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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면은 군의 서부에 위치하고 있다. 면적 74.50㎢, 600여세대에 인구는 1,200여명이고, 면 소재지는 광산리이다. 변한시대에는 금릉군 甑山面이 거물가야(軍彌國)의 주변이라 하여 통일신라 시기에 거물밖(今勿法)坊이 되어 가천면에 있었던 斯火縣에 속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금물방이라 하다가 조선조 1845년에 와서 목사 김영이 군 지명을 대대적으로 개명하면서 今勿面 또는 今水面이라 하였다. 면의 서남쪽은 독용산(955m)·도장골산(520m)·신흥뒷산(503m)·형제봉(1,022m) 북쪽은 염속봉(870m) 등의 높은 산이 가로막고 있다. 이 남북 양 산곡간을 대가천이 꾸불꾸불 흐르며, 그 활주사면에 평지를 형성하고 있다. 주된 산업은 농업으로 주곡과 특용작물인 참깨 들깨 및 참외가 재배되고 있으며, 또한 과수, 잎담배 재배와 양봉, 축산업이 성하다. 도로는 변산에서 대구간 국도가 면을 동서로 가로질러 성주와 통하며, 또한 광양-양양간 국도가 59호선이 면의 남북을 통과하여 김천 고령 등과도 연결되므로 교통은 편리하다. 영천리의 하고방마을에는 김우옹이 후학육영을 위하여 세운 考槃書堂이 있다.

또 안챙기 마을에는 四未軒 張福樞가 많은 후학을 길러낸 묵방서당이 있고 하입암마을 동쪽 냇가에는 군내의 명승지인 선바위가 있으며, 또한 1987년에 착공한 성주댐이 1994년부터 담수를 하여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각되어 행락철이면 많은 관광객이 모여든다.

봉두리에 현광호의 제자들이 스승을 위하여 대가천가 경승지에 지은 정자인 白雲亭이 있다. 면내의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교가 있다. 금수면은 광산·명천·어은·후평·봉두·무학·영천 등 법정 7개리, 행정 13개리이다. 1988년 5월 조례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살티(살티)고개 남쪽 산간에 분포해서 김천과 성주댐으로 통래하는 지방도와 그 주변에 위치한다. 옛 사람들이 고래로 산촌의 安貧樂道를 즐기며 살아온 곳이다. 황산, 아래후리실, 이실뫼, 살티, 송정, 신성리, 말뫼, 갓안으로 나뉘어 있다. 창천-김천간의 국도에 있는 고개인 살티재가 있고, 살티고개 서편 금릉군과의 경계인 표고 870m의 厭俗山이 있다. 말뫼마을 뒤에는 표고 384m의 斗山이 있는데, 이것은 곡식을 가득 담은 말 같은 산이라는 뜻이다. 안새출로 넘어가는 산고개인 토꾸재가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경주정씨 10호, 청주이씨 5호, 성산여씨 5호, 경주최씨 5호, 그 밖에 42호이다. 이실뫼(노산)마을에는 경주인 鄭喬岳(1714생)이 영조년간의 戊申亂을 피하여 입향했고, 광해 때는 古阜人 李光曄이 세거했다. 신성리에는 韓春富의 후손이 살고 있다. 또한 신성리 마을앞에는 성주댐 수몰지구 기록비가 있다.

  • 가남밭골·안골·시전
    • 약 80년전 화전민 입주로 부락이 생겨 18가구가 살았으나 12년전 당국의 화전민 정비에 의해 폐동이 되었다.
  • 이실뫼·노산
    • 진사·참봉인 정고악 선생이 220년전 입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蛛絲露結之地라 하여 노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정씨가 주로 살고 있다.
  • 말미·두산
    • 마을 뒷산이 말같이 생겼다고 하여 두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수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으며 미곡과 축산업을 하고 있다.
  • 살티·사현
    • 바람이 세어 산의 모래가 많이 날리며 멀리서도 모래흙이 보인다 하여 살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뒤편에 중계소가 위치하고 있다.
  • 삼거리·토꾸재
    • 토끼가 자주 다니는 길목 고개라고 하여 토꾸재라 부르게 되었다. 김천과 가천·무학으로 가는 교통의 삼거리로 이용되고 있다.
  • 신성·신성리
    • 약 150년전에 부락이 새로 형성되었을때 신성·신성리로 불리게 되었다. 주로 말미에 사는 주민들이 이주해 갔으나 지금은 마을세가 말미보다 강하다.
  • 송정(松亭)
    • 지리학상으로 소나무 정자와 같은 위치라 하여 송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지대라 밭농사가 성행하고 있으며 가구수가 아주 적다.
  • 아래후리실·하후동
    • 인심이 후한 아랫마을이란 뜻으로 하후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내에 아주 오래된 소나무가 이 마을을 지켜 준다고 믿고 있다.
  • 황 산
    • 흙이 누른 색을 띈다고 하여 황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 뒷동산에 오래 묵은 소나무 숲이 있는데 그것이 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다고 믿는다.

금수면의 동부산간의 30번 국도와 대천으로 나가는 군도를 접하여 세천을 끼고 있는 면소재지 마을이며 평촌·죽전·골마·덕말리·오당·중평 등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골마뒷산에는 황새봉이라는 봉우리가 있고, 광산 2리 뒷산에는 성지굴이라는 암굴이 있다. 신라말기부터 가천면의 斯火(壽同)縣에 속한 금파곡방에 따랐고, 1845년 금파방이 되고, 1895년 서부의 금수방과 합쳐져서 금수면의 소재지로 되었다. 坪村마을에는 星山人 月潭 呂孝思(1612년생)가 不求聞達로 학문에 정진한 이후 그 후손이 살고, 골마는 濫溪라 한다. 이것은 공자의 家語에 양자강의 발원지에 술잔을 띄울 만한 細川이 있어 이를 "濫觴"이라 한 것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덕말리에는 단종 때 順天人 金嗣成이 서울에서 관직을 버리고 내려와 산 이후 그의 후손이 살고 있다. 오당마을에는 黃允中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성산여씨 22호, 순천김씨 12호, 성주이씨 14호, 창원황씨 10호, 의성김씨 5호, 인동장씨 5호, 벽진이씨 5호, 고성이씨 5호, 그밖에 28호이다.

  • 골 마·남 계
    • 경상좌수사를 지낸 어떤 분이 약 280년전에 이 마을에 들어와서 마을을 이루었으며, 마을 옆에 푸른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고 하여 남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 웃덕말리·덕촌
    • 1572년 조선 선조 때 김연이라는 선비가 정착하였으며 사방에 산이 둘러 싸이고 해마다 풍년이 들고 번창해서 덕이 많은 부락이라고 하여 덕촌이라 하였다고 한다.
  • 동산·외티
    • 오당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광대원 동쪽 산밑에 있다고 동산이라 하였으며 3가구가 축산 및 복합영농으로 비교적 잘 살고 있다.
  • 오 당
    • 조선 중기 黃允中이라는 선비가 入鄕한 마을로 오당이라는 서당에서 한학에 뜻있는 사람을 모아 학문을 연구하였다 하며, 또 오동나무 밑에 서당이 있다 하여 오당이라 불리어진다고 한다.
  • 원터·주막뜸·죽전
    • 마을 뒷산에 대나무가 많아서 죽전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면소재지로서 관공서와 상점과 주막이 있으며 13가구에 52명이 살고 있다.
  • 중 평
    • 한학에 뜻이 있는 주민인 固城 李氏가 서당에 다니는데 길이 멀어 불편하여 오당과 덕촌사이에 새마을을 개척하여 중평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평 촌
    • 약 300여년 전에 呂孝思가 入鄕하였으며 들판이 평탄하다 하여 평촌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은 참외 및 축산업으로 소득을 올리고 있다.

완공되어 가고 있는 성주댐의 수몰지역의 마을인데 새출, 구성골, 날래미, 범들, 사드레, 봉성리로 구분해 있다. 신성리에서 새출로 넘어가는 국도상의 고개인 날래미고개가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청주한씨 22호, 성산이씨 12호, 경산이씨 10호, 김해김씨 6호, 인동장씨 5호, 그밖에 45호가 살았으나 성주댐 수몰로 20여호만 남아있다.

새출마을에는 선조 때 延州人 玄舜昌이 첨사를 지내고 입향하여 살았다고 하며, 구성골에는 京山人 李亨示古가 만년을 학문에 심취해 지냈던 곳이라 한다. 범들에는 선조대 進士 淸州人 韓春富가 입향한 후 그의 후손이 사드래마을과 이곳에 집성촌을 이루며, 봉성리는 杜甫詩의 "銀漢遙應接鳳城"이라는 명구를 인용한 지명인데 꿈의 궁성을 뜻한다.

  • 구성골·구성곡·구상곡
    • 마을 앞 냇물이 굽이굽이 돌아서 성을 이루는 형상이 거북과 같다 하여 구성골·구성곡·구상곡이라 불려졌으며 처음에는 여씨들이 入鄕하였으나 지금은 성주댐으로 인해 수몰되었다.
  • 날내미·비산
    • 3가구가 살면서 닥나무로 질이 좋은 한지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나 인근 마을과의 거리가 멀고 좁은 토지의 소유로 빈농이 대부분이라 거의 인근 마을인 새출로 이주하고 지금은 수몰되었다.
  • 안새출(內士致 또는 內舍致)
    • 약 400여년전에 延州人 玄舜昌이 첨사의 벼슬을 마치고 입향해서 살아오던 중 자손들이 번성하지 못하고 각처로 떠나고 약 300년전 京山人 李就新(호 石軒)이 판관벼슬을 마치고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덤개) 岩浦마을에서 이곳으로 이사와서 선비가 글을 가르치고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출발한다 해서 새출 또는 士致로 부르게 되었다.
  • 바깥새출(外士致)
    • 안새출에서 몇 집이 이사오고 타처에서 이사와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안새출 보다 위에 마을이 형성되어 한 마을이 되었다. 1970년에는 38호가 살았으나 성주댐 수몰로 1995년에 없어진 마을이다.
  • 범뜰·호평·복호
    • 임진왜란 때 淸州人 韓春富 진사가 피란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마을 앞 대가천에 큰 바위가 흡사 호랑이 모양을 하여 엎드려 있다고 하여 복호 또는 호평이라 하였다.
  • 봉성리·봉산
    • 약 200여년 전에 固城 李氏가 형성하였다. 이 마을 뒷산의 봉우리가 봉황새와 닮았다고 하여 동명을 봉산 또는 봉성리라 하게되었으며 봉두초등학교와 마을은 성주댐으로 수몰되었다.
  • 사드래·사촌·사천
    • 마을 앞 냇가에 깊은 소가 있으며 이 냇가에는 모래가 많이 쌓이는 곳이라 하여 사드래·사천으로 불리어지고 있으며 산비탈을 개간하여 과수원으로 활용하고 있다. 현재 5가구가 살고 있다.
  • 노루목(獐項)
    • 안새출에서 약 3km 산골로 더 올라가면 금릉군 지례면 율곡리와 금수면 봉두리 경계지점에 위치한 화전민촌으로 1950년에서 1960년대 까지 독가촌이었다. 치안관계 및 화전민 철거시 마을이 없어졌다

금수면 동단부에 위치하여 남북은 산줄기로 가리고 동서로는 계천과 도로로 산간에 들어앉은 조용한 농촌이다. 대내, 새터, 수름재, 화음, 희봉, 소도골 등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성산배씨 11호, 밀양박씨 10호, 성주이씨 10호, 연안이씨 5호, 진주강씨 5호, 수원백씨 5호, 그밖에 31호이다.

1914년 大家面에서 편입되었다. 대내(죽천)마을은 비옥한 농토로 부촌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선조 때의 인물인 仁同人 張鳳翰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진주인 姜篆의 후손과 金海人 金大生의 후손도 살고 있다. 수름재마을에는 숙종 때 水原人 白道先이 입향해서 산 이후 그 후손이 회봉마을에 살고 있다. 새터마을에는 延安人 李成實의 후손이 살고 있으며, 또 순조 때 淳昌人 薛楠이 의령에서 옮겨와 세거한 곳이기도 하다.

  • 대 내·죽 천
    • 300여 년전에 황성천이라는 복술가가 마을을 조성하였는데 당시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무성히 잘 자란다고 죽천이라 하였다 한다.
  • 吳氏藥泉
    • 죽천과 소도간 도로 중앙지점에 어느때 사람인지 알 수 없으나 吳氏藥泉(옷약샘의 이두어)이라 새겨져 있고 약샘을 발견한 사람인 듯 金海容이라 기록되어 있다.
  • 웃수룸재·덕산
    • 약 300여년 전에 박수목이라는 선비가 入鄕하였으며, 이 마을에는 봉소림이라는 숲이 있었는데 그 숲이 이름 첫자인 봉자에서 이름을 따오게 되었는데 봉은 덕이 많은 동물로 알려져서 그 덕자를 붙여 덕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새터·신기
    • 약 300여년전 죽천 사람 황영효라는 농부가 마을 앞쪽을 이주하니 새로운 마을이라고 하여 신기라고 하였다.
  • 소도굴·소도동
    • 약 300여년전에 김녕김씨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마을 뒤 조그마한 굴 속에서 피란을 하였다 하여 소도굴로 전하여 오다가 소도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깊은 산골에 위치하여 교통이 불편하므로 이농 현상이 심하여 가구수가 크게 줄고 있다.
  • 아래수룸재·화음
    • 약 250년전에 한 근면한 농부가 개척하였으며, 벼가 소리가 나도록 잘 자란다 하여 禾音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 回 峯
    • 함안 조씨가 처음 入鄕하였으나 마을 앞 철용이라는 곳에서 학이 한마리 날아와서 산봉우리를 돌았다 하여 회봉이라 불린다. 화음에 살던 水原白氏들이 이 回峯에 이사와 살고 있다.

독용산성(956m)의 북쪽으로 대가천상류 절경의 곡강을 접해 산협에 의지해 있는 넓바위, 챙기, 먹뱅이로 구분되어 있다.넓바위마을 앞 산모퉁이며 협곡산촌에 손님을 맞는 곳이라는 빈주봉이 있고, 특산물로는 곡우절에 자작나무에서 수액을 내어 마시는 속칭 곡우물과 산약, 산채가 유명하다.

명승지로서 배바위가 수몰을 면한 지역에 있다.거대한 바위밑을 맑은 물이 흐르는 절경이다. 옛날 대가천을 거슬러 올라온 배를 매어두던 바위라 하여 이렇게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바위의 생김새가 배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물을 접한 부분이 배의 중앙처럼 볼록하고 배위의 12평 정도의 평지가 있어 마을 사람들이 들놀이를 즐기던 장소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정선씨 10호, 전주이씨 10호, 창녕조씨 8호, 해평김씨 7호, 경주김씨 7호, 김해김씨 5호, 밀양박씨 5호, 그 밖에 48호가 있다

고래로 가천면의 사화현에 따른 금물법방으로 됐으나 1845년 목사 김영이 금수방으로 개정했고 1895년 금수면으로 편제되었다. 배바위는 조선초 石陵君 金龍의 세거지였고, 이 후 그 후손의 집성촌이 되었다. 챙기마을 고종때 서울 재동에서 順興인 안중혁이 入鄕하여 世居한 곳이다.

  • 넉바우. 광암
    • 바위가 많은 계곡에 자리 잡은 마을로 앞을 흐르는 냇가에는 크고 넓은 바위가 하나 있어 마을의 남녀 노소가 여름철이면 여기서 더위를 식히며 휴식하던 장소로 전해지며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넓은 바위란 뜻의 넉바우로 부르며 동명도 여기에서 연유되었다.
  • 안챙기.냐잔계
    • 마을의 위치가 챙기에서 북동쪽으로 약 1 들어가 있기 때문에 안챙기라고 부르며, 묵방에 있던 서당을 1971년 4월12일에 이곳에 이전해 놓았다.
  • 먹방. 묵방
    • 안챙기에서 북동쪽으로 약 2km 거리에 위치한 마을로 사림에서 사미장복추 선생을 추모하여 서당을 짓고 위패를 모셨으며 후학을 위해 글도 가르쳤다 한다. 이 때에 먹을 갈아 글공부를 하매 마을전체에 먹물 냄새가 넘쳐 사람들은 묵방이라는 이름 붙였다고 전한다.
  • 배바우.선암
    • 마을 앞을 흐르는 냇가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옹기종기 흩어져 있는 바 이 중에서 그 모양이 특이하게도 나룻배처럼 생긴 큰 바위가 있어 사람들은 이를 배바위라 되었고 이 말이 구전으로 널리 알려져 마을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 챙기. 참기. 전계
    • 임진왜란 때 피난 온 밀양 박씨와 해평 김씨가 이 곳에 와서 살때 형제봉에서 내려오는 시냇물이 너무 맑고 깨끗하여 마을 이름을 참계 또는 참기라고 불러 오다가 지금은 챙기라 불리어지고 있다.
  • 빈지봉. 비주봉
    • 넉바우 건너 도로가에 위치한 독가촌으로 지형이 들어오고 나가는 입구와 같아서 옛날에는 이곳에서 가는 손을 배웅하고 오는 손을 정중히 맞이하였다고 하며 주인과 손님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라 하여 빈주봉이라 불렀으며 마을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 表忠薺
    • 석릉군 全龍을 위한 재실이다. 전룡은 임진왜란 때 宣祖를 의주로 扈從하여 扈聖功臣이 되고 석릉군에 봉해졌으며, 형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세거지인 이곳에 표충재와 影幀閣이 있다. 포충재는 5칸 건물로 방 3 칸 대청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表忠薺記`와 `影閣重建記` 등의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 墨坊書堂
    • 안챙기에 있다. 이 건물은 원래 현재의 위치보다 2㎞ 정도 계곡상류인 먹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四未軒 張福柩의 학당이다. 장복추는 인동 장씨로 학문과 덕망이 뛰어났으며,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는데, 특히 禮學에 밝았으며, 많은 후학을 길렀다. `書堂記`가 있다.
  • 君守金一圭善德不忘碑
    • 무학리 빈주봉 부락 남쪽 강변에 소재하고 있다. 수몰예정지 내에 있다. 비석은 자연 암반을 비좌로 하여 홈을 파고 그위에 건립되어 있는데, 재질은 화강암이다. 지붕은 집지붕형의 옥개형이다. 현재는 성주~무주간의 국도변에 4기의 비들과 함께 이설되어 있다. 재질은 화강암이며, 비신고 81.0m, 비신폭 26.5m, 두께 10.0m,이다. 비좌는 자연암반이며, 자경 5.3x5.5m, 년대는 1968년 6월로 되어 있다.

금수면 소재지에서 성주댐 방향의 국도로 가까운 거리의 동편에 있는 언내마을과 그 동편 고개너머 적산마을과 언내 서북 국도의 고갯마루에 있는 웃후리실 마을로 분포된 외진 마을이다. 적산마을 남쪽 고루산(260m)에는 할미산성의 전초망루가 있었고 이 누각에는 북을 달아 산성과 요소에 북을 울려 교신했다고 한다. 고루(북다락)가 있어서 고루산이 되고 고루재를 고름재라고 한다. 적산마을은 금수면에서 벽진쪽의 국도 안쪽의 關門 마을이다. 고려 말 성주인 李仁敏의 아들인 李稷(1362-1432)이 만년에 세거하던 고택이 있었는데 뒤에 名僧 학조가 이 집을 얻어 積山寺라고 했다 한다. 그후 200년 뒤 임진왜란 때 이 절에 있던 중 贊熙가 왜병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해서 절을 폐하였다고 한다. 언내마을에는 金寧人 金錫壁의 후손과, 인조 때의 인물인 李守根의 후손이 살고 있다. 성씨별 가구분포는 김녕김씨 22호, 의성김씨 9호, 평산신씨 9호, 경산이씨 6호, 성주이씨 5호, 고성이씨 5호, 그 밖에 39호이다.

  • 웃후리실·상후동
    • 조선 인조 때 李守根이라는 유생이 길을 가다가 배가 고파서 부락에 들어가 점심 대접을 받고 난 후부터 인심이 후하다고 소문이 나서 동네 이름을 후리실이라 불리게 되었고 상위치에 있다 하여 상후리이라고 한다.
  • 언내·엇내·어은
    • 약 300여년전에 김씨 성을 가진 선비가 마을을 개척하였다 하는데 당시에는 금물방 또는 어천곡이라 하였고 약 280여년전 김중익이라는 訓練部正이 어천곡에 고기가 많이 숨어 살고 있다고 하여 어은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 적 산
    • 약 600년전에 조선 영상인 星州人 李稷이 入鄕하였다. 산이 첩첩이 쌓여 적산이라고 하며 이직의 고택을 개축하여 명승 학조가 기거하면서 적산사를 세웠다고 하며 200년전 京山人 屛巖 李秉璜이 岩浦에 서 移居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 후리실·후리
    • 인심이 후하다고 하여 후리실이라고 하였으며 상후·하후·중후로 나뉘어져 있다. 지금은 국도변에 위치하여 주곡을 주로 재배하여 농가소득을 올리고 있다.
  • 금봉동, 구정동, 금봉천
    • 임진왜란 때 아군의 임전 태세가 철통 같아 마치 독용산성에 조정의 삼정육조가 있는 것처럼 이를 사수 했다는 데서 유래되어 삼정육조를 합한 구정이란 뜻으로 구정동이라 하였다. 마을이 내를 따라 형성되고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많이 날아 왔다고 금봉 또는 금봉천이라 부른다.
  • 활미기, 궁항
    • 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4km 지점에 위치한 마을인데 독용산성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협곡이다. 예로부터 활로 지키기에 알맞은 전략 요충지라 하여 활미기 또는 궁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 쉬시골, 북다랑
    • 시여골에서 산성 쪽으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전해 내려 오는 말에 의하면 옛날 성산 가야 시절에 산성보다 더 놓은 산에 북을 매달아 놓고 이것을 쳐서 백성들이나 또는 이웃의 연락 장소에 각종 통신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 산성
    • 해발800m 고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대 성산 가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독용산성 안에 있었던 마을이나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다.
  • 시여골
    • 계곡 위쪽의 은광대에서 협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힘차게 흐른다고 하여 나온 이름이다. 처음에는 수력곡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시여골로 부르게 되었다.
  • 학산동
    • 금봉동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활미기를 가려면 이 마을 앞을 지나게 된다. 남향인 이 마을의 앞뒤 산세가 마치 쌍학쌍무의 형상이라 하여 예로부터 학산동이라 불렀다. 마을 뒤에는 내력이 확실하지 않은 조그마한 암자 하나가 있는데 안국사라 부르고 있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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