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면은 성주군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성주군의 뒷벽인 비지산(일명 빌무산:784m)과 그 북쪽 능선의 별뫼고개[성산현(星山峴):별티]로 이어진 김천시와 접경하여 동쪽은 초전면, 남쪽은 성주읍과 대가면, 서남은 금수면과 인접한다.
북부는 산악지대이고 그곳 비지산에서 발원한 이천(伊川)이 중남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며 동남으로 꿰뚫어 흐른다. 교통은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동서로 국도가 남부를 관통하고, 남북의 중앙부에는 지방도가 김천으로 이어져 있다. 면적은 62.79㎢이며, 법정 9개리, 행정 24개리, 1,700여호에 3,000여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산악의 준령과 계곡, 비옥한 농토 등의 천혜의 조건은 기원전 2~3세기부터 성주 인류문화의 발원지로, 일찍이 별뫼 부족성읍국(部族城邑國)이 형성되어 차츰 벽진가야동맹국으로 발전했다.
서기 562년 대가야국이 신라에 병합될 때까지 가야동맹국의 일원으로 깊은 역사의 역할을 다한 곳이다.
벽진가야성읍국은 3,000년 이전부터 매수리(梅水里) 수남마을을 근거로 해서 매적산(梅積山:483m)과 자산(紫山:360m)에 산성을 두고 발전해서 고령 성산면의 이리(一利:일리), 수륜면의 뒷뫼(都山:도산), 가천면의 기불(斯火:기화), 덕곡면의 가슬(加尸兮:가시혜), 칠곡 기산면의 한솔(大木:대목) 등의 성읍국과 동맹관계를 맺게 하여 고령의 대가야와 대등한 동맹 종주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서기 562년(신라 진흥 12)에 복속되어 벽진군이 되었다. 서기 923년(신라 경명왕 7년:고려 태조 6년 7월) 벽진장군 양문(良文)이 고려에 귀부하기로 하고 그의 생질 주환(主奐)을 왕건(王建)에게 보냈던바 태조가 반겨서 주환에게 원윤(元尹)의 관직을 주었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년 3월) 벽진군과 성산면(고령군 성산면)이 통합되었다.
이때를 전후로 벽진땅에는 풀골(粥谷)·밝간(明間)·암회(巖回)의 3방이 있었는데 풀골방은 가암(伽巖), 운정(雲亭), 자산(紫山), 용암동(龍巖洞), 밝간방은 해평(海平), 봉계(鳳溪), 매수동(梅水洞)이고 암회방은 외기(外基), 봉학동(鳳鶴洞)이다.
서기 1546년(명종 1) 목사 이윤경(李閏慶)이 미합방을 운곡이라 했다. 서기 1555년(명종 10)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명간·암회방을 합방해서 명암방(明岩坊)이라 했다. 서기 1914년 7월 성주면의 택정과 대가면의 가곡이 편입되었다. 서기 1988년 5월 각동(各洞)을 리(里)로 고쳤으며, 서기 1990년 4월 해평리(海平里)를 수촌리(樹村里)로 개정했다.
봉학저수지의 둑 아래 이천(伊川)의 상류에서 빌무산(784m)을 서북으로, 동쪽으로 흘러가는 협곡의 세천 어귀에 선학동(仙鶴洞)이 있고 그 남쪽 가까이로 서당골 마을과 선학동의 서편 산간에 있는 명암중(明岩中) 마을과 그 서남 세천산곡 상류에 들어앉은 한뱅이 마을에 분포해 있다.
통일신라 이후 암회방(岩回坊)이었는데 1555년 목사 노경린(盧慶麟)이 밝간방(明間坊)과 합방(合坊)하여 명암방(明岩坊)이 되고 1895년 벽진면으로 되었다. 봉학동(仙鶴洞)에는 경기도 고양에서 진양인(晋陽人) 강도창(姜道昌)이 입향했고, 새냄이 마을은 달창(達倉)의 저수지와 도로를 접한 마을인데 조선 성종 때 목사 배수광(裵繡光)이 노년을 즐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명암중리(明岩中里)는 운곡방[雲谷坊. 자산리(紫山里)]의 중리(中里)와 구분해서 명암중리(明岩中里)라 했고 1600년경 성주인 도석영(都錫令)이 대대로 내려오며 산 곳이다. 성주도씨(星州都氏) 24호, 성주이씨(星州李氏) 8호, 평산신씨(平山申氏) 5호, 전주이씨(全州李氏) 5호, 김령김씨(金寧金氏) 15호, 청송심씨(靑松沈氏) 5호, 성산여씨(星山呂氏) 5호, 타성(他姓)이 25호 거주하고 있다.
벽진면의 중남부에 위치한 면소재지로서 소도시마을이다. 서쪽은 매적산[梅積山:마적산(馬迹山):483m), 동북은 자산(紫山:360m)의 넓은 터에 북쪽 멀리 별티에서 꿰뚫어 흐르는 이천(伊川)의 상류 비옥한 농지에 자리한 유서 깊은 벽진국의 옛터다. 소도시로 정비된 이곳은 북부의 상수촌, 서남부의 중수촌(봉산), 남부의 하수촌(원정, 석지, 대천)으로 구분된다.
1555년 목사 노경린은 영봉산(迎鳳山) 아래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착공하였고 향내 문풍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율곡 이이의 장인이기도 하다. 영봉서원은 후임 목사 금계(錦溪) 황준양(黃俊良)이 완공시켰으며 퇴계 이황이 기문을 썼다.
상수촌에는 고려말에 성주인 횡계(橫溪) 도윤길(都允吉)이 경산부 팔거방(칠곡 동명)에서 입향 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다. 중수촌 봉산마을에는 벽진이씨(碧珍李氏)의 시조 삼중대광 이총언(李忩言)을 추모하고 향사하는 단각이 있고 이곳은 이씨 문중의 성지로 보존하고 있다.
하촌마을에는 성산인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 연산군 때 성주읍 불뭇골에서 이곳에 이주했고 원정 여희림의 후손 중 학덕과 명망이 높은 이들을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한 재실이 여러 곳 있다. 이 마을에는 선조 때 충남 회덕에서 진주인(晋州人) 강전(姜篆)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현재 성산여씨(星山呂氏) 122호, 성주도씨(星州都氏) 117호, 성주이씨(星州李氏) 109호, 인동장씨(仁同張氏) 77호, 김해김씨(金海金氏) 53호, 타성(他姓)이 1,105호 살고 있다.
성주군과 김천시의 경계인 별뫼재[성산현(星山峴):별티고개]에서 남쪽으로 봉학지(鳳鶴池)에 이르는 벽진의 북단부이다. 위쪽 군 경계의 별뫼(星山:성산)마을과 그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앉은 수근(水根)마을과 저수지를 가까이로 한 달창(達倉)마을과 초전면의 안달밭으로 향하는 산곡의 달밭(月田:월전)마을로 구분한다.
북위 36°00′00″, 동경 128°12′00″에 있는 달창마을은 1756년 목사 김치온(金致溫)이 양곡의 보관을 위해 이곳에 창고를 설치해서 달밭(月田)마을의 지명을 따라 달창이라 했다. 1857년 목사 김동선(金東選)은 탈세곡 4만석을 환수하여 크게 보수했다. 달밭(月田)마을은 초전과 김천시 경계의 별뫼[성산(星山):715m]와 그 동편의 달뫼[월산(月山):611m]가 있고 그사이에 달밭마을을 안달밭[내월전(內月田)]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벽진의 달밭마을을 바깥달밭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동쪽에 봉양산(鳳陽山:588m)과의 협곡에 자리하여 학문에 심취하는 은사의 마을인데 선조 때 김령인(金寧人) 김연(金演 1569년)이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후손은 군내 도처에 살고 있다. 성씨 분포는 김령김씨(金寧金氏) 35호, 성산여씨(星山呂氏) 16호, 성주이씨(星州李氏) 8호, 해평김씨(海平金氏) 7호, 그밖에 타성(他姓) 61호이다.
벽진면의 남부로 이천을 동쪽에 두고 대가면과 인접하여 솟질, 발간이, 집실, 종자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밝간방(明間坊)에 속해 방의 중심지였던 이곳 솟질마을은 고려 초 성주인(星州人) 이견수(李堅守)가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연산군 때 창원인(昌原人) 유양필(兪良弼)이 금릉(金陵 경상북도 김천의 옛 이름)에서 입향하였다. 조선 초 학포(學圃) 유익명(兪益明)은 경상우도(慶尙右道) 도절제사(都節制使)와 명나라 정조사(正朝使)로 활약했고, 그의 단비(壇碑)가 있으며 사미정(四美亭) 유원(兪遠)을 향사하는 정사(亭舍)가 있다.
숙종 때 안동에서 광주인(光州人) 탁선의(卓善儀)가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아 그 후손이 남아 있다. 선조 때는 청도(淸道) 백곡(栢谷)에서 김해인(金海人) 김풍(金豊)이 입향하여 이곳과 우복실에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발간이 마을에는 1630년경 이유형(李惟亨)이 들어와 살았다. 집실마을에는 고려 때 참지문하사 남양인(南陽人) 홍언수(洪彦脩)가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고, 조선시대 해평군 김수의 아들 김관상(金寬尙)과 참의 조원수(趙元壽)가 입향했다.
선조 때는 인동인 옹(翁) 장봉한[張鳳翰(1566-1644)]과 그의 아들 지분헌(知分軒) 장이유[張以兪(1598-1660)]는 충절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씨 집성마을이다. 종자골에는 창원인(昌原人) 유수(兪遂)가 토호로 있으면서 종곡(種穀 씨앗으로 쓸 곡식)의 창고를 지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성씨별 분포는 인동장씨(仁同張氏) 70호, 성주이씨(星州李氏) 55호, 창원유씨(昌原兪氏) 35호, 광산탁씨(光山卓氏) 13호, 타성(他姓) 56호이다.
벽진면 소재지에서 금수면 방향으로 이천(伊川)을 건너 30번 국도를 접해 마을 뒤로 매적산(梅積山:483m)이 있는 고대 벽진가야부족성읍(碧珍伽倻部族城邑)의 본원지다. 자연촌은 무나물[수촌(樹村)], 다징기[가수촌(加樹村)], 새월[신월(新月)], 불무골[야동(冶洞)]로 분포되어 있다.
이곳은 벽진가야국의 옛터로 알려져 있고, 가야동맹권의 고성에서 볼 수 있는 벽진가야의 왕세표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시조 벽로왕(碧露王)은 영원기축년(永元己丑年. 서기 89)에 올라 재위는 87년간이었고, 2대 이차왕(尼次王)은 영건무진(永建戊辰) 3년(서기 128)에 올라 재위 50년간이었고, 3대 유충왕(幼沖王)은 광화경신(光和庚申) 3년(서기 180)에 올라 재위는 70년간인데, 가평원년기사(嘉平元年己巳. 서기 249)에 동맹이 합동되었다는 것이다. 무나물은 벽진인 이근영(李根英)이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던 곳이며, 다징기에는 성산인 여암(呂巖)이 살았으며, 헌종 때 안동에서 의령인(宜寧人) 여억엽(余憶燁)이 입향하였다. 새월은 광해군 때 안동에서 능성인(綾城人) 구종(具琮)이 입향했고, 불무골의 풀뭇가마터는 벽진국의 병기와 농기 등 생활용구를 생산·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능성구씨(綾城具氏) 35호, 경산이씨(京山李氏) 29호, 남평문씨(南平文氏) 25호, 밀양박씨(密陽朴氏) 23호, 김해김씨(金海金氏) 16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32호 거주하고 있다.
면소재지 동쪽 구릉지에 위치하며 대바우, 우복실, 나복실, 은행정마을로 구분되는 옛날 운곡방(雲谷坊)의 본거지이다. 대바우마을은 마을에 대바위가 있어 얻어진 지명이다.
1500년대 초에는 해평군(海平君)의 후손 지지당(止止堂) 김맹성[金孟性(1437-1487)]의 외손인 남양인(南陽人) 대암(臺岩) 홍계현(洪繼玄)이 외조 지지당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명을 떨친 곳이다. 선조 때 충청북도 목천(木川)에서 김해인(金海人) 김풍(金豊)이 입향하여 현재 후손이 살고 있고, 숙종 때는 대구에서 달성인(達城人) 서죽량(徐竹凉)이 입향하여 대대로 내려오며 살았다. 나복실은 성주도씨(星州都氏)의 집성마을로 마을 뒤에는 벽진저수지가 있다.
은행정 마을은 고려말에는 횡계리(橫溪里)라 했으며, 이때 경산부(京山府) 팔현(八縣. 칠곡군 동명면)에는 횡계 도윤길(都允吉)이 입향하여 후손 도맹녕(都孟寧)과 그 아들 행정(杏亭) 도형(都衡), 운재(雲齋) 도균(都勻), 암곡(岩谷) 도세순(都世純)의 대대로 내려오며 사는 곳이 되었다. 성주도씨(星州都氏) 45호, 순흥안씨(順興安氏) 15호, 목천우씨(木川于氏) 14호, 달성서씨(達城徐氏) 13호, 광산노씨(光山盧氏) 11호, 그밖에 타성(他姓) 45호가 살고 있다.
벽진의 성봉(聖峰) 매적산[梅積山:마적산(馬迹山):483m]이 가야산 쪽으로 머리를 하고 ’대(大)’자의 능선으로 하여 솟았고 그 대자의 가랑이 골짜기에 외기저수지가 있고 그 못 둑 아래는 장기(長基)마을이 면소재지와 근접하여 서북쪽에 터 잡고 있다. 그 북쪽의 김천으로 향한 도로변에 외원(外院)마을과 이곳에서 서쪽 산곡으로 약 5㎞ 외진 곳에 원동[院洞:내원(內院)]마을이 자리해 있다.
장기(長基)마을은 성산인 여양유(呂良裕)의 후손 서암(西岩) 여효증[呂孝曾(1604-1679)]의 대대로 내려오며 살던 곳이며, 원동마을은 그 뒤편 골짜기의 한뱅이 마을과 함께 선비들이 은거하여 수도(修道)하던 도학(道學)의 서당마을이다. 영조 때 성주인(星州人) 도상욱(都尙郁)이 노년에 성리학에 심취하여 저서와 후학 교육에 힘쓴 곳이다. 성산여씨(星山呂氏) 42호, 김해김씨(金海金氏) 22호, 성주도씨(星州都氏) 16호, 여양진씨(驪陽陳氏) 8호, 동래정씨(東萊鄭氏) 6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13호 살고 있다.
벽진의 동남부 이천(伊川)과 30번 국도와 비옥한 평야를 펼치며 생활환경이 편리하다. 소바우, 택정, 관동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이곳의 택정(澤亭)마을 등 일부가 성주읍에서 편입되었고 소바우마을에는 순흥안씨(順興安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 평산신씨(平山申氏)가 대대로 내려오며 살고 있으며, 선조 때 안의달(安義達), 안성달(安成達), 안의발(安義發) 3형제가 봉계(鳳溪)의 종자골에 입향해서 그 후손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택정마을에는 고려 우왕 때 금산군수(金山郡守)를 지낸 성주인(星山人) 이여신(李汝信)과 경사에 능하고 선조 때 진사가 된 산택당(山澤堂) 이린(李隣),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낸 용암공(庸菴公) 이염(李琰)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관동(官洞)마을에는 성종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낸 청주인(淸州人) 한만손(韓萬孫)이 양주에서 입향했고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순흥안씨(順興安氏) 26호, 김해김씨(金海金氏) 15호, 성산이씨(星山李氏) 13호, 평산신씨(平山申氏) 10호, 그밖에 타성(他姓)이 36호이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7-21 15:07: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