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碧珍面은 星州郡의 서북부에 위치하고 성주군의 뒷벽인 斐旨山(一名 乞手山:784m)과 그 북쪽 능선의 별뫼고개(星山峴:별티)로 이어진 金泉市와 접경하여 동쪽은 草田面, 남쪽은 星州邑과 大家面, 서남은 金水面과 인접한다.

북부는 산악지대이고 그 곳 비지산에서 發源한 伊川이 중남부의 비옥한 충적평야를 이루며 동남으로 貫流한다. 교통은 面所在地를 중심으로 동서로 國道가 남부를 관통하고, 남북의 중앙부위에는 地方道가 金泉으로 이어져 있다. 面積은 62.41㎢ 이며, 법정 9개리, 행정 24개리, 1,500여호에 4,700여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다.

산악의 峻嶺과 溪谷, 비옥한 농토 등의 天惠의 조건은 기원전 2∼3세기부터 星州 人類文化의 發源地로, 일찍이 별뫼 部族城邑國이 형성되어 차츰 碧珍伽倻同盟國으로 발전했다.

서기 562년 대가야국이 新羅에 병합될 때까지 가야동맹국의 一員으로 깊은 역사의 역할을 다한 곳이다.

碧珍伽倻城邑國은 3,000년 이전부터 梅水里 수남마을을 근거로 해서 梅積山(483)과 紫山(360)에 山城을 두고 발전해서 고령 星山面의 이리(一利), 수륜면의 뒷뫼(都山), 가천면의 기불(斯火;기화), 덕곡면의 가슬(加尸兮), 칠곡 기산면의 한솔(大木 ) 등의 성읍국과 동맹관계를 맺게하여 고령의 대가야와 대등한 동맹종주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서기 562년(신라 진흥?12)에 복속되어 벽진군이 되었다. 서기 923년(신라 경명왕 7;고려 太祖 6년7월) 碧珍將軍 良文이 고려에 歸附키로 하고 그의 생질 主煥을 王建에게 보냈던 바 太祖가 반겨서 주환에게 元尹의 관직을 주었다. 서기 940년(고려 태조 23년 3월) 碧珍郡과 星山郡(고령군 성산면)이 통합되었다.

이때를 전후로 벽진땅에는 粥谷(풀곡)·明間(밖간)·巖回(마회)의 3坊이 있었는데 粥谷坊은 伽巖, 雲亭, 紫山, 龍巖里, 明間坊은 海平, 鳳溪, 梅水里이고 巖回坊은 外基, 鳳鶴里이다.

서기 1546년(명종 1) 목사 李閏慶이 미합방을 운곡이라 했다. 서기 1555년(명종 10) 목사 盧慶麟이 명간·암회방을 합방해서 明岩坊이라 했다. 서기 1895년(고종 32) 5월 坊을 面으로 하여 雲谷面·明岩面이라 했다. 서기 1914년 3월 운곡·明岩面을 통합하여 碧珍面이라 했다. 서기 1914년 7월 성주면의 택정과 대가면의 家谷이 편입되었다. 서기 1988년 5월 各洞을 里로 고쳤으며, 서기 1990년 4월 海平里를 樹村里로 개정했다.

鳳鶴貯水池의 뚝아래 伊川의 상류에서 斐旨山(또는 乞水山:784m)을 서북으로 東流하는 峽谷의 細川 어귀에 仙鶴洞이 있고 그 남쪽 가까이로 서당골 마을과 선학동의 서편 산간에 있는 明岩中 마을과 그 西南 細川山谷 上流에 들어앉은 한뱅이 마을이 분포해 있다.

통일신라 이후 岩回坊이었는데 1555년 牧使 盧慶麟이 明間坊(밝간이방)과 合坊하여 明岩坊이 되고 1895년 碧珍面으로 되었다. 仙鶴洞에는 京畿道 高陽에서 晋陽人 姜道昌이 입향했고, 새냄이 마을은 達倉의 貯水池와 도로를 접한 마을인데 조선 성종 때 牧使 裵繡光이 노년을 즐긴 곳으로 알려져 있다.

明岩中里는 雲谷坊(紫山里)의 中里와 구분해서 明岩中里라 했고 1600년경 星州人 都錫令이 世居한 곳이다. 星州都氏 24호, 星州李氏 8호, 平山申氏 5호, 全州李氏 5호, 金寧金氏 15호, 靑松沈氏 5호, 星山呂氏 5호, 他姓이 25호 거주하고 있다.

  • 한밤이·大夜
    • 1600년경 이광목이란 사람이 이 마을에 入鄕하였는데 마을 뒤에 樹燈山이 있어 燈은 어두운 밤에 사용한다는 뜻에서 한밤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 明里·明岩中里
    • 1600년경 都錫令이란 사람이 마을에 入鄕하여 仙鶴과 大夜의 중간에 위치한다 하여 中里라 하였으나, 1897년 본 면이 明岩坊과 雲谷坊으로 나뉘어졌을 때 雲谷坊의 중리와 구별하기 위해 明岩中里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明里로 개칭하게 되었다.
  • 새남이·새내미·봉알·鳥餘村·鳳陽
    • 약 400년전 裵繡光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이룩하였으며, 당시 양지와 음지에 대나무가 숲을 이루어 이곳에 새가 많이 모여 들었다고 하여 새남이라 부르다가 몇년 후 裵氏가 뒷산에서 마을을 내려다 보니 새보다 큰 봉의 알과 같이 생겼다 하여 봉자를 따서 봉알이라 개칭하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양지바른 남향이라고 봉양이라 하였다.
  • 서당골·書堂谷·書堂洞
    • 약 1800년경 이양문이란 선비가 서당을 세워 수학하던 곳이라 하여 서당골, 또는 書堂谷이라 부르게 되었고 11가구가 살고 있으며 마을 앞에는 伊川이 흐르고 뒤로는 염속산의 지맥인 將軍峰이 있다.
  • 仙鶴洞,自始洞, 內洞(안마)
    • 1594년경 龍蛇之亂에 避亂으로 尙州에서 온 南陽洪氏 洪汝道와 星山裵氏 裵文剛이란 두 선비가 入鄕한 自始洞마을은 1623년 (仁祖 1) 7월 大洪水로 廢墟가 되고 內洞으로 취락했다. 마을의 지형이 학이 외발로 몸을 지탱한 형상이며 마을 앞에서 뒷산을 보면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과 같다. 이 산이 聖帝峰 지맥인 鶴山이다. 姜道昌 입향 후 학산 이름을 따서 仙鶴洞이라 부르게 되었다.

碧珍面의 중남부에 위치한 面所在地로서 소도시마을이다. 서쪽은 梅積山(馬迹山:483m), 동북은 紫山(360m)의 넓은 터에 북쪽 멀리 별티에서 貫流하는 伊川의 상류 비옥한 農地에 자리한 유서깊은 碧珍國의 옛터다. 소도시로 정비된 이곳은 북부의 상수촌, 서남부의 중수촌(봉산), 남부의 하수촌(원정, 석지, 대천)으로 구분된다.

1555년 목사 노경린은 迎鳳山 아래 迎鳳書院을 착공하였고 향내 문풍의 새바람을 일으켰다. 그는 栗谷 李珥의 장인이기도 하다. 영봉서원은 후임 목사 錦溪 黃俊良이 완공시켰으며 退溪 李滉이 기문을 썼다.

상수촌에는 려말에 성주인 橫溪 都允吉이 경산부 팔거방(칠곡 동명)에서 입향 세거했다. 중수촌 봉산마을에는 碧珍李氏의 시조 삼중대광 李 言을 추모하고 향사하는 단각이 있고 이곳은 이씨문중의 성지로 보존하고 있다.

하촌마을에는 성산인 圓亭 呂希臨이 연산군 때 성주읍 불뭇골에서 이곳에 이주했고 圓亭 呂希臨의 後孫 중 學德과 名望이 높은 이들을 추모하고 향사하기 위한 재실이 여러 곳 있다. 이 마을에는 선조 때 충남 회덕에서 晋州人 姜篆이 입향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다. 현재 星山呂氏 122호, 星州都氏 117호, 星州李氏 109호, 仁同張氏 77호, 金海金氏 53호, 他姓이 1,105호 살고 있다.

  • 대천·대천리
    • 징기 마을의 최남단에 위치하며 伊川이 이곳 가까이 있는 마을이라 하여 대천이라 하였으며, 현재 7가구가 살고 있다. 일제시대에 張氏들이 20여 가구 살았는데 伊川뚝이 만들어지면서 이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갔다.
  • 뒷마·中東
    • 1400년경 성주인 도윤길이라는 선비가 칠곡군에서 이주하였으며 迎鳳山 남방 천곡서원 동쪽에 위치하고 수촌 마을의 중앙지 마을이라 하여 중동으로 불렀다.
  • 봉 산
    • 신라말 벽진이씨의 시조 이총언 장군이 이 마을을 형성하였으며 그 당시 마을 앞에 큰 소가 있어 봉이 날아오고, 마을 뒤에는 연봉산이 있다 하여 봉산이라 불렀다.
  • 부흥·부흥리
    • 이 마을은 1600년경 都翰國이란 사람이 이룩하였으며, 모든 마을사람이 부자가 되고 후손들이 흥한다는 뜻으로 부흥리라 하였고, 현재 22가구가 살고 있으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많고 주로 수박·참외 등의 원예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 상 수 촌
    • 수촌은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어 북쪽에 위치한 중동·중평·부흥리·행촌을 상수촌이라 하며 약 75가구가 살고 있는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약 80%정도 살고 있으며 원예작물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 하 수 촌
    •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수촌의 남쪽에 위치한 봉산·석지·원정·대천을 하수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약 250가구가 살고 있는데 80%가 呂氏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수박·참외 등을 많이 재배하고 있다.
  • 석 지
    • 약 500년전 조선 초기 성산인 呂希臨이 이 마을에 入鄕하면서, 마을을 "돌과 같이 굳혀야 한다"는 뜻에서 석지라 했다고 전해온다.
  • 중 평
    • 부흥리와 중동 사이에 있는 마을이며 큰들 가운데 있는 마을이라 하여 중평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으며 도씨 성을 가진 가구가 12가구 살고 있으며, 원예작물을 하여 가구당 110만원 정도 소득이 있다.
  • 행 촌
    • 1400년경 중동과 같이 형성된 마을로 마을 앞에 살구나무가 많이 있다 하여 행촌이라고 불렀다. 현재 13가구가 살고 있는데 90% 이상이 都氏 성을 가진 가구이며 수박·참외를 많이 재배하고 있다.

성주군과 김천시의 경계인 별뫼재(星山峴:별티고개)에서 남쪽으로 鳳鶴池에 이르는 碧珍의 북단부이다. 위쪽 郡界의 별뫼(星山)마을과 그곳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앉은 水根마을과 貯水池를 가까이로 한 達倉(月倉)마을과 草田面의 안달밭으로 향하는 산곡의 달밭(月田)마을로 구분한다.

北緯 36°00′00″, 東經 128°12′00″에 있는 達倉마을은 1756년 牧使 金致溫이 糧穀의 보관을 위해 이곳에 창고를 설치해서 달밭(月田)마을의 지명을 따라 達倉이라 했다. 1857년 牧使 金東選은 脫稅穀 4萬石을 환수하여 크게 보수했다. 달밭(月田)마을은 초전과 金泉市界의 별뫼(星山:715m)와 그 동편의 달뫼(月山:611m)가 있고 그 사이에 달밭마을을 안달밭(內月田)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碧珍의 달밭마을을 바깥달밭이라 한다.

이 마을에는 동쪽에 鳳陽山(588m)과의 峽谷에 자리하여 학문에 심취하는 隱士의 마을인데 宣祖 때 金寧人 金演(1569년)이 入鄕·世居했고 후손은 군내 도처에 살고 있다. 姓氏 分布는 金寧金氏 35호, 星山呂氏 16호, 星州李氏 8호, 海平金氏 7호, 그밖에 他姓 61호이다.

  • 달밭·達田·月田
    • 바깥달밭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을 모양이 반달같이 생겼기에 달밭이라 지칭하다가 달밭의 뜻을 가진 한자어 月田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達倉·倉里
    • 조선시대 국세 현물 보관창고가 있어 김천지역 현물세와 곡물 일부를 이 창고에 보관한 것이 유래가 되어 達倉, 또는 倉里라 부르게 되었다.
  • 빌미산·水根
    • 明岩坊과 雲谷坊에서 제일 높은 山嶺에 위치하였으며, 伊川의 상류로 流水의 根源이 이곳에 있다 하여 水根이라 불렀고, 한발이 심할 때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여 祈를 따서 빌미산이라고도 구전되고 있다.

碧珍面의 남부로 伊川을 동쪽에 두고 大家面과 인접하여 솟질, 발간이, 집실, 종자골마을로 이루어져 있다.옛날에는 明間坊에 속해 坊의 중심지였던 이곳 솟질마을은 高麗初 星州人 李堅守가 世居했고, 연산조 때 昌原人 兪良弼이 金陵에서 입향하였다. 조선초 學圃 兪益明은 慶尙右道 都節制使와 明나라 正朝使로 활약했고, 그의 壇碑가 있으며 四美亭 兪遠을 향사하는 亭舍가 있다.

肅宗 때 안동에서 光州人 卓善儀가 입향 世居해 그 후손이 살고 있다. 宣祖 때는 淸道 栢谷에서 金海人 金豊이 입향하여 이곳과 우복실에 後孫이 거주하고 있다.

발간이 마을에는 1630년경 李惟亨이 入居했다. 집실마을에는 高麗 때 참지문하사 南陽人 洪彦脩가 입향 世居했고, 조선시대 해평군 김수의 아들 金寬尙과 참의 趙元壽가 입향했다.

선조 때는 인동인 翁 張鳳翰(1566-1644)과 그의 아들 知分軒 張以兪(1598-1660)는 충절과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장씨 집성마을이다. 종자골에는 昌原人 兪遂가 토호로 있으면서 種穀의 창고를 지어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다고 전한다. 姓氏별 분포는 仁同張氏 70호, 星州李氏 55호, 昌原兪氏 35호, 光山卓氏 13호, 他姓 56호이다.

  • 솥질·鼎谷
    • 약 800년전 李堅守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이룩하였으며 지형이 솥과 같이 생겼고 마을 앞 도랑에 너비가 1.2m, 길이 3m정도의 솥 모양 돌이 있어 마을 이름을 솥질이라 했으며, 그뒤 李堅守가 鼎字를 붙여 鼎谷이라 불렀다.
  • 발간이·明澗
    • 1630년경 李惟亨이 이 마을을 개척하여 마을 앞 들이 넓고 달이 뜨면 다른 마을보다 밝다 하여 발간이라 부르다가 30여년전 이유형의 아들 李寶林이 鼎谷과의 사이에 있는 마을 앞 들이 넓고 밝다 하여 明澗이라 불렀다고 한다.
  • 집 실
    • 高麗末 判中樞府事를 지낸 洪彦修가 不事 二君의 忠節로 杜門洞에서 집실로 移居하여 고을 사람들은 서울에서 大家집이 왔다 하여 大家谷이라 했으며, 1600년경 兪遂가 만석거부로 있었다. 임란 때 兪遂가 死亡하고 仁同에서 張鳳翰이라는 선비가 이주하여 家谷이라 불렀다고 한다.
  • 種 子 골
    • 부자였던 兪遂가 종자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 하여 종자골이라 불렀다. 이 마을의 지형은 낮은 산들이 삼면을 오목하게 둘러쳐서 마을이 아늑하고 인심이 좋으며 주민들이 모두가 잘사는 부촌을 이루고 있다.
  • 海東淸風碑
    • 仁同人 紫下 張基奭(1860∼1911)의 충절을 伯夷叔齊의 백세청풍비에 비유한 비명이고 높이는 3.2m이다. 1946년 광복이 되어 유림의 뜻으로 쇠조각으로 부서진 빗돌을 붙여서 세웠고 그 부인의 紀烈碑도 세웠다1990년 지방기념물 제82호로 지정되었다.
  • 大 卿 亭
    • 솟질마을에 흙을 모아 造山해서 나무를 심은 옛날의 동제터인데 지금은 마을놀이터로 쓰이고 있다.
  • 繼 愼 齋
    • 仁同人翁 張鳳翰과 知分軒 張以兪를 제향하는 4칸 겹집의 재실이다.
  • 四 美 亭
    • 昌原人 兪遠을 위한 정자이다.
  • 惺 石 齋
    • 光山人 惺石齋 卓濟麟을 위한 재실이다.
  • 農 窩 齋
    • 張鳳翰의 後孫인 擇玉(1639∼1689)의 享祀所이다.
  • 웃점복·占福·紫山
    • 1500년경 仁同張氏와 延州玄氏의 두 선비가 이 마을을 형성하였다. 紫陽山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紫山이라 불렀으며, 그후 임진왜란 때 全北 井邑에서 鄭世老가 피난와 全北이라 부르다가 후손들이 占福으로 개칭하고, 下占福에 대한 웃마을이라 해서 웃점복이라 불렀다.
  • 아랫점복·下占福
    • 占福 아래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下占福이라 불렀다.
  • 귀령골·貴靈谷·靈洞
    • 1500년경 李舜이라는 사람이 이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古靈牧使 李守一이 피란와서 살게 되었으므로 귀령곡이라 부르다가 그후 다시 靈洞이라 불렀다.
  • 산느말·사르말·山田
    • 1600년경 李舜의 후손이 산 아래 밭에 이주하여 살았다고 산느말, 또는 山田이라 했다. 현재 14가구가 살고 있다.
  • 中 里
    • 1621년경 許億이란 사람이 忠州에서 武科에 登科하였다. 副司果로 戊申亂에 軍功으로 贈嘉善 하여 그후 1630년에 忠州에서 移居하여 중리 마을을 개척하였다. 安峰寺와 영동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그 후손이 전국적으로 수백여호가 산재해 있으며 마을에는 현재 20여호가 살고 있다. 그를 추모하는 永慕齋가 있으며 동구에는 遺墟碑가 있다.

벽진면 소재지에서 金水面 방향으로 伊川을 건너 30번 국도를 접해 마을 뒤로 매적산(梅積山:483m)이 있는 고대 碧珍伽倻部族城邑의 본원지다. 자연촌은 무나물(樹村), 다징기(加樹村), 새월(新月), 불무골(冶洞)로 분포되어 있다.

이곳은 碧珍伽倻國의 옛터로 알려져 있고, 가야동맹권의 古域에서 볼 수 있는 碧珍伽倻의 王世表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始祖 碧露王은 永元己丑年(서기 89)에 올라 在位는 87년간이었고, 2대 尼次王은 永建戊辰 3년(서기 128)에 올라 在位 50년간이었고, 3대 幼沖王은 光和庚申 3년(서기 180)에 올라 在位는 70년간인데, 嘉平元年己巳(서기 249)에 同盟이 합동되었다는 것이다. 무나물은 碧珍人 李根英이 世居한 곳이며, 다징기에는 星山人 呂巖이 살았으며, 헌종 때 안동에서 宜寧人 余憶燁이 입향하였다. 새월은 광해조 때 안동에서 綾城人 具琮이 입향했고, 불무골의 풀뭇가마터는 벽진국의 병기와 농기 등 생활용구를 생산정비한 것으로 여겨진다. 綾城具氏 35호, 京山李氏 29호, 南平文氏 25호, 密陽朴氏 23호, 金海金氏 16호, 그밖에 他姓이 32호 거주하고 있다.

  • 무나물·水南
    • 조선 초기 洪有河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흐르는 물이 남방에 있다고 하여 무나물, 또는 河南이라 부르다가 300여년전 李光弼이란 선비가 河南을 水南으로 개칭하였으며, 京山人 晩學齋 李夏相의 후손이 마을에 살고 있다.
  • 下 水 南
    • 1700년경 碧珍人 李根英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수남 아래쪽에 위치한다 하여 下水南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다징기·加樹村
    • 1700년경 星山呂氏와 密陽朴氏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징기와 伊川을 사이에 두고 인접하여 있으므로 다징기 또는 加樹村이라 하였다.
  • 새월·新月
    • 약 400여년전 具相舜이라는 선비가 개척한 후 지형이 초생달, 또는 반달처럼 생겼다 하여 새월이라 하였으며, 그후 具氏의 자손과 金海金氏·南平文氏의 3성 대표가 모여 新月로 개명하여 불렀다.
  • 불밋골·冶洞
    • 약 1600년경에 개척하였으며 마을 뒷산이 불미와 같이 생겼다 하여 불밋골 冶洞이라 하였다. 具氏의 후손들이 20여 가구 살고 있다.

면소재지 동쪽 丘陵地에 위치하며 대바우, 우복실, 나복실, 은행정마을로 구분되는 옛날 雲谷坊의 本據地이다. 대바우마을은 마을에 대바위가 있어 얻어진 地名이다.

1500년대 초에는 海平君의 後孫 止止堂 金孟性(1437-1487)의 外孫인 南陽人 臺岩 洪繼玄이 外祖 止止堂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명을 떨친 곳이다. 宣祖 때 忠北 木川에서 金海人 金豊 이 입향하여 현재 후손이 살고 있고, 숙종 때는 大邱에서 達城人 徐竹凉이 입향·세거했다. 나복실은 星州都氏의 集姓마을로 마을 뒤에는 碧珍貯水池가 있다.

은행정 마을은 麗末에는 橫溪里라 했으며, 이때 京山府 八 縣(칠곡군 동명면)에는 橫溪 都允吉이 입향하여 후손 都孟寧과 그 아들 杏亭 都衡, 雲齋 都勻, 岩谷 都世純의 世居地가 되었다. 星州都氏 45호, 順興安氏 15호, 木川于氏 14호, 達城徐氏 13호, 光山盧氏 11호, 그밖에 他姓 45호가 살고 있다.

  • 羅福室·羅福洞·羅浮洞·雲谷
    • 벽진저수지 아래 도로를 접하여 면소재지와 가까운 곳에 자리해 있다. 1914년 이전에는 운곡방의 중심지이며, 성주도씨 집성촌이다.
  • 대바우·大岩
    • 조선 초에 洪 玄이 이 마을을 이룩하여 마을 앞 야산에 큰 바위가 많아 대바우, 또는 大岩이라 불렀다. 현재 62가구가 살고 있으며 특용작물(참외·수박)의 촉성재배로 많은 소득을 올려 부촌을 이루고 있다.
  • 銀杏亭·杏亭洞
    • 1500년경 都衡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으며, 마을 앞 큰 은행나무가 있어 자기의 호인 杏亭과 은행나무의 銀字를 따서 銀杏亭이라 했으며, 지금도 마을 앞에는 둘레 4m나 되는 고목 은행나무가 있다.
  • 于福室·牛福(于幅)·于洞(愚洞)
    • 임진왜란 당시 통정대부를 지낸 金海金氏 문중의 한 선비가 이룩하였으며, 마을 좌우의 산 지형이 소의 형상이라 하여 牛福이라 부르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으로 于福으로 개칭하였으며 于洞이라고도 하였다.

碧珍의 聖峰 梅積山(馬迹山:483m)이 伽倻山쪽으로 머리를 하고 ’大’字의 능선으로 하여 솟았고 그 ’大’字의 가랭이 골짜기에 外基貯水池가 있고 그 못뚝아래는 長基마을이 面所와 근접하여 서북쪽에 터잡아 있다. 그 북쪽의 金泉으로 향한 도로변에 外院마을과 이곳에서 서쪽 산곡으로 약 5㎞ 외진 곳에 院洞(內院)마을이 자리해 있다.

長基마을은 성산인 呂良裕의 후손 西岩 呂孝曾(1604-1679)의 世居地이며, 원동마을은 그 뒷편 골짜기의 한뱅이 마을과 함께 선비들이 隱居修道하던 道學의 서당마을이다. 영조 때 星州人 都尙郁이 노년에 성리학에 심취하여 저서와 후학교육에 힘쓴 곳이다. 星山呂氏 42호, 金海金氏 22호, 星州都氏 16호, 驪陽陳氏 8호, 東萊鄭氏 6호, 他姓이 13호 살고 있다.

  • 長基·長歸(將歸)
    • 1600년경 星山人 呂孝曾이라는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으며, 將歸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하고 정자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將歸라 하였으나, 후손들이 마을의 터가 길다 하여 長基로 개칭하게 되었다.
  • 外 院
    • 迎鳳山 아래 川谷書院 밖에 위치한다 하여 院外라 하였으나, 陳是載라는 선비가 마을 앞 들을 개간하여 院外를 外院으로 개칭하였다.
  • 안원이·內院·元興
    • 海州吳氏가 이 마을에 入鄕하여 부촌이 될 것을 기원하면서 元興이라 하였다가 迎鳳山 아래 川谷書院 안에 위치한다 하여 안원이라 하였다. 그후 都尙郁이라는 선비가 內院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碧珍의 동남부 伊川과 30번 국도와 비옥한 평야를 펼치며 생활환경이 편리하다. 소바우, 택정, 관동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1914년 이곳의 澤亭마을 등 일부가 星州面에서 편입되었고 소바우마을에는 順興安氏와 金海金氏, 平山申氏가 世傳해서 살며, 宣祖 때 安義達, 安成達, 安義發 3兄弟가 鳳溪의 종자골에 입향해서 그 後孫이 이 마을에 살고 있다.

澤亭마을에는 고려 우왕 때 金山郡守를 지낸 星山人 李汝信과 경사에 능하고 선조 때 진사가 된 山澤堂 李  刑曹參議를 지낸 庸菴公李琰의 후손이 集姓村을 이루어 살고 있다. 官洞마을에는 成宗 때 兵馬節度使를 지낸 淸州人 韓萬孫이 양주에서 입향했고 그 후손이 살고 있다.順興安氏 26호, 金海金氏 15호, 星山李氏 13호, 平山申氏 10호, 그밖에 他姓이 36호이다.

  • 소바우[牛岩]·金岩
    • 1600년경 義城人 金建五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으며 마을 주변의 큰 바위가 소와 같은 형상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소바우라 하였다고 한다. 또 이 바위에 金이 있다 하여 깨어보니 과연 금이 많이 나왔는지라 이 마을을 金岩이라고도 불렀다.
  • 官 洞
    • 마을 뒷산에 벼슬한 사람들의 묘를 쓰고 묘 앞에 재실을 지어 그 현판에 官東이라 쓴 것이 마을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 澤 亭
    • 1500년경 星山人 李 이 이거하여 본인의 호를 따서 山澤亭이란 齋室을 짓고 마을 앞에 연못을 만들어 그 못 가운데 정자를 세웠으므로 李선비의 호인 山澤堂의 澤과 못 가운데 있는 정자의 亭字를 따서 澤亭이라 하였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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