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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진면은 성주군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성주군의 뒷벽인 비지산(일명 빌무산:784m)과 그 북쪽 능선의 별뫼고개[성산현(星山峴):별티]로 이어진 김천시와 접경하여 동쪽은 초전면, 남쪽은 성주읍과 대가면, 서남은 금수면과 인접한다.

북부는 산악지대이고 그곳 비지산에서 발원한 이천(伊川)이 중남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며 동남으로 꿰뚫어 흐른다. 교통은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동서로 국도가 남부를 관통하고, 남북의 중앙부에는 지방도가 김천으로 이어져 있다. 면적은 62.79㎢이며, 법정 9개리, 행정 24개리, 1,700여호에 3,000여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산악의 준령과 계곡, 비옥한 농토 등의 천혜의 조건은 기원전 2~3세기부터 성주 인류문화의 발원지로, 일찍이 별뫼 부족성읍국(部族城邑國)이 형성되어 차츰 벽진가야동맹국으로 발전했다.

서기 562년 대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가야동맹국의 일원으로 깊은 역사의 역할을 다한 곳이다.

벽진가야성읍국은 3,000년 이전부터 매수리(梅水里) 수남마을을 근거로 해서 매적산(梅積山:483m)과 자산(紫山:360m)에 산성을 두고 발전해서 고령 성산면의 이리(一利:일리), 수륜면의 뒷뫼(都山:도산), 가천면의 기불(斯火:기화), 덕곡면의 가슬(加尸兮:가시혜), 칠곡 기산면의 한솔(大木:대목) 등의 성읍국과 동맹관계를 맺게 하여 고령의 대가야와 대등한 동맹 종주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서기 562년(신라 진흥 12)에 복속되어 벽진군이 되었다. 서기 923년(신라 경명왕 7년:고려 태조 6년 7월) 벽진장군 양문(良文)이 고려에 귀부하기로 하고 그의 생질 주환(主奐)을 왕건(王建)에게 보냈던바 태조가 반겨서 주환에게 원윤(元尹)의 관직을 주었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년 3월) 벽진군과 성산면(고령군 성산면)이 통합되었다.

이때를 전후로 벽진땅에는 풀골(粥谷)·밝간(明間)·암회(巖回)의 3방이 있었는데 풀골방은 가암(伽巖), 운정(雲亭), 자산(紫山), 용암동(龍巖洞), 밝간방은 해평(海平), 봉계(鳳溪), 매수동(梅水洞)이고 암회방은 외기(外基), 봉학동(鳳鶴洞)이다.

서기 1546년(명종 1) 목사 이윤경(李閏慶)이 미합방을 운곡이라 했다. 서기 1555년(명종 10)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명간·암회방을 합방해서 명암방(明岩坊)이라 했다. 서기 1914년 7월 성주면의 택정과 대가면의 가곡이 편입되었다. 서기 1988년 5월 각동(各洞)을 리(里)로 고쳤으며, 서기 1990년 4월 해평리(海平里)를 수촌리(樹村里)로 개정했다.

봉학저수지의 둑 아래 이천(伊川)의 상류에서 빌무산(784m)을 서북으로, 동쪽으로 흘러가는 협곡의 세천 어귀에 선학동(仙鶴洞)이 있고 그 남쪽 가까이로 서당골 마을과 선학동의 서편 산간에 있는 명암중(明岩中) 마을과 그 서남 세천산곡 상류에 들어앉은 한뱅이 마을에 분포해 있다.

통일신라 이후 암회방(岩回坊)이었는데 1555년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밝간방(明間坊)과 합방(合坊)하여 명암방(明岩坊)이 되고 1895년 벽진면으로 되었다. 봉학동(仙鶴洞)에는 경기도 고양에서 진양인(晋陽人) 강도창(姜道昌)이 입향했고, 새냄이 마을은 달창(達倉)의 저수지와 도로를 접한 마을인데 조선 성종 때 목사 배수광(裵繡光)이 노년을 즐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암중리(明岩中里)는 운곡방[雲谷坊. 자산리(紫山里)]의 중리(中里)와 구분해서 명암중리(明岩中里)라 했고 1600년경 성주인 도석영(都錫令)이 대대로 내려오며 산 곳이다. 성주도씨(星州都氏) 24호, 성주이씨(星州李氏) 8호, 평산신씨(平山申氏) 5호, 전주이씨(全州李氏) 5호, 김령김씨(金寧金氏) 15호, 청송심씨(靑松沈氏) 5호, 성산여씨(星山呂氏) 5호, 타성(他姓)이 25호 거주하고 있다.

  • 한밤이·대야(大夜)
    • 1600년경 이광목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 입향하였는데 마을 뒤에 수등산이 있어 등은 어두운 밤에 사용한다는 뜻에서 한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명리(明里)·명암중리(明岩中里)
    • 1600년경 도석영(都錫令)이란 사람이 마을에 입향하여 선학(仙鶴)과 대야(大夜)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리(中里)라 하였으나, 1897년 본 면이 명암방(明岩坊)과 운곡방(雲谷坊)으로 나뉘어졌을 때 운곡방(雲谷坊)의 중리와 구별하기 위해 명암중리(明岩中里)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명리(明里)로 개칭하게 되었다.
  • 새남이·새내미·봉알·조여촌(鳥餘村)·봉양(鳳陽)
    • 약 400년 전 배수광(裵繡光)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이룩하였으며, 당시 양지와 음지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이곳에 새가 많이 모여들었다고 하여 새남이라 부르다가 몇 년 후 배씨(裵氏)가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보니 새보다 큰 봉의 알과 같이 생겼다 하여 봉자를 따서 봉알이라 개칭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양지바른 남향이라고 봉양(鳳陽)이라 하였다.
  • 서당골·서당곡(書堂谷)·서당동(書堂洞)
    • 약 1800년경 이양문이란 선비가 서당을 세워 수학하던 곳이라 하여 서당골, 또는 서당곡(書堂谷)이라 부르게 되었고 11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이천이 흐르고 뒤로는 염속산의 지맥인 장군봉(將軍峰)이 있다.
  • 선학동(仙鶴洞), 자시동(自始洞), 내동[內洞(안마)]
    • 1594년경 용사지란(龍蛇之亂=龍蛇之變 임진왜란을 달리 이르는 말.)에 피란으로 상주(尙州)에서 온 남양홍씨(南陽洪氏) 홍여도(洪汝道)와 성산배씨(星山裵氏) 배문강(裵文剛)이란 두 선비가 입향한 자시동(自始洞) 마을은 1623년 (인조 1년) 7월 대홍수로 폐허가 되고 내동(內洞)으로 취락했다. 마을의 지형이 학이 외발로 몸을 지탱한 형상이며 마을 앞에서 뒷산을 보면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과 같다. 이 산이 성제봉(聖帝峰) 지맥인 학산(鶴山)이다. 강도창(姜道昌) 입향 후 학산 이름을 따서 선학동(仙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벽진면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소재지로서 소도시마을이다. 서쪽은 매적산[梅積山:마적산(馬迹山):483m), 동북은 자산(紫山:360m)의 넓은 터에 북쪽 멀리 별티에서 꿰뚫어 흐르는 이천(伊川)의 상류 비옥한 농지에 자리한 유서 깊은 벽진국의 옛터다. 소도시로 정비된 이곳은 북부의 상수촌, 서남부의 중수촌(봉산), 남부의 하수촌(원정, 석지, 대천)으로 구분된다.

1555년 목사 노경린은 영봉산(迎鳳山) 아래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착공하였고 향내 문풍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율곡 이이의 장인이기도 하다. 영봉서원은 후임 목사 금계(錦溪) 황준양(黃俊良)이 완공시켰으며 퇴계 이황이 기문을 썼다.

상수촌에는 고려말에 성주인 횡계(橫溪) 도윤길(都允吉)이 경산부 팔거방(칠곡 동명)에서 입향 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다. 중수촌 봉산마을에는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시조 삼중대광 이총언(李忩言)을 추모하고 향사하는 단각이 있고 이곳은 이씨 문중의 성지로 보존하고 있다.

하촌마을에는 성산인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 연산군 때 성주읍 불뭇골에서 이곳에 이주했고 원정 여희림의 후손 중 학덕과 명망이 높은 이들을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한 재실이 여러 곳 있다. 이 마을에는 선조 때 충남 회덕에서 진주인(晋州人) 강전(姜篆)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현재 성산여씨(星山呂氏) 122호, 성주도씨(星州都氏) 117호, 성주이씨(星州李氏) 109호, 인동장씨(仁同張氏) 77호, 김해김씨(金海金氏) 53호, 타성(他姓)이 1,105호 살고 있다.

  • 대천·대천리
    • 징기 마을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이천(伊川)이 이곳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천이라 하였으며,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장씨들이 20여 가구 살았는데 이천 둑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다.
  • 뒷마·중동(中東)
    • 1400년경 성주인 도윤길이라는 선비가 칠곡군에서 이주하였으며 영봉산(迎鳳山) 남방 천곡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수촌 마을의 중앙지 마을이라 하여 중동으로 불렀다.
  • 봉산
    • 신라말 벽진이씨의 시조 이총언 장군이 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당시 마을 앞에 큰 소가 있어 봉이 날아오고, 마을 뒤에는 연봉산이 있다고 하여 봉산이라 불렀다.
  • 부흥·부흥리
    • 이 마을은 1600년경 도한국(都翰國)이란 사람이 이룩하였으며, 모든 마을 사람이 부자가 되고 후손들이 흥한다는 뜻으로 부흥리라 하였고, 현재 22가구가 살고 있으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많고 주로 수박·참외 등의 원예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상수촌
    • 수촌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어 북쪽에 위치한 중동·중평·부흥리·행촌을 상수촌이라 하며 약 75가구가 살고 있는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약 80% 정도 살고 있으며 원예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수촌
    •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수촌의 남쪽에 위치한 봉산·석지·원정·대천을 하수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약 250가구가 살고 있는데 80%가 여씨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수박·참외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 석지
    • 약 500년 전 조선 초기 성산인 여희림(呂希臨)이 이 마을에 입향하면서, 마을을 "돌과 같이 굳혀야 한다"라는 뜻에서 석지라 했다고 전해진다.
  • 중평
    • 부흥리와 중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며 큰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으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12가구 살고 있다.
  • 행촌
    • 1400년경 중동과 같이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에 살구나무가 많이 있다고 하여 행촌이라고 불렀다. 현재 13가구가 살고 있는데 90% 이상이 도씨 성을 가진 가구이며 수박·참외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성주군과 김천시의 경계인 별뫼재[성산현(星山峴):별티고개]에서 남쪽으로 봉학지(鳳鶴池)에 이르는 벽진의 북단부이다. 위쪽 군 경계의 별뫼(星山:성산)마을과 그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앉은 수근(水根)마을과 저수지를 가까이로 한 달창(達倉)마을과 초전면의 안달밭으로 향하는 산곡의 달밭(月田:월전)마을로 구분한다.

북위 36°00′00″, 동경 128°12′00″에 있는 달창마을은 1756년 목사 김치온(金致溫)이 양곡의 보관을 위해 이곳에 창고를 설치해서 달밭(月田)마을의 지명을 따라 달창이라 했다. 1857년 목사 김동선(金東選)은 탈세곡 4만석을 환수하여 크게 보수했다. 달밭(月田)마을은 초전과 김천시 경계의 별뫼[성산(星山):715m]와 그 동편의 달뫼[월산(月山):611m]가 있고 그사이에 달밭마을을 안달밭[내월전(內月田)]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벽진의 달밭마을을 바깥달밭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동쪽에 봉양산(鳳陽山:588m)과의 협곡에 자리하여 학문에 심취하는 은사의 마을인데 선조 때 김령인(金寧人) 김연(金演 1569년)이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후손은 군내 도처에 살고 있다. 성씨 분포는 김령김씨(金寧金氏) 35호, 성산여씨(星山呂氏) 16호, 성주이씨(星州李氏) 8호, 해평김씨(海平金氏) 7호, 그밖에 타성(他姓) 61호이다.

  • 달밭·달전(達田)·월전(月田)
    • 바깥달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을 모양이 반달같이 생겼기에 달밭이라 지칭하다가 달밭의 뜻을 가진 한자어 월전(月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달창(達倉)·창리(倉里)
    • 조선시대 국세 현물 보관창고가 있어 김천지역 현물세와 곡물 일부를 이 창고에 보관한 것이 유래가 되어 달창, 또는 창리라 부르게 되었다.
  • 빌미산·수근(水根)
    • 명암방(明岩坊)과 운곡방(雲谷坊)에서 제일 높은 산령(山嶺)에 위치하였으며, 이천의 상류로 유수의 근원이 이곳에 있다고 하여 수근(水根)이라 불렀고, 한발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여 祈(빌 기)를 따서 빌미산이라고도 구전되고 있다.

벽진면의 남부로 이천을 동쪽에 두고 대가면과 인접하여 솟질, 발간이, 집실, 종자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밝간방(明間坊)에 속해 방의 중심지였던 이곳 솟질마을은 고려 초 성주인(星州人) 이견수(李堅守)가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연산군 때 창원인(昌原人) 유양필(兪良弼)이 금릉(金陵 경상북도 김천의 옛 이름)에서 입향하였다. 조선 초 학포(學圃) 유익명(兪益明)은 경상우도(慶尙右道) 도절제사(都節制使)와 명나라 정조사(正朝使)로 활약했고, 그의 단비(壇碑)가 있으며 사미정(四美亭) 유원(兪遠)을 향사하는 정사(亭舍)가 있다.

숙종 때 안동에서 광주인(光州人) 탁선의(卓善儀)가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아 그 후손이 남아 있다. 선조 때는 청도(淸道) 백곡(栢谷)에서 김해인(金海人) 김풍(金豊)이 입향하여 이곳과 우복실에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발간이 마을에는 1630년경 이유형(李惟亨)이 들어와 살았다. 집실마을에는 고려 때 참지문하사 남양인(南陽人) 홍언수(洪彦脩)가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조선시대 해평군 김수의 아들 김관상(金寬尙)과 참의 조원수(趙元壽)가 입향했다.

선조 때는 인동인 옹(翁) 장봉한[張鳳翰(1566-1644)]과 그의 아들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1598-1660)]는 충절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씨 집성마을이다. 종자골에는 창원인(昌原人) 유수(兪遂)가 토호로 있으면서 종곡(種穀 씨앗으로 쓸 곡식)의 창고를 지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성씨별 분포는 인동장씨(仁同張氏) 70호, 성주이씨(星州李氏) 55호, 창원유씨(昌原兪氏) 35호, 광산탁씨(光山卓氏) 13호, 타성(他姓) 56호이다.

  • 솥질·정곡(鼎谷)
    • 약 800년전 이견수(李堅守)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이룩하였으며 지형이 솥과 같이 생겼고 마을 앞 도랑에 너비가 1.2m, 길이 3m 정도의 솥 모양 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솥질이라 했으며, 그 뒤 이견수가 ‘정(鼎 솥 정)’자를 붙여 정곡(鼎谷)이라 불렀다.
  • 발간이·명간(明澗)
    • 1630년경 이유형(李惟亨)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 들이 넓고 달이 뜨면 다른 마을보다 밝다고 하여 발간이라 부르다가 30여 년 후 이유형의 아들 이보림(李寶林)이 정곡(鼎谷)과의 사이에 있는 마을 앞 들이 넓고 밝다고 하여 명간(明澗)이라 불렀다고 한다.
  • 집실
    • 고려말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지낸 홍언수(洪彦修)가 불사이군의 충절로 두문동에서 집실로 이주하여 고을 사람들은 서울에서 대가집이 왔다 하여 대가곡(大家谷)이라 했으며, 1600년경 유수(兪遂)가 만석거부로 있었다. 임란 때 유수가 사망하고 인동(仁同)에서 장봉한(張鳳翰)이라는 선비가 이주하여 가곡(家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 종자골
    • 부자였던 유수(兪遂)가 종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하여 종자골이라 불렀다. 이 마을의 지형은 낮은 산들이 삼면을 오목하게 둘러쳐서 마을이 아늑하고 인심이 좋으며 주민들이 모두가 잘사는 부촌을 이루고 있다.
  • 해동청풍비(海東淸風碑)
    • 인동인(仁同人) 자하(紫下) 장기석[張基奭(1860∼1911)]의 충절을 백이숙제(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에 비유한 비명이고 높이는 3.2m이다. 1946년 광복이 되어 유림의 뜻으로 쇳조각으로 부서진 빗돌을 붙여서 세웠고 그 부인의 열녀비(烈女碑)도 세웠다. 1990년 지방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 대경정(大卿亭)
    • 솟질마을에 흙을 모아 산을 만들어서 나무를 심은 옛날의 동제(마을 사람들이 마을을 지켜주는 신인 동신에게 공동으로 지내는 제사) 터인데 지금은 마을 놀이터로 쓰이고 있다.
  • 계신재(繼愼齋)
    • 인동인(仁同人) 장봉한(張鳳翰)과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를 제향하는 4칸 겹집의 재실이다.
  • 사미정(四美亭)
    • 창원인(昌原人) 유원(兪遠)을 위한 정자이다.
  • 성석재(惺石齋)
    • 광산인(光山人) 성석재(惺石齋) 탁제린(卓濟麟)을 위한 재실이다.
  • 농와재(農窩齋)
    • 장봉한(張鳳翰)의 후손인 장택옥[張擇玉(1639∼1689)]의 향사소(享祀所)이다.
  • 웃점복·점복(占福)·자산(紫山)
    • 1500년경 인동장씨(仁同張氏)와 연주현씨(延州玄氏)의 두 선비가 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자양산(紫陽山) 아래에 위치한다고 하여 자산(紫山)이라 불렀으며, 그 후 임진왜란 때 전라북도 정읍에서 정세로(鄭世老)가 피란 와서 전북(全北)이라 부르다가 후손들이 점복(占福)으로 개칭하고, 하점복(下占福)에 대한 웃마을이라 해서 웃점복이라 불렀다.
  • 아랫점복·하점복(下占福)
    • 점복(占福)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하점복(下占福)이라 불렀다.
  • 귀령골·귀령곡(貴靈谷)·영동(靈洞)
    • 1500년경 이순(李舜)이라는 사람이 이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고령(古靈) 목사 이수일(李守一)이 피란 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귀령곡이라 부르다가 그 후 다시 영동(靈洞)이라 불렀다.
  • 산느말·사르말·산전(山田)
    • 1600년경 이순(李舜)의 후손이 산 아래 밭에 이주하여 살았다고 산느말, 또는 산전(山田)이라 했다.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다.
  • 중리(中里)
    • 1621년경 허억(許億)이란 사람이 충주에서 무과에 등과하였다. 부사과로 무신란에 군공으로 가선대부(贈嘉大夫)를 지냈고 그 후 1630년에 충주에서 이주하여 중리 마을을 개척하였다. 안봉사(安峰寺)와 영동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 후손이 전국적으로 수백 호가 산재해 있으며 마을에는 현재 20여 호가 살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동구에는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벽진면 소재지에서 금수면 방향으로 이천(伊川)을 건너 30번 국도를 접해 마을 뒤로 매적산(梅積山:483m)이 있는 고대 벽진가야부족성읍(碧珍伽倻部族城邑)의 본원지다. 자연촌은 무나물[수촌(樹村)], 다징기[가수촌(加樹村)], 새월[신월(新月)], 불무골[야동(冶洞)]로 분포되어 있다.

이곳은 벽진가야국의 옛터로 알려져 있고, 가야동맹권의 고성에서 볼 수 있는 벽진가야의 왕세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시조 벽로왕(碧露王)은 영원기축년(永元己丑年. 서기 89)에 올라 재위는 87년간이었고, 2대 이차왕(尼次王)은 영건무진(永建戊辰) 3년(서기 128)에 올라 재위 50년간이었고, 3대 유충왕(幼沖王)은 광화경신(光和庚申) 3년(서기 180)에 올라 재위는 70년간인데, 가평원년기사(嘉平元年己巳. 서기 249)에 동맹이 합동되었다는 것이다. 무나물은 벽진인 이근영(李根英)이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던 곳이며, 다징기에는 성산인 여암(呂巖)이 살았으며, 헌종 때 안동에서 의령인(宜寧人) 여억엽(余憶燁)이 입향하였다. 새월은 광해군 때 안동에서 능성인(綾城人) 구종(具琮)이 입향했고, 불무골의 풀뭇가마터는 벽진국의 병기와 농기 등 생활용구를 생산·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능성구씨(綾城具氏) 35호, 경산이씨(京山李氏) 29호, 남평문씨(南平文氏) 25호, 밀양박씨(密陽朴氏) 23호, 김해김씨(金海金氏) 16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32호 거주하고 있다.

  • 무나물·수남(水南)
    • 조선 초기 홍유하(洪有河)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흐르는 물이 남방에 있다고 하여 무나물, 또는 하남(河南)이라 부르다가 300여 년 전 이광필(李光弼)이란 선비가 하남(河南)을 수남(水南)으로 개칭하였으며, 경산인(京山人) 만학재(晩學齋) 이하상(李夏相)의 후손이 마을에 살고 있다.
  • 하수남(下水南)
    • 1700년경 벽진인 이근영(李根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수남 아래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하수남(下水南)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다징기·가수촌(加樹村)
    • 1700년경 성산여씨(星山呂氏)와 밀양박씨(密陽朴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징기와 이천을 사이에 두고 인접하여 있으므로 다징기 또는 가수촌(加樹村)이라 하였다.
  • 새월·신월(新月)
    • 약 400년 전 구상순(具相舜)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후 지형이 초생달, 또는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새월이라 하였으며, 그 후 구씨의 자손과 김해김씨(金海金氏)·남평문씨(南平文氏)의 3성 대표가 모여 신월(新月)로 개명하여 불렀다.
  • 불밋골·야동(冶洞)
    • 약 1600년경에 개척하였으며 마을 뒷산이 불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불밋골 야동(冶洞)이라 하였다. 구씨의 후손들이 20여 가구 살고 있다.

면소재지 동쪽 구릉지에 위치하며 대바우, 우복실, 나복실, 은행정마을로 구분되는 옛날 운곡방(雲谷坊)의 본거지이다. 대바우마을은 마을에 대바위가 있어 얻어진 지명이다.

1500년대 초에는 해평군(海平君)의 후손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1437-1487)]의 외손인 남양인(南陽人) 대암(臺岩) 홍계현(洪繼玄)이 외조 지지당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명을 떨친 곳이다. 선조 때 충청북도 목천(木川)에서 김해인(金海人) 김풍(金豊)이 입향하여 현재 후손이 살고 있고, 숙종 때는 대구에서 달성인(達城人) 서죽량(徐竹凉)이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다. 나복실은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집성마을로 마을 뒤에는 벽진저수지가 있다.

은행정 마을은 고려말에는 횡계리(橫溪里)라 했으며, 이때 경산부(京山府) 팔현(八縣. 칠곡군 동명면)에는 횡계 도윤길(都允吉)이 입향하여 후손 도맹녕(都孟寧)과 그 아들 행정(杏亭) 도형(都衡), 운재(雲齋) 도균(都勻), 암곡(岩谷) 도세순(都世純)의 대대로 내려오며 사는 곳이 되었다. 성주도씨(星州都氏) 45호, 순흥안씨(順興安氏) 15호, 목천우씨(木川于氏) 14호, 달성서씨(達城徐氏) 13호, 광산노씨(光山盧氏) 11호, 그밖에 타성(他姓) 45호가 살고 있다.

  • 나복실(羅福室)·나복동(羅福洞)·나부동(羅浮洞)·운곡(雲谷)
    • 벽진저수지 아래 도로를 접하여 면소재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1914년 이전에는 운곡방의 중심지이며, 성주도씨 집성촌이다.
  • 대바우·대암(大岩)
    • 조선 초에 홍계현(洪繼玄)이 이 마을을 이룩하여 마을 앞 야산에 큰 바위가 많아 대바우, 또는 대암(大岩)이라 불렀다. 현재 62가구가 살고 있으며 특용작물(참외·수박)의 촉성재배로 많은 소득을 올려 부촌을 이루고 있다.
  • 은행정(銀杏亭)·행정동(杏亭洞)
    • 1500년경 도형(都衡)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마을 앞 큰 은행나무가 있어 자기의 호인 행정(杏亭)과 은행나무의 은자(銀字)를 따서 은행정(銀杏亭)이라 했으며, 지금도 마을 앞에는 둘레 4m나 되는 고목 은행나무가 있다.
  • 우복실(于福室)·우복[牛福(于幅)]·우동[于洞(愚洞)]
    • 임진왜란 당시 통정대부를 지낸 김해김씨(金海金氏) 문중의 한 선비가 이룩하였으며, 마을 좌우의 산 지형이 소의 형상이라 하여 우복(牛福)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우복(于福)으로 개칭하였으며 우동(于洞)이라고도 하였다.

벽진의 성봉(聖峰) 매적산[梅積山:마적산(馬迹山):483m]이 가야산 쪽으로 머리를 하고 ’대(大)’자의 능선으로 하여 솟았고 그 대자의 가랑이 골짜기에 외기저수지가 있고 그 못 둑 아래는 장기(長基)마을이 면소재지와 근접하여 서북쪽에 터 잡고 있다. 그 북쪽의 김천으로 향한 도로변에 외원(外院)마을과 이곳에서 서쪽 산곡으로 약 5㎞ 외진 곳에 원동[院洞:내원(內院)]마을이 자리해 있다.

장기(長基)마을은 성산인 여양유(呂良裕)의 후손 서암(西岩) 여효증[呂孝曾(1604-1679)]의 대대로 내려오며 살던 곳이며, 원동마을은 그 뒤편 골짜기의 한뱅이 마을과 함께 선비들이 은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도학(道學)의 서당마을이다. 영조 때 성주인(星州人) 도상욱(都尙郁)이 노년에 성리학에 심취하여 저서와 후학 교육에 힘쓴 곳이다. 성산여씨(星山呂氏) 42호, 김해김씨(金海金氏) 22호, 성주도씨(星州都氏) 16호, 여양진씨(驪陽陳氏) 8호, 동래정씨(東萊鄭氏) 6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13호 살고 있다.

  • 장기(長基)·장귀(長歸·將歸)
    • 1600년경 성산인(星山人) 여효증(呂孝曾)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장귀정(將歸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하고 정자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장귀(將歸)라 하였으나, 후손들이 마을의 터가 길다고 하여 장기(長基)로 개칭하게 되었다.
  • 외원(外院)
    • 영봉산(迎鳳山) 아래 천곡서원(川谷書院) 밖에 위치한다고 하여 원외(院外)라 하였으나, 진시재(陳是載)라는 선비가 마을 앞 들을 개간하여 원외(院外)를 외원(外院)으로 개칭하였다.
  • 안원이·내원(內院)·원흥(元興)
    • 해주오씨(海州吳氏)가 이 마을에 입향하여 부촌이 될 것을 기원하면서 원흥(元興)이라 하였다가 영봉산(迎鳳山) 아래 천곡서원(川谷書院) 안에 위치한다고 하여 안원이라 하였다. 그 후 도상욱(都尙郁)이라는 선비가 내원(內院)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벽진의 동남부 이천(伊川)과 30번 국도와 비옥한 평야를 펼치며 생활환경이 편리하다. 소바우, 택정, 관동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이곳의 택정(澤亭)마을 등 일부가 성주읍에서 편입되었고 소바우마을에는 순흥안씨(順興安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대대로 내려오며 살고 있으며, 선조 때 안의달(安義達), 안성달(安成達), 안의발(安義發) 3형제가 봉계(鳳溪)의 종자골에 입향해서 그 후손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택정마을에는 고려 우왕 때 금산군수(金山郡守)를 지낸 성주인(星山人) 이여신(李汝信)과 경사에 능하고 선조 때 진사가 된 산택당(山澤堂) 이린(李隣),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용암공(庸菴公) 이염(李琰)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관동(官洞)마을에는 성종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청주인(淸州人) 한만손(韓萬孫)이 양주에서 입향했고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26호, 김해김씨(金海金氏) 15호, 성산이씨(星山李氏) 13호, 평산신씨(平山申氏) 10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36호이다.

  • 소바우[우암(牛岩)]·금암(金岩)
    • 1600년경 의성인(義城人) 김건오(金建五)가 이 마을에 입향하였으며 마을 주변의 큰 바위가 소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소바우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바위에 금이 있다고 하여 깨어보니 과연 금이 많이 나왔는지라 이 마을을 금암(金岩)이라고도 불렀다.
  • 관동(官洞)
    • 마을 뒷산에 벼슬한 사람들의 묘를 쓰고 묘 앞에 재실을 지어 그 현판에 관동(官東)이라 쓴 것이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택정(澤亭)
    • 1500년경 성주인(星山人) 이린(李隣)이 이주하여 본인의 호를 따서 산택정(山澤亭)이란 재실(齋室)을 짓고 마을 앞에 연못을 만들어 그 못 가운데 정자를 세웠으므로 이 선비의 호인 산택당(山澤堂)의 택(澤)과 못 가운데 있는 정자의 정자(亭字)를 따서 택정(澤亭)이라 하였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7-21 15: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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