊熙가 왜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해서 절을 폐하였다고 한다. 언내마을에는 金寧人 金錫壁의 후손과, 인조 때의 인물인 李守根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김녕김씨 22호, 의성김씨 9호, 평산신씨 9호, 경산이씨 6호, 성주이씨 5호, 고성이씨 5호, 그 밖에 39호이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