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面은 星州 10개面 中 가장 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伽倻山의 지맥인 별뫼(星山:白馬山 715m)와 懸鈴山(792m)을 북으로 하여 金泉市와 경계하고 있고, 동쪽은 月恒面, 서쪽은 碧珍面, 남쪽은 星州邑과 이웃하고 있다. 서북의 산악에서 흘러내린 沙質충적토는 중남부의 비옥한 농지를 이루며 교통은 산악지 외에는 사방으로 비교적 편리하다. 면적은 66.26k㎡이고, 법정 12개리, 행정 24개리, 2,000여호에 6,400여명의 인구가 사는 농업위주의 큰 面이다.
통일신라이래 酉谷, 草田, 非乎石의 3개坊으로 되어있었는데, 酉谷坊은 詔成, 月谷, 高山, 東浦里였고, 草田坊은 大獐, 紫陽, 文德, 七仙里, 非乎石坊은 仁村, 漁山, 龍鳳, 鳳亭里 일대였다. 이중 非乎石坊은 1845년(헌종 11) 牧使 金榮이 望星坊이라 改名하였다. 1895년(고종 32) 각 坊을 面이라 개정하였다.
1914年 3月 행정구역 개편시 草田·酉谷 두 面이 合面되어 草田面이 되었고 望星面의 일부(仁村,負山)는 月恒面에 編入되었으며, 1921년 6월 현위치(大獐洞 681-6)로 면사무소가 이전되었고, 1936년 11월 현청사 및 부속건물이 건립되었다.
1943년 8월 11개 洞이 25개區로 分區되었다가 1952년 3월 20개 洞으로 축소되었다. 1971년 1월 21개 洞(龍鳳洞1, 2)으로 分洞되었으며, 1975년 6월 大獐 2洞이 2, 3洞으로 分洞되어 22개 洞이 되었다.
1986년 1월 다시 龍鳳 1洞이 1, 3洞으로 분동되었고, 1987년 1월 大獐 1洞을 1, 4洞으로 文德 1, 2洞을 1洞으로 개편하여 23개 洞이 되었다.
1988년 5월 洞이 里로 개칭되었으며, 1989년 1월 月恒面 漁山里가 草田面으로 편입되었다. 현재 행정관할 구역은 大獐, 高山, 東浦, 文德, 鳳亭, 韶成, 龍鳳, 龍星, 月谷, 紫陽, 七仙, 漁山의 12개 里로 되어있고 자연촌 마을구역은 40개 마을권 58개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草田이란 명칭은 푸른 초목이 울창한 넓은 들판을 개척하여 십만리들이라 이름짓고 곡식을 가꾸는 평야를 만들었으므로 면 이름을 푸른들을 상징하여 만든 것이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선시대(1700년경)에는 大馬라 칭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초전면 大獐洞이라 개칭하였다.
1952년 行政洞 대장 1, 2동으로 분동하였고, 1975년 대장 2동을 2, 3동으로 분동하였으며, 1987년 대장 1동을 1, 4동으로 분동하였다.
1988년 5월 조례 제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대장 1리(大馬)는 초전면 면소재지이다. 3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전면소재지의 서북쪽 산곡을 바탕으로 서편으로는 벽진면으로 통래하는 군도가 있고 동남으로 초전의 중심과 가깝게 자리해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高山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별뫼(星山 : 白馬山 715m)와 달뫼(月山 : 達馬山 611m)의 남쪽에 鳳陽山(588m)이 있어 삼각지를 만들고 그 안에 달밭(月田)마을과 봉양산 동남의 홈실(椧谷)로 구분된다. 고려 충숙왕 때 李堅幹에 의해 好音谷이라 칭하여 졌다. 1317년 椧谷이라 개칭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月谷洞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이 월곡 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月谷이란 마을 명칭은 마을을 둘러싼 달마산 계곡에서 산봉우리에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상징하여 붙인 것이라 하기도 하며, 행정구역 개편으로 月谷洞이 되었을때는 椧谷과 月田의 이름을 따서 月谷이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 지역의 原地名의 근거는 별뫼와 달뫼에서 이루어졌다. 7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홈실과 달밭마을의 2개 마을권으로 나누어 진다.
조선시대(1592년경) 벽진이씨가 마을을 개척하여 文致라 칭하여 왔는데 1914는 행정구역 개편때 초전면 七仙洞으로 개칭하였다.
1952년 행조선시대(1592년경) 碧珍李氏가 마을에 入鄕하여 文致라 칭하여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초전면 七仙洞으로 개칭하였다.
1952년 행정동을 칠선 1, 2洞으로 분동하였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칠선 1, 2里로 개정하였다. 5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전면의 남쪽 끝으로 碧珍面과 星州邑을 경계로 하는 곳이며 마을 뒤로 臥龍山(113m)의 완만한 구릉이 감싸고 있다.
龍星洞이라 함은 臥龍의 龍자와 星州에서 편입되었다하여 星자를 따서 龍星洞이라 이름한 것이다. 1952년 행정동인 용성 1, 2洞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로 洞을 里로 개정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주군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金陵郡界의 하룡, 동녕마을에서 남쪽으로 細川山峽의 외진곳이며 위쪽을 上韶라 하고 韶成저수지 북쪽 뚝아래는 韶野라고 하며 박실(朴谷)과 連鳳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1592년경) 密陽朴氏에 의하여 마을이 조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韶成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 밀양박씨 몇 세대가 피란와서 살면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達磨山 아래 두개의 마을이 있어 윗마을은 上韶라 하고 아랫마을은 韶野라 불렀다 한다. 한때는 박씨 9세대가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마을이름을 九姓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韶野와 九姓의 이름을 따서 韶成里라 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주군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金陵郡界의 하룡, 동녕마을에서 남쪽으로 細川山峽의 외진곳이며 윗쪽을 上韶라 하고 韶成저수지 북쪽 뚝아래는 韶野라고 하며 박실(朴谷)과 連鳳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1592년경) 密陽朴氏에 의하여 마을이 조성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韶成洞이 되었고 1988년 5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임진왜란(1592) 당시 밀양박씨 몇 세대가 피란와서 살면서 선녀들이 내려와 놀았다는 達磨山 아래 두개의 마을이 있어 윗마을은 上韶라 하고 아랫마을은 韶野라 불렀다 한다. 한때는 박씨 9세대가 한곳에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마을이름을 九姓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후 韶野와 九姓의 이름을 따서 韶成里라 하였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草田 - 碧珍間 도로를 접하여 나지막한 산등을 북으로 가리고 남향해 있다.
약 600여년전 고려시대(1350년경) 경기감사 宋構가 합천 冶爐에서 개경으로 가던 도중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이후 文章 道德이 있는 곳이라 하여 文德里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文德洞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문덕 1, 2,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87년 1월 문덕 1, 2동을 문덕 1동으로, 문덕 3동을 문덕 2동으로 개정되었으며 1988년 5월에는 조례 1076호에 의해 洞이 里로 개정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대략 소래와 감나무골의 2개의 마을권으로 구분되어 있다.
星州-金泉도로의 金陵郡界에 접해서 그 남쪽으로 넓게 위치한 초전의 동북부를 이루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초전면 龍鳳洞이라 칭하여 졌고, 1971년 용봉 1동이 용봉 1, 3동으로 분동되었다.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에 의해 용봉 1, 2, 3洞이 용봉 1, 2, 3里로 개정되었다.
마을 개척당시 마을 뒷산의 봉우리가 다섯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마을을 구성하고 있는 한 마을(龍頭마을)은 龍의 머리와 같은 형상이며 다른 한 마을(鳳舞마을)은 새가 춤을 추는 형상을 하고 있다 하여 龍鳳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9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星山(별미)에서 동남으로 뻗은 산맥이 초전과 벽진의 면계를 이루면서 그 중간에 紫山이 솟아 있는데 북쪽의 높은 봉을 큰 자산, 남쪽의 조금 낮은 산을 작은 자산이라 한다.
두 봉우리를 중간으로 해서 동쪽으로 뻗은 산자락에 星州李氏 집성촌 4개 마을을 今丹이라 하며 작은 자산 끝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잡은 마을이 義城金氏 집성촌으로 黔丹(일명 內洞)이며 큰 자산을 서편에 두고 터를 잡은 새박골밑으로 모퉁이를 돌아 新豊이 동남쪽을 향해 자리잡고 있다. 최신에 현대식 건물 5동이 신풍입구에 세워지면서 새마을을 이룬것까지 8개 자연부락을 합쳐 자양리라고 부른다.
면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黔丹은 신라말기에 마을을 이루었으며 黔丹寺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 하여 검단리로 불리어져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초전면 자양동이 되었고 1952년 행정동인 자양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1989년 5월 조례 1076호로 동이 리로 개정되면서 현재의 자양리가 되었다. 통칭 黔丹里는 신라말기에 생 긴 마을로써 성주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자산 자락을 깔고 자리잡고 있으며 자산은 성주의 정기가 서린 靈山으로 星山, 月山, 鳳陽山, 梅績山과 함께 성주문화의 뿌리로 빛나는 고대 碧珍伽倻의 城邑國 형성에 필수 요건이었다.
지리 풍수상으로 작은 자산 정상에는 천하 명당이 있어, 지금도 사람이 밟으면 웅장한 소리가 날뿐 아니라 이곳에 묘를 쓰면 성주가 망한다고하여 아무도 무덤을 쓸 수가 없는 곳이다. 최근까지도 가뭄이 극심할 때면 성주군 유지들이 生亥을 가지고 올라가 이곳에서 기우제를 올렸는데 어찌나 영험했던지 제관들이 기우제를 지내고 산을 내려오는 도중에 비가 와서 옷을 흠뻑 적시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신라말기 작은 자산 중턱에는 검단사란 절이 있었고 검단사가 있었던 곳을 부처돌 꼭대기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절터의 흔적으로 돌축대가 남아있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당시 검단사에는 빈대가 하도 많아 절을 헐어 버렸다고 한다.
자산은 옛부터 지리 풍수가들이 빼어난 산세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던 명산으로 지금도 최치원선생이 약을 지었다는 돌호박이 정상을 비켜 남아있고 큰 자산 동쪽 능선을 따라 내려오면 가마바위가 옛날처럼 그대로 서있다.
세시풍속으로 정월 대보름이면 청춘 남녀들이 큰 자산 작은 자산 두 정상에서 달집을 태우며 꽹과리와 춤으로 풍년을 기원하며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면소재지에서 정북으로 트인 金泉방면의 3㎞거리의 도로양편에 자리하여 施設營農으로 들판이 비닐로 덮인 富村이다.
고려말 羅氏들이 마을에 入鄕하여 鳳山이라 칭하였다. 조선시대 鳳亭里라고 개칭하였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봉정洞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인 봉정 1, 2동으로 분동되었고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에 의해 봉정 1, 2동이 봉정 1, 2里로 개정되었다.
마을뒤(서북쪽)에 봉황의 머리모양의 산이 펼쳐져 있고 마을 안에는 冷泉과 큰 정자나무가 있다 하여 鳳亭里라 하였다고 한다. 8개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져 있다.
초전면소재지의 동북으로 白川의 동편과 月恒面界 사이의 長山(284m)능선 서편의 漁隱, 싯뫼(楓山)마을의 2개의 자연촌으로 나누어져 있다.
조선시대(영조때) 마을이 개척되어 漁이라 칭하여 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月恒面 漁山洞이 되었다. 1988년 5월 성주군 조례 1076호로 동이 里로 개정되었고 1989년 1월 草田面 으로 편입되었다.
통일신라 이래로 유곡방에 속하였고, 마을 동쪽에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운데 백천이 흐르며 사방이 넓은 들판에 무성한 갈대밭을 개척하여 생활의 터전을 닦았다 하여 노포(蘆浦, 갈개)라 불러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시 초전면 동포동이 되었다. 1952년 행정동인 동포 1, 2동으로 분동되었다.
4개의 자연촌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3개의 마을 권으로 구분된다.
업데이트 날짜 : 2023-01-01 00: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