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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面은 星州 10개面 中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伽倻山의 지맥인 별뫼(星山:白馬山 715m)와 懸鈴山(792m)을 북으로 하여 金泉市와 경계하고 있고, 동쪽은 月恒面, 서쪽은 碧珍面, 남쪽은 星州邑과 이웃하고 있다. 서북의 산악에서 흘러내린 沙質충적토는 중남부의 비옥한 농지를 이루며 교통은 산악지 외에는 사방으로 비교적 편리하다. 면적은 66.26k㎡이고, 법정 12개리, 행정 24개리, 2,000여호에 6,400여명의 인구가 사는 농업위주의 큰 面이다.

통일신라이래 酉谷, 草田, 非乎石의 3개坊으로 되어있었는데, 酉谷坊은 詔成, 月谷, 高山, 東浦里였고, 草田坊은 大獐, 紫陽, 文德, 七仙里, 非乎石坊은 仁村, 漁山, 龍鳳, 鳳亭里 일대였다. 이중 非乎石坊은 1845년(헌종 11) 牧使 金榮이 望星坊이라 改名하였다. 1895년(고종 32) 각 坊을 面이라 개정하였다.

1914年 3月 행정구역 개편시 草田·酉谷 두 面이 合面되어 草田面이 되었고 望星面의 일부(仁村,負山)는 月恒面에 編入되었으며, 1921년 6월 현위치(大獐洞 681-6)로 면사무소가 이전되었고, 1936년 11월 현청사 및 부속건물이 건립되었다.

1943년 8월 11개 洞이 25개區로 分區되었다가 1952년 3월 20개 洞으로 축소되었다. 1971년 1월 21개 洞(龍鳳洞1, 2)으로 分洞되었으며, 1975년 6월 大獐 2洞이 2, 3洞으로 分洞되어 22개 洞이 되었다.

1986년 1월 다시 龍鳳 1洞이 1, 3洞으로 분동되었고, 1987년 1월 大獐 1洞을 1, 4洞으로 文德 1, 2洞을 1洞으로 개편하여 23개 洞이 되었다.

1988년 5월 洞이 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月恒面 漁山里가 草田面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관할 구역은 大獐, 高山, 東浦, 文德, 鳳亭, 韶成, 龍鳳, 龍星, 月谷, 紫陽, 七仙, 漁山의 12개 里로 되어있고 자연촌 마을구역은 40개 마을권 58개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草田이란 명칭은 푸른 초목이 울창한 넓은 들판을 개척하여 십만리들이라 이름짓고 곡식을 가꾸는 평야를 만들었으므로 면 이름을 푸른들을 상징하여 만든 것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1700년경)에는 大馬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초전면 大獐洞이라 개칭하였다.

1952년 行政洞 대장 1, 2동으로 분동하였고, 1975년 대장 2동을 2, 3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87년 대장 1동을 1, 4동으로 분동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대장 1리(大馬)는 초전면 면소재지이다. 3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大 馬(대매)
    • 초전면의 동남에 위치한 면소재지 마을이다. 白川(馬鋪川:裵川)이 동남으로 나가는 넓은 들은 6㎞의 넉넉한 트임으로 장관이다. 군내에서 성주읍 다음으로 큰 小都市다.
    • 조선 숙종때(1700년경) 徐草官이란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新豊이라 하였으며 그후 崔氏, 車氏, 文氏가 점차 이주하여 家陽이란 마을을 구성하여 두개의 마을이 있었으나 영조 24년(1748) 8월에 踏溪驛(현 성주읍 학산리)夫였던 金戒百이 5, 6년이나 사육하여 온 驛馬로 扶桑驛(현 금릉군 남면)에 갔다가 귀가 도중 속칭 신거리고개(초전면 龍鳳里)에서 大虎를 만나 취중이던 김계백은 놀라 말에서 떨어지고 말은 주인을 위하여 대호와 싸운 끝에 대호는 죽고 약 10여리를 내려와 어떤 주막에 도착해서 말이 죽어 김계백은 주막집 앞에 말의 무덤을 만들고 석비를 세워 그 은덕을 찬양하였고 그곳을 大馬店이라 하였다. 그후 新豊, 家陽을 합쳐 大馬 또는 대매로 부르게 되었다.
  • 道 川
    • 닭실과 검단계곡이 합류하는 곳에 동남을 향해 앉은 富村마을이다. 조선 정조 원년(1777) 宋時欽이란 선비가 이 마을에 入鄕하였고 北宋의 대학자 程明道, 程伊川 형제의 이름 글자를 따서 道川이라 칭했다 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 獐 山(노루미)
    • 초전면소재지(大馬마을)에서 서편으로 조금 떨어져 있고 낮은 산언덕이 소래쪽에서 뻗어와서 이곳에서 멎어 노루의 머리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 宋時宏이란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고 뒷산 형세가 마치 노루가 새끼를 품고 있는 형상이라 하여 獐山이라 칭하였다 하며 노루미라고도 부르고 있다.

초전면소재지의 서북쪽 산곡을 바탕으로 서편으로는 벽진면으로 통래하는 군도가 있고 동남으로 초전의 중심과 가깝게 자리해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高山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公山亭(高山亭)
    • 초전면소재지 서북 약 4㎞의 酉谷溪의 細川을 끼고 서편에는 표고 181m의 산봉을 뒤로해 있는 서편 마을(公西;음지뜸)과 그 동에 있는 동편 마을(公東 ; 양지뜸)로 구성되어 있는 마을이다.
    • 1500년경 孫氏 몇 세대가 마을에 入鄕하여 孤山이라 하였고, 1551년 전라도 孤山에서 귀양살이를 마친 倻溪 宋希奎(1494∼1558)가 1555년 사헌부 執義로 있을 때 尹元衡 등의 비행을 탄핵했다가 全北 孤山에 귀양을 살고 돌아와 귀양지를 잊을 길이 없어 孤를 高로 바꾸어 高山이라 하였다. 송희규는 이곳(公西마을)에 百世閣을 짓고 학문에 힘써 많은 문집을 냈다.
  • 酉 谷(닭실, 鳳谷)
    • 별뫼(星山:715m)에서 동남 6㎞의 산봉(471m)을 서쪽으로 하고 餘脈이 북과 동으로 돌아내려 지내산이 되고 마을의 운세를 흥하게 하여 ’닭실(酉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이름을 宋光廷이 명명하였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 溪鳴洞(김밍동, 金蓮洞)
    • 고산정 서북 1.2km의 산촌인데 마을 북쪽 뒷산의 능선이 표고 200m의 일정한 다섯 산봉이 동남으로 내려 풍수설에 蜈蚣血이라 했다. 이에 산세의 ’지내’와 이를 상충하는 ’닭’을 생각해서 닭이 우는 소리로 마을이름(鷄鳴洞)을 지었다고 한다. 또 宋光廷이 닭실과 고산정을 연결시키는 곳이라 하여 金蓮洞이라 했다고도 한다. 冶城宋氏 집성촌이다.
  • 孫 洞(손골)
    • 400여년전 宋希奎의 자제 중 요절한 사람이 있어 묘지를 孫氏 마을 뒷산에 잡자는 문중의 의견에 公이 바로 집 뒤에 묘를 쓰는 것은 도리에 위배된다고 거절하였다. 손씨들이 듣고 감복하여 스스로 물러가자 손씨들의 敬鄕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孫洞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별뫼(星山 : 白馬山 715m)와 달뫼(月山 : 達馬山 611m)의 남쪽에 鳳陽山(588m)이 있어 삼각지를 만들고 그 안에 달밭(月田)마을과 봉양산 동남의 홈실(椧谷)로 구분된다. 고려 충숙왕 때 李堅幹에 의해 好音谷이라 칭하여 졌다. 1317년 椧谷이라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月谷洞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이 월곡 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月谷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을 둘러싼 달마산 계곡에서 산봉우리에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상징하여 붙인 것이라 하기도 하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月谷洞이 되었을때는 椧谷과 月田의 이름을 따서 月谷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 지역의 原地名의 근거는 별뫼와 달뫼에서 이루어졌다. 7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홈실과 달밭마을의 2개 마을권으로 나누어 진다.

  • 椧谷(홈실, 호음실, 好音谷)
    • 별뫼(715m)와 달뫼(611m) 남쪽 4㎞에는 鳳陽山(588m)이 있고 그 삼각지안의 골짜기에 ’달밭(月田)’마을이 있으며 또한 봉양산 서편(350m) 벽진면 관내에는 ’바깥달밭’이 있어 이 두 마을을 가름하는 달밭고개(표고 약 350m)는 草田, 碧珍의 경계가 된다.
    • 고려 碧珍將軍 李 言의 7세손 광록대부 芳華가 처음 入鄕하였고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3朝에 벼슬하여 통헌대부 민부전서 진현관대제학 지밀직사사 홍문관서를 지낸 山花 李堅幹이 1317년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원나라 順帝가 선생의 문장과 풍체에 탄복하여 선생이 살고 있는 곳을 물어 호음실(好音谷)이라 하여 그림을 그려 보이니 순제가 보고 마을에 물이 적겠다고 乞水山의 물을 당겨 오기 위하여 椧(나무로 홈통을 만들어 물을 당긴다는 뜻의 글자가 처음 만들어 짐 : 홈실)자를 지어서 마을이름으로 정해 주었다고 한다.
  • 濟 南(담뒤)
    • 마을의 중앙으로 흐르는 濟川의 남쪽 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濟南이라 한다. 浣石亭 李彦英의 종택과 사당이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 옆에는 濟岡書堂이 있다
  • 內 谷(안골)
    • 당시 마을의 위치로 보아 안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여 內谷이라 하였다고 한다
  • 陶 山(뒷미)
    • 홈실의 북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마을 뒤에 있는 陶山이라는 산의 이름을 따서 陶山이라 하였으며 질그릇처럼 오목하게 생겼다고 하여 陶山이라 칭했다고도 한다. 山花 李堅幹의 汶谷書院이 있다.
  • 新 溪(새뜸)
    • 새로 잡은 마을의 터라 하여 新溪라고 하고 홈실의 동쪽에 위치하는 마을이다.
  • 梨洞(배나무골)
    • 마을 뒤에 배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기 때문에 배나무골이라 하였으며 昌寧 成氏의 宗堂인 昌成堂이 있다.
  • 月田(達田, 달밭, 안달밭)
    • 별뫼고개(星州·金陵境界)에서 동쪽 2㎞의 별뫼(星山:715m)는 성주의 主山인 伽倻山(1430m)의 북맥이 修道山(1317m)과 厭俗山(870m)과 斐旨山(784m)으로 내달아 별뫼(星山)에서 우뚝 멈춰 동남으로 뻗어 星州邑基의 主脈이 되고, 한줄기는 동북으로 나가서 金烏山에서 멎었다. 별뫼(星山) 동쪽에 달뫼(月山 611m)가 있고 이 2개 산 남쪽 산속에 달밭(月田)마을이 있다.
    • 이 마을에 조선 태종 때 文化人 柳夏가 입향·복거했고, 창녕인 서양필의 후손과 고성인 이우의 후손, 동래인 정세노의 후손, 금령인 김연의 후손 등 무수한 인사가 들어와 살았다. 조선 단종때(1453) 咸安趙氏가 정착하여 인삼을 재배하면서 달마산 봉우리에 달뜨는 광경을 보고 마을 이름을 月田이라 칭하였다 한다.
    • 정감록에 3밭이 난리에 안전하다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 3밭은 月田인 달밭과 韶野의 진밭, 그리고 金陵郡 南面의 선밭을 말한다고 한다.

조선시대(1592년경) 벽진이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文致라 칭하여 왔는데 1914는 행정구역 개편때 초전면 七仙洞으로 개칭하였다.

1952년 행조선시대(1592년경) 碧珍李氏가 마을에 入鄕하여 文致라 칭하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초전면 七仙洞으로 개칭하였다.

1952년 행정동을 칠선 1, 2洞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칠선 1, 2里로 개정하였다. 5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弓 田(활밭)
    • 초전면소재지(大馬마을)의 남쪽 도로서편의 첫마을이다. 낮은 산을 둘러싸고 동향한 마을이다. 조선 고종 16년(1879) 朴昌鉉이란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여 살면서 지형이 활(弓)과 같이 생겼다 하여 弓田이라 칭하였다.
  • 院 洞(서원골)
    • 활밭 남쪽과 가까이에서 마을 남편 표고 130m의 낮은 산의 능선이 마을을 둘러 있고 북쪽으로는 면소재지를 약 1㎞ 거리로 내려다보고 있다. 조선 정조때(1780년경) 文化人 고려 昆山府院君 益貞의 9세손 厚孟이 정착하여 마을을 조성하였으며 書院畓이 있다하여 마을이름을 院洞, 서원골이라 칭하였다.
  • 平 亭
    • 면소재지(大馬마을)에서 성주읍쪽으로 細川을 건너 한길 서편에 접해있는 조용한 富村이다. 조선 말기(1900년경)에 平津이라는 들이 있었으나 수해로 인해 매몰되고 현위치에 平地라는 마을이 생겨 내려오다가 1930년경 마을 앞에 큰 정자나무가 있다하여 平亭으로 고쳐 불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文 致(문치골)
    • 성주읍과 초전면 경계 도로의 대야티 넘어 첫마을이다. 북쪽으로는 산막마을과 가까이 있다. 1592년경 임진왜란 당시 碧珍李氏 몇세대가 이곳에 와 생활하다가 문중의 한 선비가 공부를 많이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후 마을 사람들이 선비의 못다 이룬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마을 이름을 文致라고 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 山幕谷(산막골)
    • 평지마을 동남의 김천-성주한길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다. 1650년경 仁同張氏 한사람이 마을 뒷산에 움막을 짓고 생활을 시작하여 산막골이라 불러오다가 1800년경 마을입구에 연못이 생겨 마을이름을 連浦라 칭하였는데 그후 1900년경 연못이 없어지고 난후 다시 마을 이름을 산막골이라 불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정동을 칠선 1, 2리로 분동하였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칠선 1, 2리로 개정하였다. 5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 300년전 벽진이씨 문중의 한 선비가 7년간 글공부를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후 마을 사람들이 선비의 넋을 위로하는 뜻에서 마을이름을 文致라 칭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七仙洞이라 하였다.

초전면의 남쪽 끝으로 碧珍面과 星州邑을 경계로 하는 곳이며 마을 뒤로 臥龍山(113m)의 완만한 구릉이 감싸고 있다.

龍星洞이라 함은 臥龍의 龍자와 星州에서 편입되었다하여 星자를 따서 龍星洞이라 이름한 것이다. 1952년 행정동인 용성 1, 2洞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臥 龍
    • 마을 서북쪽의 臥龍山의 완만한 구릉에 둘러싸여 동향하고 서로 벽진면과 남으로 성주읍 용산리를 경계한 마을이다. 조선 세조때(1540년대) 서울에서 瑞山人 柳漢卿이 성주 월항면 안무곡에 낙 향하여 그 후손이 본동에 복거하여 집성촌을 이루었다.
    • 마을 뒷산과 마을앞의 바위의 형국이 누운 용의 뿔 또는 눈알 등과 같은 모양이라하여 臥龍이라 이름하였다고도 하며, 처음 入鄕할 때는 새터라 하였고 그후(1830년경) 金道益이란 사람이 이주하여 와 마을의 입지가 龍이 누어있는 형이라 하여 臥龍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 雲 浦(구름개)
    • 초전면의 남쪽 끝 마을이며 면소재지 까지는 약 3㎞의 거리에서 臥龍山을 등지고 남향한 마을이다.삼면이 형세가 좋은 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남향한 마을로서 약 200년전에 구성된 마을이다.
    • 마을을 入鄕할 당시에는 새터라고 하였다가 1830년경 금릉농소에서 金道益이란 선비가 이주하여와 동명을 雲浦라 하였다. 윗마을이 와룡이므로 누운 용은 구름과 갯벌이 있어야 함으로 雲浦(구름개)라고 칭하였다 한다.
  • 後 山(뒷미)
    • 조선 정조 원년(1777) 朴在春이란 선비가 마을에 入鄕하고 마을뒤에 형세가 좋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그 산세가 人才를 양성할 수 있는 형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後山이라 하였다고 한다.
  • 池 內(못안)
    • 조선시대 裵光鎭이라는 선비가 入鄕하였으며 당시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어서 통행이 불편하여 산을 넘어 다녔다고 한다. 마을 앞에 큰 연못이 있다하여 동네 이름을 부르기 쉽도록 못안이라 부르고 있다.

성주군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金陵郡界의 하룡, 동녕마을에서 남쪽으로 細川山峽의 외진곳이며 위쪽을 上韶라 하고 韶成저수지 북쪽 뚝아래는 韶野라고 하며 박실(朴谷)과 連鳳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1592년경) 密陽朴氏에 의하여 마을이 조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韶成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 밀양박씨 몇 세대가 피란와서 살면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達磨山 아래 두개의 마을이 있어 윗마을은 上韶라 하고 아랫마을은 韶野라 불렀다 한다. 한때는 박씨 9세대가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마을이름을 九姓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韶野와 九姓의 이름을 따서 韶成里라 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주군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金陵郡界의 하룡, 동녕마을에서 남쪽으로 細川山峽의 외진곳이며 윗쪽을 上韶라 하고 韶成저수지 북쪽 뚝아래는 韶野라고 하며 박실(朴谷)과 連鳳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1592년경) 密陽朴氏에 의하여 마을이 조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韶成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 밀양박씨 몇 세대가 피란와서 살면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達磨山 아래 두개의 마을이 있어 윗마을은 上韶라 하고 아랫마을은 韶野라 불렀다 한다. 한때는 박씨 9세대가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마을이름을 九姓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韶野와 九姓의 이름을 따서 韶成里라 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韶 野
    • 마을이름은 古代名士가 山村에 은거하며 중국 梁나라 元帝가 지은 詩文에 ’韶景’이라는 화사한 봄날의 아름다운 경관을 읊은데서 인용한 것으로 산야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그려놓은 마을이름이라 한다.
    • 표고 155m의 이 마을 서북에는 달뫼(月山)가 있고 白川(裵川:馬鋪川)의 원류가 성산(별뫼)에서 발원되어 이 마을앞 저수지에 쉬어 내린다.
    • 마을 뒷산이 達磨山인데, 옛날 이 산에 밤이 되면 선녀들이 와서 놀았다는 전설이 있으며, 동·서·북쪽으로 높은 산이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 있는 좁은 계곡으로 사람이 통행할 수 있으며, 마을 앞에는 비옥한 들이 있고 사방의 경치가 아름다워 伽倻國 때부터 韶野로 불려 왔다.
  • 上 韶
    • 소야에서 북쪽으로 계곡을 따라 약 1㎞쯤 떨어진 성주군과 김천시와 경계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韶野의 윗마을이라 하여 上韶라고 한다.
  • 朴谷(박실, 朴村)
    • 소야에서 동쪽 산기슭으로 약 300m쯤 떨어진 곳인데 임진왜란 때 밀양 박씨 문중에서 피란 을 온 후 계속 거주하고 있어 박실 혹은 朴谷이라 한다.
  • 連 鳳
    • 소야로 가자면 통과해야 하는 남쪽 계곡 입구에 자리잡은 마을로 동쪽의 달마산과 북쪽의 백마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어 連鳳이라 한다.

草田 - 碧珍間 도로를 접하여 나지막한 산등을 북으로 가리고 남향해 있다.

약 600여년전 고려시대(1350년경) 경기감사 宋構가 합천 冶爐에서 개경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文章 道德이 있는 곳이라 하여 文德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文德洞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문덕 1, 2,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87년 1월 문덕 1, 2동을 문덕 1동으로, 문덕 3동을 문덕 2동으로 개정되었으며 1988년 5월에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략 소래와 감나무골의 2개의 마을권으로 구분되어 있다.

  • 松 川(소래)
    • 초전면소재지에서 서쪽으로 약 1.5㎞ 도로를 접해 동남향한 대촌이다. 마을 뒤에는 표고 약 110m의 낮은 산이 금단 마을을 가리고 있다. 고려 충목왕 원년(1345) 冶城人 宋構가 경상관찰사 및 경기감사를 봉직하다가 1350년 세거지인 陜川 冶爐에서 경상도 어사로 이곳을 지나다가 松川에 宗基를 잡고 會洞에 葬地를 얻었다고 한다.
    • 松川 入鄕祖가 고려에서 봉직한 까닭에 고려의 수도인 현재의 개성을 松京, 松都, 松岳이라 했고, 개성의 뒷산을 松岳山이라 한 바, 마을 뒷산이 송악산과 닮아 낙향 후 옛 수도가 그리워 마을 이름을 당시 수도 이름 첫자를 따서 松이라 하고 또한 얼마전까지만 해도 마을 어구에 배가 드나들 때 배를 매는 선돌이 있어 당시에는 마을 앞에 큰 내가 있음이 입증되며 이러한 연유로 마을 이름을 松川이라 했다 하며 이후 文章 道德이 있는 곳이라하여 文德里라 하였다.
    • 開城尹을 지낸 宋吉昌(고려 충숙왕 7년 : 1338년생)과 아들 上護軍 宋千祐가 이 마을에 살았고, 선조 때 현풍 率禮에서 郭惟屛이 입향·세거해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조선중기 벽진인 李長立이 입향했으며 철종 때는 海平에서 羅州人 丁大赫이 입향세거하고 후손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 店 墟(점터)
    • 조선 선조 말기 도기점이 있어 점터라 부르게 되었으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당시는 독립된 村이었으나 인구가 점차 많아져 지금은 새터, 松川, 점터가 모두 붙어 경계가 없어졌으며 구분이 쉽지 않다.
  • 檜 洞(감나무골, 횟골, 갈나무골)
    • 초전과 벽진의 경계의 도로 서쪽에서 성주읍의 主脈인 낮은 山언덕을 골라잡은 조용한 農村이다. 조선 정조때(1783) 좌수였던 李上浦라는 선비가 入鄕하였다 하고 당시 마을 주변에 회나무와 갈나무가 많아 회동 또는 갈나무골이라 불러오다가 현재는 감나무골로 칭하고 있다.

星州-金泉도로의 金陵郡界에 접해서 그 남쪽으로 넓게 위치한 초전의 동북부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龍鳳洞이라 칭하여 졌고, 1971년 용봉 1동이 용봉 1,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에 의해 용봉 1, 2, 3洞이 용봉 1, 2, 3里로 개정되었다.

마을 개척당시 마을 뒷산의 봉우리가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한 마을(龍頭마을)은 龍의 머리와 같은 형상이며 다른 한 마을(鳳舞마을)은 새가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龍鳳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 院基(원터, 院址, 너리)
    • 초전면소재지에서 金泉을 향해 도로를 따라 5㎞쯤 白川(裵川 또는 馬鋪川)을 건너는 교량 이남의 길 左右의 마을로 20여호의 富村이다. 조선시대(1800년경) 성주고을 원님이 이곳을 통과할 때는 반드시 휴식 했다 하여 원터(院基)라 칭하다가 마을 앞의 길이 약 4.2㎞, 폭 약 3㎞나 되는 넓은 들이 한눈에 보인다고 하여 너리라고도 부른다.
  • 五 峯
    • 너리 남쪽에서 산기슭에 자리한 7∼8호의 표고 100m의 마을이다. 조선 영조때(1730년경)에 생긴 마을로 마을 뒤에 있는 다섯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의 이름을 따서 五峯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 龍 頭
    • 白川의 원류가 별뫼에서 발원되어 소야저수지를 거쳐 동류하는 2.5㎞지역의 山峽어귀에 자리한 마을이다. 마을의 형세가 용의 머리와 같이 생겼다 하여 주민들이 이름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咸陽朴氏가 主姓으로 10여호의 마을이다
  • 新 興
    • 너리마을의 남쪽끝에 가까이서 도로동쪽에 있는 들마을이다. 과거에는 냇가 자갈밭의 황무지였으나 한국전쟁 때 피난을 나온 사람들로 난민촌을 이루었다가 그때의 난민 및 타지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정착하여 새로 일으킨 마을이라 해서 新興이라 한다.
  • 鳳 舞
    • 너리 동쪽 白川 건너 표고 110m의 완만한 산기슭에서 서남향한 마을이다. 1800년경 安東權氏 몇 세대가 자리를 잡고 마을을 조성하였는데 뒷산의 형세가 마치 새가 춤을 추는 것과 같다 하여 鳳舞라 칭하였다고 한다.
  • 新 基(새마)
    • 봉무마을에서 약 1.5㎞ 떨어진 마을로 1918년경 농토를 따라 봉무, 용두마을 사람들(宋仁翼 등)이 이주하여 새로 마을을 형성하여 살고 있어 新基(새마)라고 한다.
  • 高 坪(높은들)
    • 金泉市 境界 조금 못미처 도로 서편 들언덕에 터잡은 10여호의 산마을이다. 1820년경 안동권씨 2세대가 봉무에서 이주하여와 살면서 마을 위치가 높은 곳이라 하여 마을이름을 高坪이라 불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 聖 信 院
    • 봉무마을 남쪽 700m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서남으로 신흥마을과 가까운 마을이다. 25년전 카톨릭 재단에서 나환자를 위해 부지를 확보하여 음성 나환자를 치료해 주는 대구카톨릭 성주 분소인 聖信病院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따서 마을이름으로 하였다. 1995년 4월 30일 성신병원은 폐쇄되었다
  • 鑛 山
    • 金泉市 경계인 신거리고개 아래 도로변마을이다. 초전에서 金泉通路의 白川을 건너 韶野로 들어가는 갈림길 북쪽 1㎞쯤 구릉에 있는 10여호의 마을이다.
    • 1922년경에 광맥이 발견되어 개광과 동시에 약 15가구가 살았으며 이 광산에는 화강암과 규석이 생산되어 타지로 반출되고 있다. 이 마을은 성주와 김천시의 경계지점이며 지방도가 있다. 조선 시대에 이 마을의 재를 넘는 사람들에게 짚신을 판매 했다는 전설이 담긴 신거리재가 있다.

星山(별미)에서 동남으로 뻗은 산맥이 초전과 벽진의 면계를 이루면서 그 중간에 紫山이 솟아 있는데 북쪽의 높은 봉을 큰 자산, 남쪽의 조금 낮은 산을 작은 자산이라 한다.

두 봉우리를 중간으로 해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星州李氏 집성촌 4개 마을을 今丹이라 하며 작은 자산 끝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잡은 마을이 義城金氏 집성촌으로 黔丹(일명 內洞)이며 큰 자산을 서편에 두고 터를 잡은 새박골밑으로 모퉁이를 돌아 新豊이 동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최신에 현대식 건물 5동이 신풍입구에 세워지면서 새마을을 이룬것까지 8개 자연부락을 합쳐 자양리라고 부른다.

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黔丹은 신라말기에 마을을 이루었으며 黔丹寺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검단리로 불리어져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전면 자양동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자양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9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이 리로 개정되면서 현재의 자양리가 되었다. 통칭 黔丹里는 신라말기에 생 긴 마을로써 성주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산 자락을 깔고 자리잡고 있으며 자산은 성주의 정기가 서린 靈山으로 星山, 月山, 鳳陽山, 梅績山과 함께 성주문화의 뿌리로 빛나는 고대 碧珍伽倻의 城邑國 형성에 필수 요건이었다.

지리 풍수상으로 작은 자산 정상에는 천하 명당이 있어, 지금도 사람이 밟으면 웅장한 소리가 날뿐 아니라 이곳에 묘를 쓰면 성주가 망한다고하여 아무도 무덤을 쓸 수가 없는 곳이다. 최근까지도 가뭄이 극심할 때면 성주군 유지들이 生亥을 가지고 올라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어찌나 영험했던지 제관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비가 와서 옷을 흠뻑 적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말기 작은 자산 중턱에는 검단사란 절이 있었고 검단사가 있었던 곳을 부처돌 꼭대기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절터의 흔적으로 돌축대가 남아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검단사에는 빈대가 하도 많아 절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자산은 옛부터 지리 풍수가들이 빼어난 산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명산으로 지금도 최치원선생이 약을 지었다는 돌호박이 정상을 비켜 남아있고 큰 자산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가마바위가 옛날처럼 그대로 서있다.

세시풍속으로 정월 대보름이면 청춘 남녀들이 큰 자산 작은 자산 두 정상에서 달집을 태우며 꽹과리와 춤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 윗 금 단
    • 星州李氏 집성촌으로 금단 4개 마을 중 맨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윗금단이라 부른다. 지금은 번창했던 옛날의 빈집터가 더 많은 마을이다.
  • 중 촌(中村)
    • 상하 금단 중간에 있다하여 중촌이라 부른다.
  • 아랫금단
    • 윗금단 아래에 있다하여 아랫금단이라 하며 성주이씨 집성촌이다.
  • 선틀배기
    • 금단 끝에 있는 마을로써 성주이씨, 고성이씨, 현풍곽씨, 의성김씨 등이 새로운 마을을 이루고 있다.
  • 新 豊
    • 자산 동북 계곡가에 자리해서 동남으로 향해 터잡은 마을이다. 조선 광해군 8년(1616)에 宋時恕이란 선비가 입향하여 자산의 지세중 가장 온난하고 물이 풍족하여 풍년이 드는 마을이라 하여 신풍이라 칭하였다 한다.
  • 새벽골[曉洞]
    • 자산을 서편에 두고 신풍을 동쪽에 가까이 한 산촌이다. 1620년경 송응준이 새벽에 마을 이름을 지었다하여 효동 또는 새벽골이라고 부른다고 하고 새벽 하늘의 자연을 비유해서 조용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효동이라 했다고 한다. 성주이씨 집성마을로 약 20호가 있다.
  • 黔 丹(內洞)
    • 신라말기에 생긴 마을로써 1560년경 義城金氏 金宇英(號 晦山)이란 선비가 현재의 대가면 沙月에서 이거하여 의성김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면소재지에서 정북으로 트인 金泉방면의 3㎞거리의 도로양편에 자리하여 施設營農으로 들판이 비닐로 덮인 富村이다.

고려말 羅氏들이 마을에 入鄕하여 鳳山이라 칭하였다. 조선시대 鳳亭里라고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봉정洞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인 봉정 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에 의해 봉정 1, 2동이 봉정 1, 2里로 개정되었다.

마을뒤(서북쪽)에 봉황의 머리모양의 산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안에는 冷泉과 큰 정자나무가 있다 하여 鳳亭里라 하였다고 한다. 8개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 水 亭(무징이)
    • 면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2㎞ 남짓한 칠성리 마을 도로 서쪽 산아래 동남으로 향해 아득한 초전평야를 내다보고 있는 마을이다. 安東權氏, 京山李氏, 金海金氏 등 50호의 大村이다.
    • 조선 정조때(1779년경) 盧長成이란 사람이 入鄕하여 마을안에 冷泉과 큰 정자 나무가 있다여 水亭이라 하였으며, 무징이라고도 한다.
  • 鳳山里(鳳亭里, 鳳山)
    • 고려말에 羅氏들이 入鄕할 당시 마을 앞에 下馬碑와 은행나무가 있어 雲山까지는 길손이 말을 메고 쉬어가도록 하였으며, 작은 동산위에 뭇새들이 깃들여 鳳山이라 칭하였다.
  • 朝 陽
    • 죽내, 학고 등의 마을과 이어진 마을로 산비탈 아래 동향한 마을이다.
    • 1946년 宋洛中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농장 따라 정착하여 살다 보니 아침 햇빛이 바로 비친다 하여 朝陽이라 불러 왔다고 한다.
  • 七 星 里
    • 면소재지에서 金泉방면의 도로는 정확하게 眞北이다. 이 길 4㎞ 거리의 양편에 있는 마을이다. 고려말 羅氏들이 정착하여 들 가운데 7개의 암석이 마치 북두칠성과 같이 놓여있다 하여 北面 七星里라 하였으나 지금은 七星里로 부르고 있다.
  • 冷 泉(찬물내기, 酒幕)
    • 水亭 동쪽에 있는 마을로서 그 곳 주민들이 많이 이용했다는 주막이 서 있고 그 근처에는 찬물이 나는 샘이 있다 하여 冷泉이라 불리어졌다.
  • 鶴 皐
    • 무징이 마을과 봉산리 마을에 연이어 북쪽에 있는데 모두 한마을권이다. 조선 효종때(1650) 雲山(지금은 마을 옆 빈터)에 羅氏가 큰 촌을 이루고 살다가 패망하면서 이 마을이 생겼다 하며 뒷산에 학이 많이 서식하여 鶴皐라 칭하였다 한다.
  • 竹 內(外竹)
    • 학고마을 북쪽 조금 떨어진 도로서편의 평야에 자리한 마을이다. 冶城宋氏, 星山都氏, 星州李氏 등 약 20호가 산다. 1840년경 칠성리에서 都생원이 자리를 잡아 새뜸이라 하였으나 마을이 점차 빈곤해지자 방풍을 하면 좋다하여 1930년경 마을 앞 솔밭에 대나무를 심어 竹內라 하였다.
  • 內 竹(大安, 대안)
    • 고려말기(1380년경) 왜적의 침입이 잦아 백성의 피해가 극심함에 碧珍李氏 希慶이 大光山 아래 피난와 살면 편안히 지낸다 하여 大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죽내 북서쪽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므로 대안(內竹)이라 한다고도 한다.

초전면소재지의 동북으로 白川의 동편과 月恒面界 사이의 長山(284m)능선 서편의 漁隱, 싯뫼(楓山)마을의 2개의 자연촌으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시대(영조때) 마을이 개척되어 漁이라 칭하여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月恒面 漁山洞이 되었다.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로 동이 里로 개정되었고 1989년 1월 草田面 으로 편입되었다.

  • 漁隱
    • 칠성리 마을 동쪽 月恒面 仁村洞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다. 1845년 이전에는 갈개 장깃동과 함께 非乎石坊이라 했고 이때에 望星坊이라 했다. 1914년 월항면에 편입되었고 1989년 초전면으로 넘어 왔다. 마을의 환경이 잘 짜여져 있으며 벽진이씨 집성촌이다. 文公 永玉濟 李克松의 玉水堂이 있는데 그는 고려 신종 때 나서 장원 급제하고 도총부 도총관을 지냈다. 漁隱이라는 명칭은 마을앞에 白川이 흐르고 마을 바로 옆에 沼가 있었는데 이 속에 물고기가 많이 놀고 있어 漁隱이라 하였다고 한다.
  • 風山(풍시뫼, 鳳山)
    • 갈개마을 동쪽 산기슭 標高 90m의 마을이다. 명칭의 유래에 대하여는 세가지 설이 전한다. 첫째는 이름이 중복표음되고 있다는 것이다. 단풍을 고어로 "시"라 했다. 군내에는 龍岩面의 싯질(시질의 된소리=싯찔=풍곡)이 예가 되겠다. 마을 뒤 장산(해발 284m)의 고운단풍을 연유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름이다.
    • 또 한편으로는 백천이 흐르고 있는 주변에 마을을 개척하여 風山이라 이름하였다는 설도 전해오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마을 뒷산에 꿩을 비롯한 새들이 많아 처음 동명을 鳳山이라고 하였으나, 그 뒤에 흉년이 자주 들어 풍년이 오라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풍시미(風山)이라 하였다고도 한다. 어산마을과 함께 1989년 월항에서 편입된 星山李氏 집성촌이다.
  • 玉水堂
    • 漁山里마을에 있다. 文公 玉水濟 李克松을 亭祀는 곳이다.

통일신라 이래로 유곡방에 속하였고, 마을 동쪽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운데 백천이 흐르며 사방이 넓은 들판에 무성한 갈대밭을 개척하여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하여 노포(蘆浦, 갈개)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초전면 동포동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인 동포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3개의 마을 권으로 구분된다.

  • 노포(蘆浦)
    • 초전평야 중앙부에서 초전-김천도로와 접한 그 서편의 마을이다. 조선 중종때(1515년경) 해주오씨 몇 세대가 정착하여 갈대밭을 개척하여 살았으며, 그 후 광산김씨와 파평윤씨가 1520년에 이주하여 3성이 합동으로 개발하고 삶의 터전을 닦아 생활하면서 갈대가 많다 하여 노포동이라 이름 지었으며, 갈개라고도 부른다.
  • 동산이
    • 갈개마을 서편에 백천의 지류가 닭실과 홈실로 갈리는 곳에서 낮은 산자락을 깔고 자리한 마을이다. 동산이를 동산(東山)이라 부르기도 한다. 1580년 경산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동쪽에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산이 있기 때문에 ‘동산이’ 혹은 한자어로 ‘동산(東山)’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 봉하정(鳳下亭)
    • 갈개마을 서북 조금 떨어진 홈실계곡 어귀에서 표고 100m의 언덕을 뒤로 하며 남향한 마을이다. 봉하정은 1590년 경 벽진이씨 몇 세대가 이주하여 마을 뒷산의 형세가 봉황새의 모양을 이루고 있어 마을 이름을 봉황산이라 불러 왔으며 이 산 밑에 마을이 위치하여 있기 때문에 봉하정(鳳下亭)이라 하였다고 한다.
  • 상포(上浦)
    • 조선 선조 때 해주오씨가 이주하면서 노포마을 위에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상포라 불러 왔다고 한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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