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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의 동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漆谷郡 岐山面과 경계하고 서쪽은 草田面, 남쪽은 星州邑과 船南面을 접하고 있다. 懸鈴山에서 내려온 산릉이 角山(468m)으로 뻗은 동북산악지대와 서남부의 白川邊의 비옥한 평야지로 되어있고, 星州에서 倭館으로 통하는 國道와 船南에서 草田으로 이어지는 道路가 면소재지에서 교차하여 생활환경이 좋은 곳이다.

통일신라이래 柳東, 唐沼, 非乎石의 3坊으로 구분되어있었는데, 柳東坊은 柳月, 大山, 安浦, 龍角里 일대였고, 唐沼坊은 甫岩, 水竹, 地方里 일대였으며 1914년 星州面에 편제된 鶴山里가 포함되어 있었다.

非乎石坊은 長山·漁山·仁村·龍鳳里 일대였는데 1845년 목사 金榮이 望星坊으로 개명하였다. 1895년 이들 각 坊은 각각 面이 되었다.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시 面폐합으로 柳東, 唐沼, 望星의 3面이 合面되어 月恒面이 되었다.

이때 龍鳳洞이 草田面에 편입되었다. 1914년 7월 행정구역 개편시 洞폐합으로 星州面 三峰洞이 月恒面 大山洞에, 月恒面 踏溪 일부가 星州面 鶴山洞에, 蘆浦 일부가 草田面 東浦洞에 편입되었다. 1988년 5월 각 洞을 里로 개정했다. 1989년 1월 행정구역 개정으로 漁山里가 草田面에 이관되었다.

월항면의 남단부에서 영취산(325m)을 동으로 하고 이천과 백천이 합류하는 동쪽에 산을 의지하여 자리한 마을이며, 마을 앞에는 월항에서 선남으로 통하는 군도가 접해있고 . 1450년에 성산이씨로 진주목사인 이우(李友)라는 선비가 이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마을 앞에 큰 내(백천(白川)과 이천(伊川)이 합류)가 있다 하여 대포(大浦(한개))라 칭하였다.

영취산(靈鷲山)이라는 큰 산을 배경하였다 하여 (대산리)大山里라 칭하였음.

이 마을의 문화재 로서는 민속자료43호 교리댁.민속자료44호 북비고택.민속자료45호 한주종택.민속자료 46호 월곡댁. 문화재자료326호 하회댁. 문화재자료 354호 극와고택 등이 있음.

면 소재지에서 2.5km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이천(伊川)의 그림같은 삼봉(三峰)을 냇물 건너로 바라보는 남향한 마을이며 (해주오씨)海州吳氏와 김해김씨(金海金氏)등이 강촌(江村)이다.

1500년경 이 마을 개척시 소리개가 (영취산)靈鷲山을 돌다가 그 산밑에 앉아 울고 갔다하여 명산嗚山(울뫼)라 하였다 한다.

풍수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 부락은 이후 근심이 끊일 날이 없다하여 한때 華山으로 개칭한 적이 있다고 한다.

면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1km 거리에서 낮은 丘陸으로 마을을 감싸고 남향(南向)한 마을이며 너그러운 사람이 많이 나기를 바라는 뜻에서 동명(洞名)을 너그러울 관자를 써서 관동이라 하였으며, 경주최씨(慶州崔氏)가 많이 살고 있는 마을임

角山(468m)에서 서남으로 뻗은 산의 맥이 墨山(260m)을 이루어 있고 그 남쪽 1km 거리에서 월항-초전간 군도와 접해 남향한 마을이다. 1300년경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먹뫼(墨山)이라는 마을이름은 조선 성종때 南湖 都應天이 이 마을에 입주하여 인근 3개마을 (楮岩, 筆山, 당새(唐.龍文))과 함께 文房四友를 이루려면 먹에 해당된다 하여 墨山이라 칭하였고, 또 이 마을이 다른 마을보다 크다하여 큰마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성주도씨와 1940년까지 성주군 월항면 사무소가 이 마을에 위치해 있었다.

용각 2리는 월항면으로 초전면 방면으로 2.5km지점에 위치하 고 있으며, 자연부락은 竹管.筆山.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 竹管(댓갱이, 대갱, 竹管)
    • 당새 동쪽 가까이서 낮은 구릉을 동북으로 가리고 앉은 마을이다. 1400년경 마을이 개척되었으며, 마을 명칭을 竹管 또는 竹官으로 쓰는데 옛날 이마을에는 대나무 밭이 있었으며 竹管은 옛날 선비들이 모여 문방사우인 紙, 筆 硯, 墨의 뜻으로 그중 墨山은 먹, 筆山은 붓대의 역할을 한다하여 대롱 管字를 써서 竹管이라 쓰기도 하고, 竹官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갈 때 이곳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 짚고가면 반드시 벼슬을 한다하여 벼슬 官字를 써서 竹官이라 쓰기도 한다.
  • 筆山
    • 鈴山에서 내달은 산맥이 角山에서 멎었고 그곳에서 서남 1.5km 산계곡을 접해서 전형적인 隱士의 修道名地다. 峰밑에 위치하고 있는 골짜기 마을로써 조선시대에 문방사우인 붓에 해당하는 곳이라 하여 필산이라 이름한다.

월항면소재지에서 초전방면의 군도 2km쯤 길 동북에 이어진 마을이다.

약 600여년 전에 이 마을 개척당시 몇 선비들이 모여서 龍角洞을 문방사우의 뜻중에서 글(文)에 속하는 곳이라 하여 文을 따는 한편 마을 뒤의 묘한 형태의 산봉의 흐름이 풍수설에 용의 혀로 전해 龍角이라 했으며, 또 옛날 마을앞에 연못이 있다하여 唐라 또는 唐라 불렀으며 지금도 龍文, 당새(唐)라 부르고 있음.

면 소재지에서 倭館으로 이어진 33번 국도가 漆谷郡界에 이르는 달암티(月岩峴)에 위치하여 성주의 동북관문지역이며, 柳月이라는 명칭은 柳村(柳月2里)의 柳자와 月岩마을(柳月1里)의 月자를 따서 지어졌다. 자연부락은 월암.월곡.새마을. 3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후손 都孟寧과 그 아들 杏亭 都衡, 雲齋 都勻, 岩谷 都世純의 世居地가 되었다.

  • 月岩(달암)
    • 성주군과 칠곡군의 경계이며 33번 국도의 고갯마루를 달암티(표고 130m)라하고, 그 남쪽의 산봉을 달암산(月岩山:304m)이라 하며 이산에 달바위가 있고 달암산 서쪽 산아래에 國道와 남쪽에 있는 마을이며, 선조때 대구에서 慶州인 月 崔天綱이 이마을을 개척하여 그 후손이 살고 있고 海州吳氏와 星州人 李龜의 후손이 살고 있다. 개척 당시 마을 뒷산에 달 모양의 바위가 많다 하여 月岩이라 하였다고도 하며 이 바위 위로 달이 떠오른다 하여 달이 뜨는 바위라는 뜻으로 달암(月岩)이라 했다고도 한다.
  • 月谷(달곡)
    • 달암재 아래 국도의 북쪽 약 300m에 남향한 마을로 달암마을과 마주보고 있다. 마을 서북 1.2km 에는 山峰이 가려있고 동북으로 버들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光山人 晩萬 盧繼宗이 인조때 상주에서 이곳에 입향하여 학문과 덕망을 베풀며 살았으며 光山盧氏의 집성촌이다.
  • 새마을(새마실)
    • 유월2리 유촌마을의 남쪽에 위치하며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이라 부르고 있다. 이 마을의 문화재로서는 문화재자료 286호 덕암서원이 있음.

달암재 아래 국도에서 북쪽산골로 1.3k, 각산성에서 남쪽으로 1.3km의 계곡상류에 서남향한 표고 70m의 古代 柳等坊의 要地마을이다.

550년경 順興安氏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1700년경 까지는 柳等坊이라 하였다. 마을 주변의 산세가 한 그루의 버드나무 같이 교교하게 뻗어 있고 물가에 버드나무가 많다하여 버들이(柳村)라 하였다.

마을 뒤 角山(468m)은 가야시대에 쌓은 산성이있고 각산 봉수터가 성터안에 있으며 현재 安東金氏와 順興安氏등이 살고 있다.

먹뫼(墨山) 서편 도로에 접해있는 마을이다.

본래 마을은 서쪽이었는데 약600여년 전에 金寧金氏가 먹뫼(墨山)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동쪽으로 넓혀 지면서 샛들(새뜸)했고, 개척당시 마을 주위에 닥나무(楮)와 바위(岩)가 많아 이름을 楮岩 이라 했다함.

南原梁氏의 집성촌이며 고려 공민왕 때(1374) 西海道副使 지낸 韓方道가 세거한 곳이기도 하다.

월항면의 서남, 성주읍과 초전면의 경계 가까이에서 印 山을 서남으로 산을 등지고 동북으로 白川과 보암들이 角山을 바라보는 동향한 마을이다.

조선 세조 때 星山裵氏가 전라도 順川에서 이 마을로 들어와서 개척하였다.

당시에는 상서로운 풀( )이라 의미에서 洞이라 칭하였으나 그후에 큰 선비가 많이 나오라는 클 洞이라 개칭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星山裵氏와 密陽朴氏의 집성촌이다.

1300년경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덤개(岩浦)"라 칭하였다. 이 명칭은 鈴山(방울암산) 준맥이 角山(468m)을 이루어서 동남으로 뻗은 儉岩山 산줄기가, 별뫼(星山)에서 발원된 白川이 동남으로 곡류하면서 浦을 이룬곳에 멎으면서 넉넉히 형성된 吉地의 마을이며 명산대천의 명을 인용하여 덤개(岩浦)라 칭한 것이다.

百忍堂이라고도 칭하며 京山李氏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문화재 로서는 문화재자료 287호 백인당제실 이 있음.

효종 10년 己(1659)년에 京山人 盧士 李위가 儉岩山一脈이 白川 浦 에 멈춘 지세가 좋다하여 현 百忍에서 이주하여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도 한다.

새로 터를 열었다고 하여 새터(新基)라고 칭하였다. 京山李氏의 집성촌이다.

1300년경 개척 당시 덤개라 하였는데 그 후 덤개마을의 5개 자연촌(百忍堂.新基.上浦.中浦.東亭里)중 제일 웃마을이라 하여 상암이라 칭하다가 뒤에 上浦라 칭하고 있다

마을 앞쪽에 기이한 산봉이 홀로 떨어져 있어 한때는 獨山이라 불렀으며 죽령으로 넘어가는 작은 재 주변에 밤나무가 많았기에 밤나무亭(栗亭) 또는 밤나무고개(栗嶺)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마을은 京山李氏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의 문화재 로서는 문화재자료 286호 덕암서당이 있음.

星山人 李達心, 李達枝, 李達英 3형제가 한개(大浦)에서 1625년경 이곳으로 이주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달지는 京山人 沙月亭 李綸의 사위로 그의 후손이 입성을 이루고 있다.

개척당시 大浦의 浦자와 마을앞에 名水인 中井이 있다하여 中浦라고 칭했다고 하기도 하고 또 大浦와 덤개(岩浦)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하여 中浦라 칭했다고도 한다.

월항면 소재지 마을로 소재지 중심부로는 성주와 왜관을 통하는 33번 국도가 있으며, 서편으로 들건너 伊川의 지류인 白川이 있으며, 자연부락은 東亭里, 安茂室.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 東亭里(동정리)
    • 1880년경 개척되었다. 柳洞山谷에서 발원된 물이 이곳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수양버들이 우거져 좋은 그늘이 마치 정자와같고 덤개마을 동쪽에 있다하여 東亭里라 불렸다고 한다. 현재 월항면 사무소와 각급 기관이 위치한 마을이다.
  • 安茂室(안무실)
    • 월항면소재지에서 선남면으로 나가는 길 동쪽에 표고 112m의 낮은 산봉을 가리고 남향한 마을이다.

草田面所在地에서 동쪽으로 月恒面으로 들어가는 약 2km거리의 군도에서 북쪽으로 仁村里로 향해지는 갈림길에 접해서 자리한 부촌마을이며, 자연부락은 哲山, 長枝 2개의 자연부락이 되어 있다.

  • 哲山(철산, 鐵山)
    • 1250년경 이 마을이 개척되었다고 한다. 개척당시 마을 앞 개천을 건너기 위하여 鐵다리를 놓았다 하여 鐵山으로 부르다가 그 후 밝을 哲자를 사용하여 哲山으로 부른다고 한다. 이 마을 哲山은 高靈朴氏외 10여 성씨가 분포되어 있는 月恒面에서 제일 큰 마을이다
  • 장산(장갓,長枝)
    • 마을 북쪽에는 鈴山에서 멈칫 뻗은 줄기가 장산(284m)을 이루었고, 이 마을 장갓은 동남향한 古村이다. 이 마을의 북동편에 있는 棲鎭山의 산줄기가 이마을 뒷산까지 길게 뻗어 있어 긴 산가지 마을이라는 뜻으로 長枝라 부른다 하며, 또 긴산이란 뜻으로 長山이라고도 한다.

草田面所在地 동쪽 약 500m 白川을 건너 낮은 산언덕을 북으로 깔아 白川의 曲流를 내려다 보며 남향한 마을이다.

1600년경 마을이 개척되었다. 옛날 이 마을 건너편에 武陵里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한 선비가 陶潚明의 "挑花原記"에 나오는 별천지 ’무릉도원’을 생각하여 마을 주위에 복숭아 나무를 많이 심고 도원이라 불렀다고 한다.

또한 이 마을을 멍징이로도 부르고 있다. 汚川점卜氏의 집성촌이며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月恒中部 山間地를 차지해 있으며 약 1600년경에 개척되었다. 자연부락은 霞南, 풀모산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 水南(나부람. 霞南)
    • 마을 중간에 개울이 흐른다 하여 水南이라고 하기도 하며 이 개울에 나오리(노을 霞)가 비친다 하여 霞자와 南자를 합하여 霞南이라 하였는데 나오리, 나부리남이라 부르다가 나부람으로 되었다고 한다
  • 풀모산(草地山)
    • 나부람 남쪽 약 500m거리의 마을이고 마을앞에 草地가 있으며 哲山을 향하여 서향한 마을이다. 마을 앞산이 어머니의 유방과 같다하여 雙 穴이라 하였다가 어머니를 부르는 산이라 하여 부를모산, 불모산(呼母山)이라 하다가 다시 불모산이 변해서 풀모산이 되었다고 한다.

마을 뒤로는 칠곡군 기산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과 筆山과 地山으로 드나드는 산길이 있다.

죽방은 1700년경 柳應濱이라는 선비가 개척 하였다고 하며 마을 주변에 대나무가 많다 하여 竹坊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 龜岩里(구암리)
    • 거북형상의 바위가 입구에 있다하여 龜岩里라 하였다 한다. 竹坊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산간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龜堂 李希聖을 추도하는 龜岩亭이 있다.

月恒面 北端의 鎭山(742m)아래 산간 마을이며 자연부락은 鵲村, 新基村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있다.

  • 鵲村(까치마, 鵲谷村)
    • 鎭山의 서쪽 약 4km 지점의 계곡과 들판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禪石寺로 올라가는 길목마을이다. 고려말 나옹대사가 도망가는 충신 노씨를 데리고 사찰(단석사)로 가던중 까치가 많이 울고 있는 곳이 있어 까치가 우는 곳은 손님을 부르는 곳이라 하여 盧씨에게 그곳에 살도록 하여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까치마 또는 鵲谷村으로 부르다가 마을이 서편으로 점점 옮겨 지면서 작촌으로 부르게 되었다.
  • 신기촌(고촌)
    • 조선 영조때 高萬 이라는 사람이 까치마 서편에 입주하여 새마을을 개척하고 新基라고 칭하다가 후일 고촌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지금은 고촌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쓰고 있다. 이 마을은 큰 새뜸과 작은 새뜸으로 이루어져 있다.

月恒面 北端 棲鎭山(742m)아래 산간고원지대에 위치한 마을이며, 자연부락은 扶仁, 禪石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 扶峴(불이티(부리티)), 扶仁
    • 신석사의 절아래 마을이고 산골을 헤집고 동서로 고원의 농토를 기틀삼아 자리하고 있다. 1500년경 마을이 개척되었다. 棲鎭山 頭 峰아래에 자리잡은 마을로 당초에는 佛仁洞이라 했다가 그후 金在根이라는 선비가 扶仁洞으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불이티(부리티) 扶仁 두가지로 부르고 있으며 扶仁은 선비 金在根이 인재가 많이 배출되리라는 뜻으로 佛仁洞을 扶仁洞으로 개칭하였다는 설이 있다.
  • 禪楮村(禪石)
    • 鈴山(792m)의 동산 줄기에 棲鎭山이 있고 그 양지바른 산중에 禪石寺와 몇집의 人家가 있어 선석사 마을이라 하며 月恒面의 最北端 마을이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神光寺를 고려 말엽 禪石寺로 개칭하였는데 이 禪자를 따서 禪楮村 혹은 禪石이라 칭한다. 이 마을의 문화재로서는 도지정 문화재 113호 선석사 대웅전, 도유형문화재 88호 세종대왕 자태실이 있다.

서진산(742m)에서 각산(468m)으로 뻗은 산등성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

자연부락은 池山(모산), 坊(띠뱅이) 2개의 자연부락으로 되어 있다

  • 池山(모산, 못안, 山)
    • 장갓마을 동쪽 약 1km의 계곡을 서남쪽으로 장산(284m)의 비탈을 감싸 아래, 위의 두마을이 있다. 옛날 極池라는 천연적인 溜池자가 있었는데 이 溜池의 이무기가 용이되어 하늘로 올라가며 꼬리로 못뚝을 무너뜨려 못의 물이 빠져 나가고 이 못터 안에 마을이 들어섰다 하여 못안((모산(池山))이라 하였다 한다. 아래, 윗마을을 각각 아랫모산, 윗모산이라 부르고 있다.
  • 茅山(띠뱅이, 띠방이)
    • 鎭山에서 내린 능선이 角山으로 뻗은 중간에 성주와 칠곡의 郡界 가까이에 터잡은 山村이다. 옛날 이곳에 띠풀(도롱이를 만드는 풀 : 모)이 밭을 이루고 많이 자생하고 있었는데 사람이 이주하면서 띠풀을 베어내고 마을을 만들었다 하여 띠뱅이(茅方)이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업데이트 날짜 : 2022-01-28 11:4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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